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유내강(外柔內剛). 겉은 부드럽고 순하나 속은 꿋꿋하고 곧음을 뜻한다. 올해 데뷔 5주년을 맞는 배우 정휘에게 어울리는 말이다.10. 새해의 시작부터 ‘베어 더 뮤지컬(이하 베어)’과 ‘여신님이 보고 계셔(이하 여신님)’를 병행하며 바쁘게 보내고 있네요.
정휘는 현재 두 작품을 통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대학로 신예들의 ‘스타 등용문’으로 통하는 ‘베어 더 뮤지컬’(연출 이재준)과 스테디셀러 창작극 ‘여신님이 보고 계셔’(연출 박소영)다. 보수적인 가톨릭계 고등학교의 킹카 제이슨과 비밀 연애 중인 피터, 전쟁으로 형을 잃고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 북한군 류순호 역을 각각 맡았다.
미소년의 외모를 타고난 정휘는 그렇기 때문에 보다 단단한 피터와 류순호를 표현하고자 했다. 공연에는 미처 담기지 못한 인물의 역사를 상상하고 그 감정에 몰입했다. 무대 위 정휘의 눈빛과 표정, 대사 한 마디마다 인물의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캐릭터뿐 아니라 배우 정휘도 그 속이 단단하다. 2013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데뷔한 정휘는 이후 ‘백설 공주를 사랑한 난쟁이’(2013) ‘블랙메리 포핀스’(2014) ‘신과 함께 가라’(2016) ‘꽃보다 남자 The Musical’(2017) ‘모범생들’(2017) 등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며 꾸준히 활동했다. 2015년에는 EBS1 어린이 프로그램 ‘방귀대장 뿡뿡이’에 출연하며 특별한 경험을 쌓았다. 또 2016년에는 JTBC ‘팬텀싱어’를 통해 서바이벌에도 도전했다. 올해에도 정휘는 색다른 도전을 꿈꾼다. 무대를 넘어 다양한 장르로 영역을 넓히고 싶다고 했다. “내 이름 휘(輝, 빛날 휘)처럼 밝게 빛나는 날이 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휘를 만났다.
정휘: 그래서인지 살이 많이 빠졌어요.(웃음) ‘여신님’에서 입는 군복이 맞춤옷인데 얼마 전에 입어보니 허리 사이즈가 안 맞더라고요.
10. 두 작품에 동시에 출연하는 일이 쉽지 않죠?
정휘: 업계에서는 ‘겹치기’라고 말하는데 저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베어’나 ‘여신님’이나 체력적으로, 감정적으로 소모하는 게 많아서 힘들어요. ‘여신님’은 러닝 타임 내내 몸부림을 치거나 동작들을 크게 해야 해서 몸이 힘들어요. ‘베어’는 연기할 때 가슴이 너무 아파요. 제가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인데 ‘베어’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울게 되더라고요. ‘겹치기’를 연속으로 해내는 선배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웃음)
10. ‘베어’의 오디션 경쟁률이 치열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휘: 최종 오디션을 볼 때가 ‘여신님’ 첫 공연이 임박했을 때였어요. 일정이 빠듯하기도 하고 오디션에서 춤을 춰야 하니 편하게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갔거든요. 그런데 저 빼고 다 스쿨룩을 갖춰 입고 온 거예요. 나중에 합격하고 나서 연출가님이 말하기를 “그때 너 혼자 엄청 성의 없어 보였다”고.(웃음)
10. ‘베어’에 출연하기 전에 이 작품을 본 적이 있나요?
정휘: 네. 사실 관객으로 작품을 봤을 때는 크게 와 닿는 게 없었어요. 피터보다는 제이슨의 입장에 더 공감했고요. 제이슨은 커밍아웃을 하고 싶어 하는 피터를 만류해요. 사회의 외면을 두려워하는 현실적인 인물이죠. 그런데 제가 직접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10.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정휘: 우선 동성애 자체를 인지하게 됐어요. 이전에는 그냥 관심이 없었거든요. ‘베어’를 만나고부터는 동성애자들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물론 다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됐습니다. 이게 ‘베어’가 갖는 의의인 것 같아요. 단순히 두 소년이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내용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죠. 피터 역을 준비하며 들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나는 동성애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는 말이요. 이 한 마디가 아픔으로 다가왔어요. ‘베어’가 단순히 동성애를 그린 이야기로만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베어’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차별을 비판하는 작품입니다.
