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록 감독은 요즘 고민이 많다. 그동안 <째즈>, <해피 투게더>, <피아노>, <90일, 사랑할 시간> 등 수많은 드라마를 히트시키거나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였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변화는 새로운 숙제를 안겼다. “연출하는 사람은 자기 색깔을 내고 싶어서, 남이 보기엔 이렇게 찍으나 저렇게 찍으나 비슷한 걸 밤새 촬영하고 죽도록 편집하는 건데 지금은 시청률에 모든 게 종속된 상황이다. 시청률이 나올 것 같은 소재만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없는 제작비와 시간으로 뭐라도 만들려다 보니 ‘막장 드라마’가 나오는 악순환이다. <째즈>같은 건 95년 당시에도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만든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면 아예 만들 수가 없을 거다.”
日 <고교교사>(高校敎師) TBS
1993년
“노지마 신지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성자의 행진>이나같은 예전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고교교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친아버지와 성적인 관계가 있는 여고생과 약혼녀가 있는 남자 교사가 만나고 사랑에 빠져 결국 동반자살 하는 걸로 끝나는,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선정적인 이야기인데 그걸 굉장히 아름답게 풀어냈다. 왜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보다 보면 이해하게 된다. 이를테면 4구 당구에서 코너에 공이 붙어 있어 도저히 칠 수 없을 때 ‘마세이(찍어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작해 공들을 하나씩 쳐 나가는 게 이 작가의 스타일인데, <고교교사>는 극단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드라마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SBS <발리에서 생긴 일>
2004년 연출 최문석, 극본 이선미 김기호
“사랑 이야기 같지만 그 바닥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다이렉트로 싸우는 이야기가 깔려 있다. 80년대적 이데올로기와 90년대적 현상이 섞여 있는 독특한 느낌이었다. 특히 극 중에서 수정(하지원)에게 인욱(소지섭)이 헤게모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며 그람시의 책을 건네주는데 수정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받아들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이선미-김기호 작가는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드라마들을 많이 썼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는 우울함과 어두움이 숨겨진 코드가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비대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중적으로 히트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MBC <달콤한 스파이>에서 보여줬던 스펙터클한 전개도 놀라워서 언젠가 꼭 함께 일해보고 싶다.”
美 <로마>(Rome) HBO
2007년
“나는 사극이나 시대극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현재의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 드라마를 만들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게 시대극이 되고, 먼 미래에는 사극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로마>를 볼 때는 밤을 새웠다. 고대 로마의 거대하고 복잡한 역사 한가운데서 두 명의 소시민이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시대의 흐름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엮기만 했다면 재미없었겠지만 창작을 통해 나온 주인공들이 줄리어스 시저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역사 속 인물들과 부대끼며 그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강가에 부서진 나무토막 같은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오종록 감독은 요즘 올 여름 방영 예정인 드라마 <스타일>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덧 50대에 접어든 그와 유행의 첨단을 걷는 패션지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어쩐지 언밸런스해 보이지만 “최근새 시즌을 보니까 황금빛으로 빛나는 듯 한 영상의 색감이 죽이더라. 우리도 90년대에 비해 촬영과 조명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풍부하고 컬러풀한 색감을 살리고 싶다”는 그는 늘 그래왔듯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민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드라마는 사실 ‘스타일’ 너머에 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5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빨리 변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주류가 흘러갈 때 거기서 도태된 사람들, 강가에 부서지고 찢긴 채 남은 나무토막 같은 인간 군상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상업 드라마로는 힘들더라도 언젠가 그런 작품을 꼭 만들고 싶다.” 도시에 올라온 뒤로 도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만 해왔어도 자신은 여전히 ‘밀양 촌놈’이라는 오종록 감독의 뚝심을 믿고 싶어지는 것은 그도 역시 지금 우리와 함께 막장 드라마의 시대를 온 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동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그래서 “방송사나 제작자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 쪽에게는 중요하지만 정작 소비자인 시청자에게는 시청률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드라마를 만드는 이들이 지금 처한 가장 큰 딜레마이기도 하다. “깡패가 깡패 짓을 계속 하고 사는 건 드라마가 되지 않는다. 깡패가 깡패 짓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드라마가 되는 거다”라는 오종록 감독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결국 딜레마에 빠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하는 그가 고른 세 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日 <고교교사>(高校敎師) TBS
1993년
“노지마 신지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성자의 행진>이나
SBS <발리에서 생긴 일>
2004년 연출 최문석, 극본 이선미 김기호
“사랑 이야기 같지만 그 바닥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다이렉트로 싸우는 이야기가 깔려 있다. 80년대적 이데올로기와 90년대적 현상이 섞여 있는 독특한 느낌이었다. 특히 극 중에서 수정(하지원)에게 인욱(소지섭)이 헤게모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며 그람시의 책을 건네주는데 수정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받아들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이선미-김기호 작가는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드라마들을 많이 썼지만 자세히 보면 그 안에는 우울함과 어두움이 숨겨진 코드가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비대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중적으로 히트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MBC <달콤한 스파이>에서 보여줬던 스펙터클한 전개도 놀라워서 언젠가 꼭 함께 일해보고 싶다.”
美 <로마>(Rome) HBO
2007년
“나는 사극이나 시대극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현재의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 드라마를 만들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게 시대극이 되고, 먼 미래에는 사극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로마>를 볼 때는 밤을 새웠다. 고대 로마의 거대하고 복잡한 역사 한가운데서 두 명의 소시민이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시대의 흐름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를 편년체 식으로 엮기만 했다면 재미없었겠지만 창작을 통해 나온 주인공들이 줄리어스 시저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역사 속 인물들과 부대끼며 그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강가에 부서진 나무토막 같은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오종록 감독은 요즘 올 여름 방영 예정인 드라마 <스타일>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덧 50대에 접어든 그와 유행의 첨단을 걷는 패션지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어쩐지 언밸런스해 보이지만 “최근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드라마는 사실 ‘스타일’ 너머에 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5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빨리 변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주류가 흘러갈 때 거기서 도태된 사람들, 강가에 부서지고 찢긴 채 남은 나무토막 같은 인간 군상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상업 드라마로는 힘들더라도 언젠가 그런 작품을 꼭 만들고 싶다.” 도시에 올라온 뒤로 도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만 해왔어도 자신은 여전히 ‘밀양 촌놈’이라는 오종록 감독의 뚝심을 믿고 싶어지는 것은 그도 역시 지금 우리와 함께 막장 드라마의 시대를 온 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동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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