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가있는 아들아이가 이어폰을 하나 보내달라는 연락을 했다. 군대에서도 가끔 컴퓨터를 쓸 수 있는데 음악을 들으려면 줄이 긴 이어폰이 필요하다나. 평소에 뭐 좀 보내줄까 물어보면 번번이 ‘됐어’ 하고 딱 자르는 녀석인지라 웬일인가 싶어 얼른 사서 부쳐줬다. 그리고 저녁 즈음 무심히 녀석의 미니홈피를 열었다가 그야말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소녀시대의 ‘Gee’가 배경음악이라니! 20대 남자가, 그것도 군인이 걸 그룹을 좋아하는 게 무에 그리 놀랄 일이겠느냐만 아들 녀석은 소녀시대가 ‘다시 만난 세계’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때도, 사탕을 하나씩 쥐고 ‘kissing you baby~’를 외칠 때에도 마치 불가에 귀의한 양 무심하던 녀석이었다. 심지어는 남자아이가 대세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저 티파니라는 애 웃는 거 너무 귀엽지 않니?” 하며 관심을 끌어보려 해도 한심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던 녀석이다. 웬 고등학생이 눈길도 안 준채 소녀시대 사이를 유유히 뚫고 지나가는 것과 똑같은 심성의 녀석이랄까.

“으응. 요즘 이상하게 소녀시대가 좋네?”

며칠 후, 휴가일정 통보 차 전화를 걸어왔기에 진위를 캐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으응. 요즘 이상하게 소녀시대가 좋네?”라고 순순히 인정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만 일단 커밍아웃을 해서인지 얘는 이래서 예쁘고, 쟤는 저래서 귀엽고, 누구는 노래를 잘 하고, 어쩌고저쩌고……. 마치 봇물 터진 듯 소녀시대 사랑이 끊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보니 통화시간이 무려 40분이 넘었다. 워낙 입대 전엔 달랑 단답형 통화만 하던 녀석인지라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살짝 배신감도 들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나만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친구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 중년 남자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제시카 짱!’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고, KBS <미녀들의 수다>에서는 여러 출연자들이 한국 남자들의 꼴불견 중 하나로 술자리에서 ‘소시 짱!’을 외치는 장면을 꼽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삼사십대 남성이 풋풋한 어린 여성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은 잘못하면 변태로 찍힐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걸 그룹에 대한 애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남자는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S.E.S나 핑클이 인기를 끌었지만 원더걸스의 ‘텔미’나 ‘노바디’처럼 남자들이 춤까지 따라 추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걸 그룹 과열 현상은 어쩌면 유희열이나 신해철 같은 가수들이 라디오에서 내놓고 걸 그룹을 칭송한다든지, 유재석 같은 개그맨들이 오락프로그램에서 “예예 예예~”하며 카라의 ‘프리티 걸’ 춤을 추며 관심을 표출하는 통에 보통 사람들의 ‘고백’도 훨씬 수월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소시, 남편은 연아신

하지만 그보다는 하도 돌아가는 현실이 고단하다 보니 ‘다들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해서’라는 게 더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남편의 국민요정 김연아에 대한 사랑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게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이미 보고 또 봐서 외우고도 남았을 법한 김연아의 경기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남편이 때론 안쓰럽다. 아이들이 다 밖으로 나도는 터라 정 줄 곳이 김연아 뿐인 것 같아서. 슬며시 소녀시대 음반이라도 사줘 볼까 싶다. 그나저나 글 쓰는 도중에 아들아이에게서 휴가 일정이 바뀌었다고 전화가 왔다. 마침 이 글이 공개되는 날 집에 온다니 이를 어째. 어쩐지 후환이 두렵구먼.

정석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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