10. 피터를 연기하며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정휘: 해외에서 상연된 ‘베어’ 영상을 보니 피터가 정말 다양하더라고요. 몸집이 큰 피터도 있고 근육질인 피터도 있고. 저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마른 편이고 얼굴도 좀 여리게 생겼지만(웃음) 성격은 단단한 피터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요. 극 중에서 피터가 제이슨에게 자꾸 커밍아웃을 하자고 요구하는 것에 설득력을 주고 싶었거든요. 또 피터가 말 못 할 비밀을 안고 살면서 악몽을 꾸고 고민하는 모습도 살리고 싶었어요.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게 이 아이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 앞에 당당히 나서려고 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10. 캐릭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게 있다면요?
정휘: 이재준 연출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연출가님은 “대개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남자 역할, 여자 역할로 구분하려고 하지만 성(性)이 같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 뿐”이라면서 ‘게이’를 연기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냥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면 된다고요. 큰 도움이 됐어요. 덕분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고민하느라 또래보다 조숙한 피터를 떠올릴 수 있었죠.
10. 제이슨 역의 고상호·임준혁·노윤과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배우마다의 호흡도 다를 텐데요.
정휘: 고상호 형은 경력이 탄탄해서 저를 의지하게 만들어요. 형이 던지는 것을 제가 받으며 맞춰지는 호흡이 재밌습니다. 준혁이 형은 다정하고 여려요. 연습실에서도 동생들에게 가장 많이 당해요.(웃음) 준혁이 형의 제이슨은 보다 순수한 매력이 있어요. 제이슨 중 막내인 윤이는 ‘베어’가 데뷔작이에요. 걱정했는데 자기 살 길을 잘 찾아가고 있어요. 저보다 동생이라 무대 위에서 제가 좀 더 짓궂게 굴어요. 제이슨마다의 매력이나 성향이 다 달라서 공연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감정과 재미를 찾고 있습니다.
10. ‘베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뮤지컬 삽입곡)는 무엇인가요?
정휘: ‘앱솔루션(Absolution)’이요. 극이 끝날 쯤 피터가 신부님과 단 둘이 대화하며 부르는 노래에요.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뒤 피터가 말해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헤맸고,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고 절실하게 매달렸는데 사람들은 우리를 외면했다”고요. “우리는 그냥 사랑한 것뿐인데”라면서….(장면을 떠올리던 정휘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으아~ ‘베어’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요.(웃음) 극본 리딩을 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어요. 그 중에서도 ‘앱솔루션’이 베어의 메시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넘버인 것 같아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 누군가의 사랑을 극단의 상황까지 내몰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죠.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때 많이 웁니다.
정휘: 순호로 산 지 벌써 네 달째네요. ‘여신님’을 통해서 좋은 팀워크가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을 배웠어요. 스물세 살에 데뷔한 뒤로 어딜 가든 막내였거든요. 그래서 활동 초반에는 선배들이 막연히 무서웠어요. 그런데 ‘여신님’에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들도 너무나 편하게 대해주는 덕분에 마음을 훅! 열었어요.(웃음) 얼마 전에 홍우진(이창섭 역) 형이 공연 중간에 슥 오더니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공연이 끝나가는 게 아쉬워요. 작품을 시작할 때는 힘들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끝이 나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요.
10. 팀워크가 탄탄해 보입니다.
정휘: ‘여신님’이 많은 관객들에게 따뜻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 비결입니다. 연습실에서 처음 연기를 맞춰보는 날부터 배우들 사이가 돈독했어요. 극의 마지막에 인물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연습하는데 그때부터 엉엉 울었을 정도예요. 헤어지기 싫어서요. 특히 이창섭 역의 홍우진, 윤석원 형이 많이 울었어요.(웃음)
10. 전쟁 후유증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린 류순호 역도 연기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인데요.
정휘: ‘여신님’이 다섯 번이나 무대에 오른 공연이어서요. 그동안 많은 선배들이 순호를 연기했어요. 저마다의 해석이 다 다르더라고요. 저 역시 고민이 컸습니다. 그래서 쉬는 날에도 박소영 연출가님을 따로 만나 순호에 대해 상의했어요.
10. 결과적으로 어떤 순호를 만들어냈나요?
정휘: 순호가 여신님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떠나서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타인과 싸우지 않기 위해, 평화를 위해서 노력한 것들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습하면서 가장 고심한 넘버는 ‘보여주세요’에요. 여신님과 순호가 주고받는 노래인데, 저는 순호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고 생각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10. 피터에서 순호로, 또 순호에서 피터로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 힘들지는 않나요?
