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할 때가 있어요.” 1946년생, 백발이 성성한 머리와는 달리 청년처럼 활기차게 이야기하던 정하연 작가는 몇 번인가 “쓸쓸하다”고 말했다. 1968년 신춘문예에 단막극으로 등단, 희곡과 라디오에 이어 TV 드라마를 집필했고 KBS <아내>, SBS <모래 위의 욕망> 등 수많은 히트작을 냈던 그는 지난 해 통속적인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그려낸 드라마 MBC <달콤한 인생>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지만 요즘의 TV 드라마는 그에게 즐겁지 않다. “드라마 자체가 국어가 안 되는 드라마를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쓸쓸하단 말이에요.” 시대를 휩쓰는 ‘막장 드라마’들은 그에게 이해하기 힘든 대상이다. “그동안 후배들에게 ‘불륜 드라마’라는 건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윤리에 어긋나는 무엇을 통해 새로운 윤리와 가치를 찾기 위해 인간의 관계를 비틀어보는 거라고 말해 왔는데 요즘의 막장 드라마는 ‘패륜’이에요.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쓴다고 하지만, 우리가 길거리 가다 머리채 잡고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순수 문학에서 출발해 상업적인 글쓰기로 영역을 옮겨 활동했지만 정하연 작가는 아직도 “작가는 글을 다루는 선비”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린 옛날에 방송극 쓴다고 하면 창피했어요. 소설이나 희곡 아니라 돈 버는 글 쓴다는 게 부끄러웠거든요. 그래서 젊었을 때 방송으로 번 돈은 더러운 돈이라고 술 잔뜩 먹고 취해서 글 쓰던 시절 김수동 이라는 연출가께서 나를 무척 혼내셨어요. 재주도 좋고 원고도 빨리 쓰는 놈이 하루 저녁 몇 백만 명씩 보는 드라마로 좋은 얘길 해 주지는 못할망정 왜 그렇게 막 쓰냐고.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내가 재주가 없더라도 최선을 다해 써야겠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그런 세월이 지나 TV 드라마가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고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면서 조금씩 성장해 부끄럽지 않은 영역까지 왔는데, 요 몇 년 사이는 작가라는 게 너무나 창피하게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한국 드라마계의 최고참 작가 중 한 사람인 정하연 작가는 과거 한국 드라마사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겼던 그의 선배들을 더욱 그리워했다.

MBC <집념>
1975년 극본 이은성, 연출 표재순

“<집념>은 90년대 <동의보감>과 <허준>의 원작이 된 작품이에요. 일일 연속극이었는데 사실 사회적 반향에 비해 시청률이 소위 ‘대박’난 작품은 아니었지만 <집념>은 제목 그대로 외골수로 파고들어 인간을 분석하고, 흥밋거리를 배제한 채 허준과 스승 유의태의 관계를 지독할 정도로 집중해서 보여주었지요. 이은성 선배는 그 전에도 <세종대왕>이나 <충의> 같은 작품들을 쓰셨지만 사실 그 모든 작품이 <집념>을 향해 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 드라마에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이은성 선배는 88년 이 작품을 소설로 쓴 <동의보감>을 집필하시다 뇌출혈로 돌아가셨는데 정말 아까운 작가였지요.”

MBC <땅>
1991년 극본 김기팔, 연출 고석만

“김기팔 선생은 <거부실록>, <제 1공화국>, <정계야화> 등 정치 드라마, 재벌 드라마, 시대극을 주로 썼던 분이에요. 이 양반은 이를테면 대붓으로 글을 툭, 툭 치는 것처럼 선이 굵은 스타일이었는데 <땅>은 그 힘 있는 글이 가장 농익었을 때 만들어진 작품이지요. ‘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땅 투기나 정경유착 같은 걸 현실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는데 정치적 외압 때문에 원래 50회짜리가 15회 만에 끝나버렸고 김기팔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요. 김기팔 선생은 방송을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분이고 드라마를 통해 한국인의 멋이나 장단점을 가장 신랄하게 표현하는 작가였는데 이은성 선배와 마찬가지로 그 전의 모든 작품들에서 쌓았던 것들을 <땅>에서 보여주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이 작품이 유작이 되었지요.”

MBC <사랑이 뭐길래>
1991년 극본 김수현. 연출 박철

“요즘처럼 ‘막장 드라마’가 판칠 때는 김수현 선배의 장점이 더 돋보입니다. 멜로는 멜로대로, 코미디는 코미디대로 장르의 장점들을 보여줬는데 <사랑과 야망>이 한국적 멜로드라마의 대명사라면 <사랑이 뭐길래>는 우리나라 방송 코미디 중 최고의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동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려내는 최장수 인기 작가로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도 품위를 지켜온 분이고, 여전히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다양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분이지요. 그래서 한 번은 “선배 드라마에 나오는 식모들은 죄다 서울대 출신이야?”라는 농담을 한 적도 있어요. (웃음) 아마 세월이 흘러 사람들에게서 김수현 드라마의 제목이 모두 잊힌다 해도 이 분이 구사했던 수많은 언어들은 영원히 남을 거예요.”

“사라져버린 역사의 일부를 복원하고 싶어요.”

과거에는 KBS <명성황후>, <왕과 비>, MBC <신돈> 등의 사극을 다수 집필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EBS <명동백작>, <지금도 마로니에는> 등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애정을 보여 온 정하연 작가는 요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결혼했던 이방자 여사의 생애를 그린 작품을 준비 중이다. “대한제국 이후 우리 왕조사가 거기서 끝나버렸고, 일제 강점기 동안의 우리 역사가 공중에 떠 있어요. 한국인들의 의식의 맥이 끊겨버린 거지요. 그래서 당시 일본 땅에 볼모로 가 있던 영친왕과, 일본 국왕의 조카이자 황태자비 후보에서 하루아침에 정략결혼의 대상이 된 이방자라는 이질적인 두 사람이 만나고 한국 왕실에 동화되며 수십 년 동안 온갖 고난을 거쳐 진정한 부부가 되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사라져버린 역사의 일부를 복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올 가을 정도 방영되면 좋겠지만 ‘막장 드라마 열풍’ 때문에 편성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는 그는 아직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사극도 한 두 작품, 현대극도 두어 작품은 더 하고 싶어요. 요새 작가들은 하나 쓰면 이삼 년씩 쉬던데 그런다고 써지는 것도 아니고, 작가는 쓰고 싶은 게 있을 때 써야지. 나는 앞으로 한 세 개쯤 하자 싶어요. 그러고 나면 내가 쓰고 싶어도 일을 안 줄 테니까 빨리 써야지. (웃음)”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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