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홀 안, 무대 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학생이 들어와 앉는다. “유희진 씨!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3년 동안 연락 한번 없다가 불쑥 나타나서 내놓으라니, 이게 무슨 경우에요?” “원랜 내 남자였어요!” “이젠 내 남자예요!” 제법 심각하지만 교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들의 대화는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한 장면, 이곳은 올 8월 방송 예정인 MBC 납량특집 미니시리즈 <혼>의 여주인공 3차 오디션장이다. 요즘 보기 드물게 공개 오디션을 치룬 이 작품에는 1058명이 지원해 149명이 서류 심사에 통과했고 즉흥 연기 등의 2차 오디션을 거친 14명의 지원자가 3차 오디션에서 2인 1조로 연기와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 중이다. 94년 심은하의 과 95년 이승연의 <거미> 이후 오랜만에 부활하는 납량특집 미니 시리즈인 만큼 연출을 맡은 김상호 감독 외에도 오경훈, 이재동, 권석장 감독 등 MBC 드라마국 소속 감독들이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앞의 조가 끝나길 기다리며 나란히 벽에 기대 연습을 하고 있는 지원자들의 모습은 여고 수업시간 중 수다를 떨다 벌을 받으러 나온 단짝처럼 친해 보인다. 손을 꼭 붙잡고 로비를 오가며 대사를 중얼중얼 외우기도 하고 “나 좀 틀리게 해도 그냥 넘어가”라며 살짝 귀띔도 한다. 3차 오디션에 올라온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인상이 무섭게 생긴 사람들을 뽑은 것 같아요”라며 웃는다. 한 조가 테스트를 마치고 내려가면 심사위원들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채점을 한다. “방금 그 친구는 서클렌즈를 꼈던 건가?” “원래 눈동자가 그렇대요”라는 소소한 내용도 들려온다. 붙을 것 같냐는 물음에 “붙어야 돼요”라고 다부지게 대답하는 지원자는 다른 지원자의 모든 것이 신경 쓰이고 부럽다. “긴 머리의 소중함을 평생 처음 알았어”라는 누군가의 말에 단발머리 지원자들은 진심으로 공감한다.

대부분 연기 신인인 이들의 무대 위 모습은 두 대의 카메라를 통해 양쪽에 설치된 모니터로 생중계된다. 눈빛, 표정은 물론 얼굴의 지극히 사소한 단점마저 낱낱이 드러내는 테스트 상황은 보는 사람들마저 긴장하게 만들 정도다.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앙되어 목소리가 튀기도 하고 누군가는 기대 이상의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본 리딩이 끝나는 순간 멋쩍게 웃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 썩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한 지원자는 무대를 내려온 뒤 자기 연기에 대해 “1점도 못 주겠어요”라며 아쉬워한다. 꼬박 하루가 걸린 이 날 오디션을 거쳐 마침내 <혼>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임주은은 올해 스물두 살, 영화 <램프의 요정>과 MBC <메리대구공방전>에 출연했던 배우다. 최종 카메라 테스트에서 “볼 살을 좀 빼야겠는데”라는 심사위원들의 농담에 당장 “매일 2킬로미터씩 뛰겠습니다. 너무 짧나요? 그럼 10킬로미터씩 뛰겠습니다!”라고 당차게 대답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는 과연 어떤 느낌의 호러 퀸으로 재탄생할까. 올 여름이 기대된다.

오늘 현장의 한 마디 : “접시 없어요?”

연기 테스트 도중 몇 차례 대사를 틀리는 바람에 고전하던 한 지원자, 자기 차례가 끝나자 큰 소리로 “접시 없어요?”라고 외친다. 심사위원석에 있던 김상호 감독의 “왜요?”라는 물음에 대답하길 “물 붓고 빠져 죽으려구요!” 비록 대사는 틀렸지만 좌중으로부터 폭소를 이끌어내며 눈도장을 찍은 그가 끝까지 씩씩한 태도로 목청을 높인다. “이해해 주세요. 처음이니까!” 하긴, 아직 처음인데, 이제부터 시작인데 기죽을 필요 뭐 있나.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