한국에서 선보이는 많은 라이선스 뮤지컬들의 스포트라이트는 언제나 남자배우들의 몫이었다. 이중인격자이거나 살인자이거나 유령이거나. 하지만 이제 오롯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은 언론도 남자도 손쉽게 주무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그 어떤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벨마와 록시 두 여인의 이야기를 그리며 2000년 한국초연 이후 여섯 번째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시카고>(CHICAGO)의 프레스 리허설이 6월 5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렸다.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한 <시카고>는 1920년대 어두웠던 미국의 현실을 농염한 재즈 선율과 함께 그려내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프레스 리허설에서 선보인 30여분의 하이라이트 공연에서는 시크하고 섹시한 뮤지컬이라는 수식어에 걸맞는 밥 파시의 절제된 안무가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안무들을 배반하는 동작들과 배우들의 디테일한 손짓은 관객들로 하여금 기이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박자 하나, 음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춤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안무가의 의도는 오프닝곡인 ‘All that jazz’에 등장하는 자동차 키를 돌리는 동작 하나를 2시간 동안 연습하도록 만들었다. 2009년 <시카고>에서는 9년 전 초연에 참여했던 인순이, 허준호, 최정원과 2007년부터 합류한 옥주현, 배해선 그리고 새롭게 록시로 발탁된 고명석이 함께하며, 6월 5일부터 29일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계속된다.

“난 누구의 여자도 아니야. 내 인생을 살래”
벨마 켈리, 인순이ㆍ최정원

유명한 보드빌 배우 출신의 벨마 역에는 인순이와 최정원이 캐스팅 되었다. 9년 만에 벨마 역으로 뮤지컬 무대에 다시 오른 인순이는 53살이라는 본인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관능미와 파워풀한 보이스를 무대에서 폭발시킨다. 특히 그녀는 등퇴장에서부터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사이에도 그 어떤 배우들보다 더 도도하고 강한 캐릭터를 줄곧 유지해 눈길을 끌었다. “9년 전만 해도 ‘착한 벨마’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이번엔 ‘독한 벨마’를 만들어 보려 노력중이다. 무대 경험이 많지만 뮤지컬 무대에서는 내가 초보나 마찬가지이니만큼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고,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다.” 9년 전 록시 역을 맡았던 최정원은 2007년부터 벨마로 <시카고> 무대에 계속 오르고 있다. “<시카고>만이 낼 수 있는 블랙코미디 요소가 나와 잘 맞는 것 같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 제일 좋은데 9년 만에 같은 배역으로 인순이 선배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나에겐 큰 행운이다.”

“삶이 게임이라면 난 우승할꺼야”
록시 하트, 옥주현ㆍ배해선ㆍ고명석

빌리의 도움으로 벨마를 밟고 일약 스타로 떠오르는 록시 역에는 옥주현, 배해선, 고명석이 함께한다. 옥주현과 배해선은 2007년부터 계속된 록시의 분신들이며, 특히 옥주현은 2008년 이 작품으로 <제2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시카고>는 내게 안식처 같은 곳이다. 브로드웨이 <시카고> 전용극장에 걸린 내 사진을 보고 더 잘해야겠다고 의지를 다졌으며, 이제 록시의 옷을 자신 있고 예쁘게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렌트>의 미미, <록키호러쇼>의 마젠타 등 강한 캐릭터들을 줄곧 맡았던 고명석이 2009년 새로운 록시로 태어난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어린 시절 브로드웨이에서 보고 감탄했던 작품인데 이 무대에 서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특히나 객석에서만 바라보던 많은 선배님들과 공연할 수 있어 너무 좋고, 선배 최정원을 바라보는 후배 고명석의 마음을 담으면 그야말로 벨마를 동경하지만 이기고 싶어 하는 록시의 마음이 그대로 연기로 표현되는 것 같다.”

“재판소송 절차에 대한 사랑,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사랑입니다” 빌리 플린, 허준호
모든 죄수들이 변호를 맡기고 싶어 하는 꿈의 변호사이자, 벨마와 록시의 변호를 맡아 그녀들을 스타로 만든 빌리 플린 역에는 초연에 참여했던 허준호가 맡는다. “초연 이후 9년 만에 같은 배역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불러주지 않아서 서운한 마음도 있었는데 (웃음) 다시 캐스팅 되었다는 사실이 제일 기뻤다. 하지만 초연에 비해 이번 버전은 감정의 변화가 심한 캐릭터로 설정이 되어 있어서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빌리의 대사들은 예전에 비해 속도도 빨라졌고, 템포도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에 그것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웃음)”

관전 포인트
초연에 참여했던 인순이가 “무대가 조금 더 컸으면 싶기도 하다”고 얘기할 정도로 <시카고>의 무대는 정중앙에 빅밴드가 위치하는 것 외에는 별도의 세트가 없이 진행되어 가끔은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적인 전개보다는 춤과 노래로 극이 진행되는 만큼 이내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발산하는 것보다 내면에서 삭히고 절제하는 안무가 더 어렵다”는 배우 최정원의 말처럼, 앙상블 댄서들 중 일부는 갈비뼈 2대에 금이 간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투혼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빌리를 주축으로 한 벨마와 록시의 1920년대 언론장악은 오늘의 한국에서도 진실보다는 포장을 중시하는 옐로우 저널리즘에 일침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제공_신시컴퍼니

글.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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