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소녀는 손에 돈을 얌전하게 말아 쥐고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상황일까. 저 사진 뒤에는 과연 어떤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을까? 이 강렬한 이미지의 잔영은 영화가 끝나도 도통 잊혀지지 않았다. 컬러사진의 시대가 낳은 기린아였던
윌리엄 이글스턴. 내가 이 사진작가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뉴욕의 필름포럼에서 그야말로 절찬리에 상영되었던 영화
때문이었다. 현대사진작가 윌리엄 이글스톤의 카메라 뒤 실생활을 ‘소름 돋게 리얼’하게 포착한 이 다큐멘터리에는 꽤나 흥미로운 인터뷰가 나온다. 모든 인물 다큐멘터리가 범하는 실수처럼 이 영화 역시 이글스턴에게서 사진에 대한 뭔가 그럴싸한 한 마디를 듣기 위한 욕심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가령 감독이 “사진이란 사라져가는 모든 것을 영속 시키려는 작업이 아닐까요…” 같은 장황한 질문을 던져 그의 직업적 철학을 이끌어 내려는 식이다. 그러나 정작 이 위대한 사진작가는 “뭐.. 음.. 그런 거 생각해 본적 없는데…” 식으로 말 할 뿐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만한 회피가 아니라 정말 그런 식으로 사진을 받아 들여본 적이 없는 사람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이어가자 그는 결국 대답한다. “사진이든, 예술이라고 부르는 뭐든, 그냥 그걸 사랑하면 되는 거야.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누군가의 창작물에 대해, 말하거나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순간 멍해지는 대답이었다. 예술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글과 말이 범람하는 시대, 결국 예술가들은 수다쟁이 광대의 길을 선택하거나 입을 다문다.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그간 써왔던 많은 글들이 생각났다. 말과 글은 예술을 담아내는 가장 절박한 그릇이지만 한 번도 그것을 온전히 담아 낸 적이 없다. 우리는 때로 언어로 예술을 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늘 무모한 시도에서 그친다. 또 말이 길었다. 늘 이런 식이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