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영화는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류승완 감독의 전설적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1부 격인 <패싸움>은 단돈 380만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고, 부산단편영화제 우수작품상, 인디포럼 영화제 차기작 지원 감독으로 뽑힌 이후에야 3부 <현대인>의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현대인>이 한국독립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받으면서 이 연작은 비로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사이를 채워 넣고 마무리를 지어 총 4부작으로 완성된 장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16mm로 장기 흥행한 뒤 35mm 프린트로 확대개봉 되는 드라마틱한 전개를 맞이했다. 그렇게 류승완은 어느 날 갑자기 “꽃 같은 세상을 날려 버릴” 무시 못할 훅을 뻗으며 충무로로 돌진해온 20세기 마지막 ‘시네마 키드’였다.

어느 영화인들에게 그렇지 않았겠냐만은, 류승완에게 영화는 죽거나 나쁘지 않을 수 가장 절실한 친구였고, 영화 만들기는 그 친구를 향한 가장 신나고 정성 어린 보은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영화는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신구, 백일섭, 백찬기, 김영인 같은 왕년의 액션스타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 감격스런 상봉의 장으로 둔갑하기도 했고,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나 <짝패>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처럼 어릴 적 숭배했던 홍콩무협이나 액션영화를 자신의 눈과 몸으로 풀어내는 가장 적극적인 재해석의 판이기도 했다.

“이 테마는 어쩌면 요즘 제 머리 속을 맴도는 화두예요. 관객들은 결국 완성된 프린트만 보고 즐기지만, 과연 영화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아무 것도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류승완 감독이 스스로의 재능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제작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꺼내보게 된다는 이 5편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제 아무리 콧대 높은 유럽 예술 영화도, 할리우드 상업영화도, 심지어 포르노 영화마저도 저마다 지리멸렬한 과정을 통해야만 완성되는 투쟁의 산물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악인을 처단하는 지옥행 급행열차는 있겠지만, 영화를 완성하는 극장행 급행열차는 어제도 오늘도 아마도 내일도 운행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늘 정확한 잽 한 번, 분명한 한 자국의 발걸음을 통해 비로소 허락되는 세상이므로.

1. <사랑의 묵시록> (La Nuit Americaine)
1973년 │ 프랑소와 트뤼포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찍을 때였어요. 촬영은 도통 끝날 줄을 모르고, 여기저기 다치는 사람들이 나오고, 몸은 힘들고 정말 지독한 하루 하루였거든요. 그러던 중 TV에서 때 마침 <사랑의 묵시록>이 방영 중인 거예요. 이 영화에서 감독으로 직접 출연하는 프랑소와 트뤼포가 이런 말을 해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역마차 여행과 같아서 모두 들뜬 기분으로 출발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모두들 이 여행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라고. 그 순간, 제 심리상태가 딱 그랬는데 아, 거장들도 저런 고민을 하는 구나, 참 많은 위안을 얻었어요. (웃음) 그 다음날 촬영장으로 새로운 전의를 불태우며 나왔던 기억이 나요.”

<파멜라를 소개합니다>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감독 페랑(프랑소와 트뤼포)에겐 제작자도, 배우도, 스태프도,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보다 더 괴로운 건 스스로에 대한 불안이다. 영화라는 그럴싸한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오븐 속은 그렇게 뜨거운 전쟁터다. <400번의 구타>의 소년에서 <훔친 키스>의 청년으로, 트뤼포의 페르소나로 성장한 배우 장 피에르 레오가 우유부단한 배우 알퐁스로 등장한다. <사랑의 묵시록>이라는 다소 거창한 비디오 출시명과는 달리 <아메리카의 밤>이라는 타이틀로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2. <망각의 삶> (Living In Oblivion)
1995년 │ 톰 디칠로

“정말 유쾌한 현장을 다룬 영화예요. 연애하던 시절 지금 부인과 코아아트홀에서 단 둘이 보면서 무지무지 웃었던 기억이 나요. 당시는 감독 데뷔 전이고 조수 생활하는 틈틈이 단편 찍으면서 말 그대로 ‘찌질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는데, 그러면서도 ‘나 영화 하는 사람이야’ 하는 자부심이 있었죠. (웃음) 이 영화의 현장도 그야말로 난장판 같지만 결국 영화 만들기에 대한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일단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영화현장에 대해 이만큼 잘 표현한 영화는 본 적이 없어요. 치매 걸린 감독의 어머니가 놀라운 비법으로 단박에 촬영장을 정리하는 장면을 비롯해서, 영화 속 배우가 감독과 싸우면서 ”내가 당신이 천재라서 이 따위 영화에 출연하는 줄 알아? 당신이 타란티노 친구라고 해서 출연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은 어휴- (웃음).”

저 예산 독립 영화 감독 닉(스티브 부세미)에게 낮은 품질을 자랑하는 것은 ‘예산’만이 아니다. 제자리 못 찾는 스태프들과 골치덩이 배우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훼방이라도 놓는 듯 연속으로 발생하는 각종 사고들, 그리고 감독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까지. 그의 영화 만들기는 수도의 길보다 더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꿈과 현실, 망각과 자각을 오가는 거친 듯 경쾌한 영화의 리듬은 <천국보다 낯선>의 촬영감독이자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 톰 디칠로의 공이다. 또한 감독이 직접 경험한 저 예산 영화현장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은 영화 속에서 부활해 생동감 있는 숨을 내쉰다.