정휘: 무대 위에서는 각각의 캐릭터에 깊이 몰입해요. 그렇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서까지 그 감정에 힘들어 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전환이 빠른 편이죠. 배우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10. 지난해 ‘베어’와 ‘여신님’에 앞서 뮤지컬 ‘꽃보다 남자 The Musical’ 연극 ‘모범생들’ 등 네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정휘: 연이어 작품 활동을 하느라 몸은 힘들었는데 그만큼 많은 것을 얻었어요. 스스로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만큼이요. 특히 ‘모범생들’에 함께 출연한 형들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연습하면서 정말 많이 놀았거든요. 틈나는 대로 족구도 하고.(웃음) 그런데 어느 날 극본 리딩을 하는데, 저와 같이 족구만 하던 형들이 바로 변하는 거예요. 대본을 깊이 파고들고 세세한 부분을 상의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이게 진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외에도 1년 동안 네 작품을 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10. 데뷔한 지 5년입니다. 데뷔 초에 비해 달라진 게 있다면요?
정휘: 군 전역 후 바로 데뷔해서 그때는 모든 게 서툴렀어요.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도 매끄럽지 못했고요. 반면 지금은 여유가 생겼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보다 유연해졌어요. 작품을 거듭할수록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면서 변화한 것 같아요. 덕분에 사고도 넓어졌습니다. 또 점점 후배들이 생기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제가 배우를 막 시작했을 때는 갖고 있는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충분하지 못했어요. 후배들에게는 그런 기회를 많이 주고 싶어요. 그 친구들이 각자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했으면 좋겠고, 그런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저도 그들과 잘 어울리려고 합니다.
정휘: 아직 접해보지 못한 분야에도 계속해 도전할 생각입니다. 뮤지컬배우, 연극배우, 드라마배우, 영화배우가 아니라 그냥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장르에 따라 환경이나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결국 다 같은 연기잖아요. 다방면에서 잘 해내는 배우를 꿈꿉니다.
10. TV 데뷔는 ‘방귀대장 뿡뿡이’의 짜잔 형으로 했죠?(웃음)
정휘: 맞아요.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웃음) 출연하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거든요. 결과적으로는 배우로 활동함에 있어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배우들이 자기 자신을 놓는 게 힘이 든데 짜잔 형을 하면서 그게 가능해졌죠. 처음 방송에 출연한 것이라 카메라에 대한 어색함도 사라졌고요. 또 개그맨, 성우 형님들과 호흡을 맞춘 덕분에 코믹 연기나 목소리 연기도 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법을 배웠어요.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과 놀아주는 건 또 다르거든요.(웃음) 지금 짜잔 형으로 출연 중인 김대현도 제 친구에요. 제가 추천했어요.(웃음)
10. 올해 28살이 되었다고요. 30살이 가까워지네요.(웃음)
정휘: 28살이라니! 예전에는 28살이면 완전 어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어릴 때랑 다른 게 없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일동 웃음)
10. 올해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정휘: 배우로서는 작년에 그랬듯이 올해도 쉼 없이 연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 다양한 기회들이 찾아오길 바라고요. 그 외에는 지금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독립을 하려고요. 그럴 나이가 된 것 같아서요.(웃음)
10. 자신에게 힘을 주는 한 마디가 궁금합니다.
정휘: 좌우명인데요. 실패는 할 수 있는데 포기는 하지 말자.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특히 배우는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선례를 남겨준 선배들도 많고요. 앞으로 넘어질 수도 있고 포기하고 싶은 날도 있겠지만, 그래도 제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10. 이름은 본명인가요? 뜻이 궁금합니다.
정휘: 본명입니다. 다들 예명인 줄 알더라고요.(웃음) 빛날 휘(輝)를 써요. 원래 사촌 형의 이름이 될 뻔했어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는데 큰 아버지가 사촌 형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주면서 ‘휘’가 저한테 왔어요. 어렸을 때는 싫었거든요. 다른 애들은 이름이 다 세 글자인데 나만 두 글자라서.(웃음) 지금은 너무 좋아요. 빛난다는 뜻도, 흔하지 않은 이름인 것도… 제 이름이 점점 더 좋아집니다.
10.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정휘: 사람들이 ‘베어’를 많이 보러 왔으면 좋겠어요. 이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베어’를 통해 사회에 만연한 색안경들이 사라졌으면 좋겠고 개인의 개성이 존중받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베어’는 분명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작품입니다.(웃음)
손예지 기자 yeji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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