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게도 제가 초반엔 변지원(도지원) 씨를 좀 싫어했습니다. 지저분하지, 게으르지, 살살 양다리까지 걸치지, 직장에서는 얌통머리 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니 도대체 정을 붙일 수가 있어야죠. 아주 제가 질색하는 건 두루 다 갖췄습디다. 게다가 은근히 영애(김현숙)를 무시하는 지라 가지가지 한다 싶었죠. 솔직히 지원 씨가 날씬하다는 거 빼놓으면 영애보다 딱히 나은 게 뭐 있나요. 잘난 구석이라곤 없으면서 틈만 보이면 한심하다는 듯 깐죽대니 영애를 예뻐하는 제 속이 끓어오를 밖에요. 그런데 세월이란 게 뭔지, 그간 밉상, 밉상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그만 정이 들었나 봅니다. 어째 요즘은 영애보다 지원 씨에게 자꾸 마음이 가니 이게 웬 조화일까요.

알고 보면 막돼먹은 영애보다 불쌍한 지원 씨

사실 딱하기로 치면 영애보다 지원 씨가 몇 배는 더 딱하지요. 영애에게는 때론 심하게 닦달을 해도 여차하면 따뜻하게 품어줄 엄마와 자상한 아빠가 계시는데다가 늘 티격태격하지만 결정적일 땐 편이 되어 줄 동생들이 있잖아요. 대출 이자 내느라 지지리 궁상 쪼들리긴 해도 제 집이라도 한 칸 있고요. 하지만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인 지원 씨에겐 뭐가 있습니까. 솔직히 영애야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정직원이 아닐 바에야 사표를 쓰겠다며 버럭질도 할 수 있는 거지, 지원씨 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이사님 책상에 꽃이라도 사다 놓고, 영애와 5만 원만 하기로 했던 부조를 10만 원씩 하는 뒤통수를 쳐서라도 아부를 떨어야지 어쩌겠어요. 영애는 “인간이 어쩜 저럴 수가!” 하고 기막혀하는 눈치지만 비빌 언덕 없는 지원 씨로서야 살려는 몸부림이지요 뭐.

그럭저럭 섹시한 외모 덕에 이 남자 저 남자가 집적대지만 그게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은 관심이라는 거, 지원 씨 스스로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덜컥 겁이 날 적마다 술로 마음을 달래는 거죠? 해결할 엄두도 안 나고 방법도 모르고, 마치 끝없이 어지르기만 해서 이젠 돼지우리가 된 자취방처럼 지원 씨의 앞날은 그저 갑갑하기만 합니다. 금잔디는 뭔 일만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줄 지후선배가 있건만 지원 씨에겐 잠시 어깨를 기댈 곳조차 없으니 과연 판타지와 현실은 다른 모양이에요. 그래도, 아무리 쓸쓸하고 힘에 겨워도 부디 윤과장(윤서현)에게 기댈 생각은 하지 말아요. 윤과장 처 은실이가 짐 챙겨들고 떠날 때의 살벌한 분위기로 봐서 절대 돌아올 리는 없기에 마음 약한 그대들이 외로움을 빌미로 다시 엮일까봐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우선 집 청소부터 하자구요!

물론 서로 동병상련의 아픔을 위로할 수는 있겠지만 못 볼 꼴을 봐도 너무 많이 본 사이라 다시 시작했다가는 동티나기 십상일 게 분명해서요. 더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남자의 바람은 습관이라잖아요. 윤과장이 뻔뻔스럽게도 은실이와 지원 씨를 저울질했다는 걸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러고 보면 제가 지원 씨에게 처음 마음을 준 날이 바로 그날이네요. 동거하던 윤과장이 바람피운 걸 알게 된 날 영애와 술 마시며 한탄을 하다가 방구석에서 먼지투성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발견하고 해맑게 웃는 지원 씨에게서 희망을 보았거든요. 사람들은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 ‘돌아이’라서 다르다고 비웃었을지 몰라도 ‘긍정의 힘’을 믿는 제게는 지원 씨가 사랑스러웠습니다.

지난번에 인생에 도움이 안 될 사이니 이제 따로 만나지 말자고 윤과장에게 못 박는 걸 보고 다소 안심이 되긴 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가슴 아픈 날의 기억을 잊지 말기로 저하고 약속을 합시다. 그리고 우선 큰 맘 먹고 대행업체라도 불러 청소부터 좀 하자고요. 청소하는 김에 윤과장에 대한 연민도 말끔히 쓸어내고요. 일단 집이 깔끔하게 정리정돈 잘 되어있으면 뭐든 잘 해보고픈 마음이 샘솟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다음 자기계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짜보고 좋은 짝도 열심히 찾아보자고요. 잘난 남자 만나 행복해진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혼테크’랍시고 돈 많은 늙수그레한 남자 하나 잡아 안주하란 얘기는 더더욱 아니고요. 착하고 긍정적인 지원 씨의 진가를 알아볼, 그래서 자아성취를 곁에서 지켜봐줄 품 넓은, 존경할만한 남자를 찾아보자는 얘기예요. 사람들은 영애가 장과장(이해영)과 이어지길 응원하기도 하고, 원준(최원준)이와 다시 만나길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애를 향한 바람은 접어두고 오직 지원 씨가 좋은 사람을 만나기만을 기원하려고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 한 번 믿어 보자고요.

글. 정석희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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