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프란츠’ 포스터
‘프란츠’ 포스터
‘프란츠’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이색적인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작은 독일 마을에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전쟁의 상흔과 용서라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프란츠’는 얼핏 보면 오종 감독의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종 감독이 이 작품 이전에 만든 시대극은 ‘엔젤'(2007)이 유일하다. 20세기 초 영국 여성작가 마리 코렐리의 생애를 다룬 ‘엔젤’은 시대극이긴 하지만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다룬 그의 멜로드라마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프란츠’는 오종 감독의 첫 번째 본격 역사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안나는 전쟁 중 사망한 약혼자 프란츠의 묘지에서 낯선 프랑스 청년 아드리앵을 발견한다. 아드리앵은 자신이 프란츠의 친구였고 둘은 파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프란츠의 파리 유학 시절이 궁금한 안나와 프란츠의 부모는 아드리앵을 집으로 초대해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이후 네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고 아드리앵은 프란츠의 빈자리를 메우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런데 안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프란츠의 친구로서가 아니라 아드리앵만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한다.

‘프란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 대부분이 흑백 화면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크게 5개의 시퀀스에서 컬러 화면이 등장한다. 매우 섬세하고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는 이 영화에서 몇 번 보이는 컬러화면은 의미심장하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컬러로 촬영된 장면들은 거짓말, 착각, 죽음, 악몽을 재현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 중반까지 컬러로 보이는 장면들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회고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현재와 과거,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선명한 금을 긋는 대신 물감이 번지듯 두 층위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만든 연출의 결과다. 오종 감독은 대립되는 두 명제의 경계를 허물기는 했지만 선택은 모호하지 않았다.

오종 감독은 아군과 적군이라는 뚜렷한 이분법을 만들어 내는 전쟁을 비판하면서 그것보다 상위에 용서와 사랑이라는 인간의 덕목을 놓고 있다. 거짓말, 살인, 배신처럼 어둡고 처참한 일들도 용서될 수 있고 사랑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날것으로 풀어놓으면 유치하고 조악해지기 쉬운 주제를 설득력 있게 끌어가는 솜씨가 오종답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컬러로 전환되는 장면은 아드리앵이 프란츠와 보낸 과거를 회고하는 부분이다. 단조로운 흑백화면으로 이어지던 현재와 대조적으로 과거는 따뜻하고 화사한 색으로 빛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파티에서 흥겹게 춤을 추는 아드리앵과 프란츠는 행복해 보인다.

‘프란츠’ 스틸컷
‘프란츠’ 스틸컷
거짓과 죽음을 컬러로 채운 의도는 이조차, 아니 이런 고통을 딛고 비로소 용서와 사랑이 구현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그동안 오종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주제다. 1998년 재기발랄하고 전복적인 코미디 ‘시트콤’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젊은 감독도 이제 쉰 살이 되었다. 따라서 ‘프란츠’의 색다른 모습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여겨진다. ‘프란츠’는 약 20년간 누적된 오종 영화의 한 챕터를 정리하는 느낌을 준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과감한 탐구, 장르를 다루는 창의적 실험을 하면서 오종이 품어온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프란츠’는 중간 결산으로써 답을 제시한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한 틀보다 중요한 인간의 감정, 그 정수인 사랑이 그 답이다.

‘프란츠’는 1932년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내가 죽인 남자’를 리메이크 했다. ‘루비치 터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루비치의 고전영화가 오종의 손길과 숨결로 다른 옷을 입게 된다. 프랑스 남자에서 독일 처녀로 주인공이 바뀌고 결말도 달라졌다. 장면 전환이 참 유려한 ‘프란츠’의 대미는 마지막 장면이다. 변화무쌍했던 여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일단락짓는 적절한 열린 결말은 꽤 오래 뇌리에 남게 된다.

이현경(영화평론가)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