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TV 시청 문화는 2000년대에 보급된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DVR) 기능을 가진 ‘티보 (TiVo)’의 영향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DVR의 보편화 이후 애플의 아이튠을 통한 에피소드 구입은 물론, NBC와 폭스가 함께 만든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 CBS의 이너튜브 등 방송사 웹사이트의 최근 에피소드 무료 시청 서비스 등이 시작됐다. 또 유튜브나 아마존 비디오 온 디맨드, 구글 비디오, 넷플릭스 왓치 인스턴틀리 등 다양한 시청 방법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지금 미국의 콘텐츠 시청 시장은 춘추전국 시대다. 티보가 보급되기 전까지, TV 시청을 하려면 30분이나 1시간짜리 시리즈를 보기 위해 시청자들은 프로그램 사이 사이에 삽입된 4-5회 가량의 광고를 지켜봐야 했다. 이 시간에 화장실에 간다거나, 함께 시청하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잡담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VCR로 방송을 녹화하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TV 앞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방송사나 광고주들은 수십년간 시청률에 따라 매겨진 가격으로 프로그램을 사고 팔아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티보 VS 아이튠

그러나 티보가 이 같은 수익성 포맷을 뒤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디. VCR로 방송을 녹화할 경우 VHS 테입은 물론 예약녹화 설정, TV 채널 고정 등 귀찮은 일이 많다. 그러나 티보는 디지털로 방송 스케줄을 검색한 후 원하는 시리즈의 시즌 전체를 VHS 테입 없이 티보 박스 내에 저장시킬 수 있고, 재생시 앞 또는 뒤로 빨리 돌리는 기능이 있어 더 이상 중간에 낀 광고를 보지 않아도 된다. 티보의 DVR 기능은 새로운 에피소드만을 녹화할 수도 있고, 오리지널 방영채널이 아닌 다른 채널에서 재방송되는 것도 골라서 녹화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채널을 시청할 수도 있고, 다른 채널에서 하는 시리즈를 녹화할 수도 있다. 모델에 따라 약간의 용량 차이가 있지만, 30시간 이상 분량의 시리즈를 저장할 수 있고, 일부는 인터넷을 통해 다른 곳에서도 예약 녹화를 할 수 있다. 티보가 나온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같은 DVR 기능은 일반 케이블이나 위성채널 회사에까지 보급돼 더 이상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 TV 앞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방송사는 광고 수익감소를 충당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중 하나가 2003년 부터 보급된 애플의 아이튠 서비스다. 아이튠을 통해 노래를 판매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TV 시리즈와 영화 등 동영상을 판매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애플이 노래 99센트, 동영상 1달러99센트로 정액 판매제를 실시하는데 큰 반감을 가졌다. 시리즈의 인기도에 따라 가격을 방송사 측에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 같은 의견이 수용되지 않자, 90년대 이후 계속 시청률 하락을 모면하지 못하고 있는 NBC의 경우 새로운 프로그램의 아이튠 판매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결국 타협점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HD 콘텐츠였다. 고화질 에피소드의 경우 2달러99센트로 가격을 인상하는 것에 양측 모우 합의한 것. <뉴욕타임스>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현재 아이튠은 3,000개의 TV 시리즈 (4만여개 에피소드)를 판매하고 있다.

티보보다 강력한 인터넷 다시 보기

방송사들의 경우 젊은층을 타깃으로 한 아이튠 판매를 반겼지만, 동시에 “TV 시리즈는 무료로 시청해야 한다”는 오래된 시청자들은 물론, 고액의 광고비를 지불하는 광고주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은 처음에 DVR을 이용해 광고를 건너뛰는 시청자를 타깃으로 방송 중 화면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광고문구나 이미지를 삽입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 평론가와 시청자들의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방송사별로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광고가 포함된 무료 에피소드 방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같은 경우 시청자들은 광고를 건너뛰거나, 빨리 돌릴 수 없다. 여기서 더 발전된 웹사이트는 NBC 유니버셜과 폭스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합작해 런치한 훌루다. 지난 2008년 3월 시작된 이 사이트에서는 NBC와 폭스의 시리즈는 물론 코미디 센트럴과 PBS, USA 네트웍, 브라보, FX, Sci Fi, 선댄스, 옥시전 등 케이블 채널의 프로그램까지 시청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훌루 서비스는 imdb.com은 물론 AOL, MSN, 마이 스페이스, 야후, 컴캐스트의 팬캐스트닷컴 등의 인기 웹사이트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 알렉 볼드윈 등 인기 배우나 시리즈 작가들이 출연한 “훌루가 뭐냐고? 지구 정복을 위한 우리(외계인)의 책략”이라는 위트있는 광고로 눈길을 끌고 있다. 메이저 네트워크 중 ABC와 CBS의 경우 아직 다른 방송사와 합작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CBS는 이너튜브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환상특급>, <멜로즈 플레이스>, <맥가이버>, <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 등 직접 방영은 하지 않았지만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클래식 TV 시리즈를 무료로 상영하고 있다.

한편 영화 또는 TV 시리즈 대여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넷플릭스와 블록버스터의 경우, 회원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영화나 TV 시리즈를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두 회사는 티보와 같은 방식의 박스를 구입할 경우 원하는 파일을 다운로드 받은 후 TV에서도 시청할 수 있는 기계 보급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미디어 업계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불법 다운로드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방송사들은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시청률 감소로 위축됐고, 이 때문에 제작비가 적게 드는 프로그램 발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급박하게 변화고 있는 시장에서는 앞으로 영화에 버금가는 규모에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는 수준급 TV 시리즈를 만나는 것이 더욱 어려워 질 듯 하다.

글. 양지현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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