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1987’ 포스터/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1987’ 포스터/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1987’은 1987년 대한민국에 일어난 혁명적 순간과 그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과 인물들을 관통하고 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극은 시작된다. 독재 시대의 폭력을 해제하기 위한 여러 층위의 움직임들은 단편적으로는 무력하지만 도미노 역할을 해서 마침내 큰 물결을 만들어 낸다. 그해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 시위에서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것을 기점으로 6월 민주항쟁의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난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군부독재를 대변하는 인물로 배우 김윤석이 건재한 악역의 아우라를 보여준다. 하정우, 유해진, 강동원, 김태리 등은 서로 다른 톤으로 이 아우라의 성벽에 균열을 낸다.

‘1987’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고, 또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현실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다. 당시의 사건과 현장을 경험한 개인들에게 영화는 주관적 경험을 상기시킨다.

이 경험의 기억은 영화의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지 않고 영화를 보는 현실로 뚫고 나온다. 팩트와 픽션이 섞여들어 리듬을 만들어 내지만 이 영화의 극적 요소들이 현실의 극적 긴장감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영화는 누구와 봤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 1980년대에 태어난 필자에겐 독재 시대의 폭력에 대한 직접 경험이 없다. 88서울올림픽의 기억조차도 어슴푸레하게 10인치 정도의 흑백 브라운관 안에 갇혀 있다.

반면 당시의 6월, 최루탄과 시위대 속에서 두 명의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응급실로 향하던 1960년생 미자 씨의 기억은 어떨까? 이 무례한 폭력의 흐름에 아기들이 휩쓸릴까 움켜잡던 강렬한 공포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또 1990년대 생에게는 어쩌면 생애 최초의 승리, 광화문 광장의 촛불 시위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의 현대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어쨌든 한 세대를 지나 암실에서 그들은 다시 만난다.

/사진=영화 ‘1987’ 스틸컷
/사진=영화 ‘1987’ 스틸컷
영화의 예고편이나 주연 배우들의 예능 홍보보다 재밌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당시 부산에서 집회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은 그 사이 대통령이 되었다.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는 청와대 민정수석이 됐다.

대통령과 민정수석은 어느 날 이한열을 연기한 1981년생 강동원과 동석해 영화를 본다. 그리고 1990년생 김태리가 연기한 연희를 찾는다. 팩트와 픽션이 미묘하게 어우러지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어쩌면 여기에 있다. 영화 속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영웅들의 오늘을 우리는 보고 있다. 모두가 여전히 주인공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묘사한 바와 전혀 다른 모습을 스스로 증명하며 살고 있는 인물도 부지기수다. 우리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콘서트 공연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회자되는 말이 있다. “하늘 아래 같은 공연 없다.” 이 말에 동의하는 팬들은 여러 회차의 똑같은 공연을 복수로 관람한다. 영화도 그렇다. 처음 본 영화와 두 번째 본 영화가 다르고, 상영관의 크기나 함께 관람한 불특정 관객에 따라서도 다른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누구와 영화를 봤는지와 같은 개인적인 변수까지 더하면 같은 상영은 없는 것이다.

이 말을 꺼내는 것은 개봉한 지 2주가 되었고 이미 대통령까지 나서서 홍보하는 예매율 2위의 영화를 ‘n차’로 보아야 한다고 권유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크린과 나 사이에 작용하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영화는 언제 끝나는 것일까?’란 평소의 의문에서 시작한다. 영화라는 건 어디에서 끝나는 것일까? 감독의 마지막 컷팅, 편집이 끝나는 곳일까? 아니면 영화 제작 현장의 마지막 촬영이 끝나는 크랭크 업 순간에 있는 걸까? 혹은 스크린에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곳에 있는 것일까? 영화가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라면 영화는 영화가 끝난 곳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영화의 서사와 감동이 흐려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과 영화에 대한 소회를 나누며 비로소 영화가 끝나기도 한다. 반대로 관객이 지인들과 영화의 쾌를 재생하면서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면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본능의 욕구이기에 그렇다.

평일 낮 외곽의 영화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이한열 역의 배우가 최루탄을 뒤통수에 맞고 쓰러지며 극 중 죽음을 암시한다. 강동원이 느린 화면으로 피를 쏟는다. 그리고 이를 석간신문에서 본 연희가 달음박질친다. 요즘 젊은 여자 애들이 더 좋아하는 여배우 김태리가 달린다.

영화가 거의 끝나면 영화관의 내부의 스피커에서 ‘그날이 오면’ 합창이 들려온다. 이때 극장의 곳곳에서 좀비처럼 웅크리고 있던 무명의 모 씨들이 약속한 것도 아닌데 나지막이 노래를 함께 부른다. 당시의 행렬이 함께 영화를 보던 영화관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연출된 상황이 아니다. 1987년의 혁명은 스크린에서만 재생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1987’은 규모로 보나 스크린 수로 보나 따로 나서 추천할 필요가 없는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1987’이 상영되는 목하의 상영 현장을 추천한다.

정지혜(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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