3. <에드 우드> (Ed Wood)
1994년 │ 팀 버튼

“유쾌하면서도 슬픈,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멋진 영화잖아요. 지금도 힘들 때마다 에드 우드가 제작자들에게 핍박 받아 풀이 죽은 상태에서 오손 웰스를 만나는 그 장면만 반복해서 봐요. 문학이나 다른 예술에 비해 영화란 게 비교적 친절한 매체다 보니까 요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한편 다운로드 받아서 쓱 보고 너무 쉽게 3류다, 1류다 선언해 버리는 거죠. 에드 우드가 만든 영화는 물론 조잡하고 기괴했지만 그가 영화를 만드는 태도까지 거장들의 노력에 비해 치열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드라큐라>의 벨라 루고시를 비롯해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연대 안에 담긴 어떤 숭고함이 느껴지는 영화예요.”

전설적인 ‘졸작’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의 감독 에드워드 D 우드 주니어. 괴상한 B급 감독으로 치부되었던 그를 팀 버튼은 ‘트리플 A급’ 열정으로 살았던 꿈의 사나이로 재해석한다. 좌절한 에드 우드 (조니 뎁) 앞에 홀연히 나타난 <시민 케인>의 오손 웰스가 “소신이 있다면 싸울 가치가 있는 거요, 왜 남의 꿈을 만드는데 인생을 낭비합니까”라고 격려하는 장면에서 에드 우드의 표정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려 받는 병사만큼이나 경외와 희열로 가득 차 있다.

4. <겟 쇼티> (Get Shorty)
1995년 │ 베리 소넨필드

“영화를 꿈꾸는 많은 이들이 희망을 품고 당도하는 할리우드. 그러나 그 곳은 사실 꿈과 희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로 구성되어 있죠. 변방의 갱이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현실부터, 공포영화에서 비명 지르는 역할로만 소모되어가는 어떤 2류 여배우의 슬픔까지. 이 모든 상황들이 코미디를 가미해 비장하지 않게 처리되는데 신기하게도 그 비애가 고스란히 느껴져요. 특히 제임스 겐돌피니와 존 트라볼타가 두런두런 자기 속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데, 한 명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진한 스턴트맨으로, 또 한 사람은 갱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은근한 영화광으로 서로 묘하게 소통하는 순간이었어요. 어쩌면 영화란 것이 저런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갱단 일원인 칠리 파머 (존 트라볼타). 보스의 명령을 수행해 나가는 가운데 영화제작에의 꿈을 꾸게 되는 칠리에게 할리우드에서 영화 만들기란 갱들의 사건 해결 방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재키 브라운> <조지 클루니의 표적>같은 범죄소설로 유명한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을 원전으로 한 이 영화에 이어 10년 뒤 후일담에 가까운 속편 <쿨!>이 제작되기도 했다.

5.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1997년 │ 폴 토마스 앤더슨

“엄밀하게 말하면 영화라고 하기에도 뭐한 포르노 산업 현장에 관한 이야기예요. 일반적 시선에서는 손가락질하거나 무시하면서 보게 되지만 파고 들어가보면 그들의 삶까지도 그렇게 무시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요. 이 영화의 많은 사람들이 한 때 자신이 가졌던 꿈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을 살고 있잖아요. 주인공 에디(마크 월버그) 역시 청춘 스타들 사진으로 벽면을 도배 해놓았을 때만해도 포르노 스타를 꿈꾸었던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결국 그 산업 안으로 들어와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특히 저는 한때 정점을 치고 내리막길로 내려오거나,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 형성하는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관심이 많거든요.”

70년대 말 포르노 산업의 레이더에 ‘33센티미터의 거대한 그것’을 자랑하는 한 소년이 포착된다. 이 ‘놀라운 물건’의 가치를 알아 본 포르노 업계의 대부 잭의 끈질긴 설득 끝에 평범한 10년 소년이었던 에디 아담스는 ‘덕 디글러’라는 이름을 얻고 포르노 스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도래하는 80년대, 이 ‘비디오시대’가 죽인 건 ‘라디오 스타’만이 아니었다. 퇴락하는 포르노영화 산업의 끝자락을 회고하는 가장 선명하고 감각적인 후일담.

“거두절미하고 그냥 부숴버리는 영화”

지난 해 개봉해 ‘쾌남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다찌마와 리> 이후 준비해온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내가 집행한다>는 현재 각본을 최종 수정하고 있는 단계다. 감옥에 수감 된 사이 유일한 혈육이었던 여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혀 들은 남자가 출소 후 여동생의 죽음을 추적하게 되고, 결국 여동생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었음을 알고 진짜 범인에 대한 단죄를 스스로 ‘집행’해 가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마도 제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의 인물들 중에 가장 과묵한 사람일 거예요(웃음)” 배우 리 마빈으로 대표되는 70년대 액션영화들처럼 “거두절미하고 그냥 부숴버리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나는 집행한다>의 프로젝트를 들고 류승완 감독은 현재 홍콩으로 날아간 상태다. 혹 이 남자의 그 처절한 시작점이 궁금한 관객들은 오는 4월 30일 시작되는 전주영화제로 달려가시길. 개봉 당시 극장에서 놓쳤다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재 상영이 따뜻한 남도의 봄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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