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한철이 지난달 27일부터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연출 황재헌, 이하 그그목)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2010년 ‘호야’ 이후 연극은 7년 만이다. 무대를 피한 건 아니고, 그간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얼굴을 익히느라 겨를이 없었다. tvN 드라마 ‘내일 그대와'(2017)에서는 정체가 모호한 시간 여행자 두식으로, 영화 ‘특별시민'(2017)에서는 일차원적인 정치인 강 의원으로 분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줬다. ‘그그목’ 속 정민은 또 다르다. 한없이 가볍다가도 뜨거운 눈물로 묵직한 울림을 전달한다. 조한철은 요즘 여러 겹을 보여줄 수 있는 정민을 진득하게 연기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1998년 연극 ‘원룸’으로 데뷔해 20년째 배우로 살고 있지만, 새삼 ‘배우’라는 걸 느끼게 해준 작품을 만났다는 것. 이렇게 또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10. ‘그그목’ 속 정민으로 산지 한 달이 흘렀네요. 조한철 : 오늘(7월 20일)은 윤유선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날이에요. 공연 첫날처럼 긴장되네요.(웃음) 진경과 윤유선은 연습할 때부터 느낌이 달랐어요. 공연의 특성상 남녀가 서로 주고받는 형식이라 상대 배우에 따라 다른 정서가 생기죠. 진경의 경우 ‘걸크러쉬'(Girl+Crush on, 여성이 다른 여성을 동경하는 마음) 라고 하죠, 보이시(Boyish)한 매력이 있어서 제가 좀 더 까분다고 해야 할까요? 좀 흔들거나 갈등의 요인을 줘도 문제가 없어요. 반면 윤유선과 연기하면 제가 어려지는 느낌이 들어요. 어리광을 부리거든요.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건데, 상대 배우와의 호흡은 어떨지 늘 기대되죠. 배우마다 다른 개성이 있으니 관객들도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제작사에서도 그걸 의도한 게 아닐까 하고요.(웃음)
10. 연극 무대를 떠난 지 7년 만에 ‘그그목’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한철 : 어떤 기사에 7년이라고 나왔길래 세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사실 연극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계속 있었어요. 대학로에 이사 온 지 2년 됐는데, 저에겐 낯선 동네가 아니어서 적응이랄 것도 없이 좋더라고요. 대학로는 학창시절을 보낸 곳 다음으로 고향 같은 느낌이죠. ‘그그목’의 연습을 시작하기 한 달 전에 진경이 전화를 해서 추천하더라고요. 2014년 재연 때 봤던 작품인데 그때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역할이었어요. 일정에도 문제가 없어서 소속사에 “꼭 해야겠다”고 해서 출연하게 됐습니다.
10. 정민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나요? 조한철 : 딱 한 부분을 말할 수가 없어요. 그게 이 공연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내용으로 보자면,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했어요. 우리가 보는 대다수의 드라마, 영화에는 관계들이 정형화돼 있잖아요. 친구, 부부, 애인 등등으로 말이죠. 일상도 그렇고요. 그 틀에서 벗어나면 이상하게 바라보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며 쉽게 판단하죠. 그런 규격화된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터에 ‘그그목’을 만난거죠.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매우 이상한 관계들의 조합이잖아요.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색다르지만 또 이해가 되니까요. 유럽 영화를 보면 이상한 관계들을 많이 다루는데 재미있잖아요. 우리는 유독 나와 다르다고 하면 도덕적이지 않다고 보죠. 관계를 맺는 형태는 다양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그그목’과 정민은 그런 저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10. 역사를 논하거나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들이 대사에 많이 나오는데 힘들진 않나요? 조한철 : 보통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 작품의 주제에 대해 연구하면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자연스럽게 대사가 외워집니다. 이 작품은 달라요.(웃음) 거꾸로 가야 합니다. 대사를 공부하듯이 다 외우고 시작했어요. 수학 공식을 외우듯이 달달 외웠죠. 하하.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 공연 중인 조한철(왼쪽) / 사진제공=(주)스타더스트
10. 가슴을 울리는 대사와 장면이 있다면? 조한철 : 매회 울어요. 리허설에서조차 울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장면들이 많아서 하나만 정하지 못할 정도예요. 또 공연을 할 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지점이 달라요. 어떤 날은 무대 밖에서 보면서도 울고요.(웃음) 딸을 만나는 장면에선 그렇게 답답해요. 그건 조한철과 정민의 충돌 때문인 것도 같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또 어떤 날은 극중 연옥의 가방이 덩그러니 놓인 것만 봐도 울컥하죠. 정말 힘든 공연이에요. 게다가 힘을 안배하는 걸 몰라서 연속 2회 공연을 하는 날엔 피부가 덜덜 떨리기도 해요.
