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어떤 노트북 광고에서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아마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어디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선 인터넷을 이용해 카페, 혹은 길거리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일원으로서 집단의 전체적 이익을 위해 배분된 어떤 한정된 작업을 하는 현대 노동자를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유목민’이라 보긴 어려울 것이다. 비록 회사 건물을 벗어나있긴 하지만 그들은 결국 회사의 수익 구조가 그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 안쪽의 영토에서 배분받은 일을 하는 순종적 시민이지, 그 영토 자체를 무너뜨리고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유목민이 아니다. 이 둘은 너무나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란 족속을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마도 그들이 유목민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과거 작가들이 만든 방법과 그 방법을 설명하는 이론에 포섭되지 않았을 때 가까스로 한 명의 특별한 예술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미 경계선이 그어진 영토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지점을 향해 도망간다.

최근 사비나 미술관에서 개인전 ‘머릿속의 유목’展을 열고 있는 성동훈의 작업이 제목만큼이나 자유롭고 유목민적인지는 사실 자신하기 어렵다. 물론 유압장치와 센서를 이용해 움직이는 익터렉티브한 조각과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하는 독특한 형상은 재밌지만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을 조각으로 옮겼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오히려 그의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그 유목민이 되고 싶은 욕망 자체를 하나의 주제로 삼아 작품으로 표현했단 점이다. 거대한 두상이 열리고 그 안을 온갖 혼돈으로 채운 ‘머릿속으로’가 특히 그런데, 과거에 이미 만들어진 규칙을 가지고선 그 규칙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유목민에겐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논리적 사고 대신 혼돈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의 작품 ‘돈키호테’에서 만난 돈키호테와 소처럼 연관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같은 장소로 불러내는 그런 혼돈. 이 시대의 유목민에게 필요한 건 밖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비싼 노트북이 아니라 갇힌 장소에서도 전혀 다른 걸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두뇌, 진정한 ‘머릿속의 유목’이 아닐까.

<다크나이트>
2009년│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이 영화에서 나타난 조커는 아마 거대한 조직체인 사회 혹은 국가가 두려워하는 유목민의 모습을 테러리스트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존재다. 많은 비평에서 이미 지적한 내용이지만 조커가 배트맨과 고담에 위협적인 건 그가 단순한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는 국가적인 것과 유목민적인 것을 구분하며 전자를 체스, 후자를 바둑에 비유했는데 실제로 경찰과 검찰로 구분되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고담시 공권력이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는 체스 말이라면 조커는 어디로 놓일지 모르고 놓이는 순간 상대의 영토를 초토화하는 바둑알에 가깝다. 그래서 두렵다.

<브이 포 벤데타>
2008년│작가 앨런 무어

동명 영화의 원작인 그래픽 노블이다. 영화에서보다 훨씬 ‘미친’ 모습의 브이 역시 조커처럼 사회가 두려워하는 테러리스트의 형상이다. 다만 조커의 상대는 사회 안에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한 배트맨이었다면, 브이의 상대는 파시즘에 빠진 권력이다. 그래서 조커는 악으로, 브이는 선으로 보이지만 결국 이 둘은 같은 존재다. 독재 권력의 핵심에 있는 ‘리더’가 브이를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일반적인 테러리스트와 같은 패턴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수많은 군중이 브이의 가면을 쓰고 운집하는 모습은 진정 브이가 살았던 유목민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자 훨씬 안정적인, 혹은 안일한 결말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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