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 감독은 아주 짧은 시간, 간단한 말로도 응축된 감정과 생각을 풀어내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그것은 물론 재능이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그가 쏟아내는 진심의 농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내가 이중성격이 아닐까 고민했어요.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고 돌아설 때 이게 정말 맞는 걸까, 나를 위해 꾸며낸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믿지 못한 적이 많았어요”라는 고백은 흥미롭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향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억이란 개개인의 애정의 선후에 따라 꾸며지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차차 받아들이게 된 그는 성인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드라마 <케빈은 열두 살>을 통해 위로를 얻었다. 그리고 기억의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 이윤정 감독이 지니게 된 섬세한 촉수는 MBC <태릉선수촌>과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성장과 청춘, 사랑이라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순간의 감정들을 선명하게 짚어내며 시청자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라는 불안함을 갖고 살지만 결국 인간은 나의 직관과 내가 좋아하는 취향을 벗어난 채 무엇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거, 그걸 믿어요.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건 그걸 아는 것 같아요” 여전히 누구보다 젊고 용감한, 그래서 세상 누구보다 우리의 청춘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이윤정 감독으로부터 청춘을 기억하게 하는 드라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美 ABC <케빈은 열두 살>(The Wonder Years)
1988

“중학교 때 봤던 드라마에요.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은 케빈의 여자 친구인 위니가 나올 때마다 기절하게 좋아했고, 저는 그냥 재미있게 봤죠. 나중에 드라마 PD가 되고 나서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이 작품을 다시 만났어요. 화질이 흐린 동영상으로 25분짜리 125편을 다시 다 보는데 매번 웃다가 결국은 울었어요. 어릴 때보다 커서 봤을 때 더 좋더라구요.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만들어진 시리즈니까 케빈, 위니, 폴을 연기했던 어린 배우들은 <케빈은 열두 살>과 함께 사춘기를 겪고 성장했을 텐데 나중에 찾아보니 다 좋은 학교에 가고 자기가 원하는 길을 잘 찾은 것 같아서 참 기뻤어요”

MBC <사춘기>
1993, 극본 박정화, 연출 장용우

“대학교 2학년 때, 신문방송학과 동기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갔어요. 저녁 무렵 나가서 섬 구경 좀 하려는데 남자애들이 전부 ‘30분만 있다가 나가면 안 돼?’라고 조르는 거예요. 왜 그러나 했더니 <사춘기> 봐야 된다고. 하하. ‘얘네도 이런 애들이구나’ 싶어서 참 기뻤어요. 몇 년 지나 MBC 입사 후에 황인뢰 선배가 이 작품을 기획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혹시나 해서 ‘<케빈은 열두 살>’을 아시냐고 물었더니 역시 좋아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떤 모사나 모방이 아니라 그 아련하면서도 독특한 정서를 <사춘기>가 이어온 것 같은 느낌이 좋았어요. 그리고 저는 <케빈은 열두 살>의 전체 프로듀서였던 밥 브러쉬가 황인뢰 선배와 닮은 사람일 거라고 추측해요. 하하”

MBC <연애의 기초>
1995, 연출 황인뢰, 극본 황선영

“<연애의 기초>는 네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이야기를 4부씩 가지고 가는 옴니버스 미니 시리즈였어요. 김희애 씨가 드라마 작가, 김창완 선생님이 연출가, 그 두 사람이 만드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톱스타인 김혜수 씨가 나오고 김혜수 씨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평범한 남자로 김승우 씨가 있었죠. 드라마를 보며 각각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방송국에 들어와서는 이 세계를 다룬 점에 대해 많이 공감했고, 오래 된 작품이지만 이후 비슷한 소재로 만들어진 드라마들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뭐, 제가 어디 가겠어요?”

2007년 여름을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반짝이게 만들었던 이윤정 감독은 올해 6월 중순 MBC 미니 시리즈 <트리플>로 돌아올 예정이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세 명의 남자들과 그들의 고등학교 동창인 한 여자, 피겨 스케이팅 코치와 선수인 두 여자가 만나 각기 다른 세 커플의 이야기를 보여 줄 이 작품의 모토는 스티비 원더의 노래 ‘All in love is fair’에서 따온 “세상의 모든 사랑은 공정하다” 란다. 그렇다면 <태릉선수촌>과 <커피프린스 1호점>에 이어 <트리플>에서도 여전히 청춘의 이야기를 그리게 될 것 같냐는 물음에 이윤정 감독은 특유의 소녀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 제가 어디 가겠어요?”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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