10.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설렘과 긴장도 있나요? 조한철 : 예전에는 관객 반응에 휘둘리는 일이 많았어요. 이젠 나름의 대처 방법들이 생긴 것 같아요. 과거 선배들이 해준 말씀도 이해하고요. 대기할 때부터 객석의 웅성거림이 달라요. 옛날엔 그저 반응이 좋다, 나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점점 깊이 알게 되죠. 어느 날은 공연 중엔 차분하고 조용했는데 커튼콜 때 정말 뜨거운 박수가 나와요. 그게 더 좋게 느껴질 때도 있고, 매번 달라요. 다만 배우로서 관객에게 휘둘리지는 말아야죠.
10. 그래도 관객의 호흡과 기운을 바로 앞에서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연극의 맛이겠죠. 조한철 : 배우들의 바로 앞에 있으니까요. 그 기분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어요. 누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처럼 벅찹니다. 관객들과 뭔가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롭고 치유받는 느낌, 그게 행복이죠.
10. 작품에 대한 애정이 한마디 한마디에 느껴져요. 조한철 : 만나기 쉽지 않은 공연이에요. 그러니까 원 없이 해야죠.(웃음) 7년 간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지만 사실 영화,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속까지 다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은 못했거든요. ‘그그목’에게 감사하죠. 그간 배우로 살았지만 ‘내가 배우였지’라고 새삼 느끼고 있어요. 정말 행복합니다.
10. 데뷔 20년 차입니다. 배우로 산다는 게 어떤가요? 조한철 :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술이나 음악을 예로 들면, 그들은 어느 정도 그림이나 노래 뒤로 숨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연기는 숨을 곳이 없어요. 나를 온전히 보여줘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게 배우예요. 예쁘게 포장하고 근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보여주는 거죠. 다들 일상에서 욕구나 다양한 감정을 숨기고 살잖아요. 그런데 우린 들켜야 하는 게 일이니까요. 어떨 때는 외롭죠. 누구나 숨기고 싶어 하는 밑바닥까지 다 들키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걸 사회적으로 허락하는 유일한 직업이에요. 또 상대 배우, 관객과 늘 같이 가고요. 그래서 모순이지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죠.
10. 그러고 보니 배우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소통하는 직업이네요. 조한철 : 요즘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보면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해요. 다들 자신을 숨기려고만 하죠. 친구, 연인, 심지어 부부간에도 소통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 같고요. 배우는 궁금한 모든 것을 질문하고, 또 어떻게 하면 상대와 더 잘 소통할까를 고민하고 연구합니다. 무대 위에서 발가벗겨지지만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 마약 같은 그 기분을 느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연극을 계속하고 싶고요.
10. 언제부터 연극에 매력을 느꼈나요? 조한철 :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연극을 봤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문화센터가 활발하게 잘 돼 있지 않았어요. 교회나 성당에서 대학생 형, 누나들을 따라다니면서 접했죠. 그때 봤던 연극이 좋아서 배우를 꿈꿨고요. 극단 연우무대의 공연을 보고 푹 빠져서 몇 번씩 보고 그랬어요.
10. 조숙했군요.(웃음) 조한철 : TV만 보다가 연극을 보니 ‘세상에 이런 게 있구나’ 싶더라고요. 구조 자체도 독특했고요. 가장 처음 본 연극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였는데, 사회성이 짙은 연극이라 매력을 느꼈고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다는 걸 알았죠. 그런 건 학교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았으니 깜짝 놀라면서도 좋았습니다.
10. 연극을 본다고 해서 모두 연극배우를 꿈꾸는 건 아닐 텐데요. 조한철 : 당시엔 무대 뒤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 몰랐으니까요.(웃음) 무대 위 배우만 봤죠. 연극의 꽃은 배우라고 생각했고, 무대에 서는 게 꿈이었어요. 군대를 다녀온 뒤 정말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것을 접하지 못해서일까라는 고민에 빠져 잠깐 방황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배우만을 바라보며 산 것 같아요.
조한철 / 사진제공=(주)스타더스트
10. 연극 무대의 7년 공백은 의도된 건가요? 조한철 :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렀어요. 한때 출연하기로 했다가 인지도가 있는 배우로 교체되는 일을 몇 번 겪었죠. 연이어 작품을 못하면서 그 시기에 갈등을 했죠. 그전까지는 TV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할 정도로 바빴어요. 생활도, 공연도 모두 해야 하니까요. 연극 출연이 잇달아 불발되면서 위기의식을 느꼈고, 배우로서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야겠다 싶어 드라마, 영화도 시작했어요. 다행히 예쁘게 봐준 선배들이 있어서 드라마,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었고요.
10. TV와 연극을 오가는 게 어렵진 않나요? 조한철 : 연극을 하면서 독립영화를 몇 차례 찍었고, 고정으로 길게 출연한 첫 드라마는 SBS ‘대풍수'(2012)였어요. 연기 기법이 달라서 힘들다기보다 오히려 공연을 한 게 득이 됐어요. 그걸 기대하고 부른 것이기도 하고요. 다만 확실히 낯선 동네의 느낌이 들긴 하죠.(웃음) 후배들이 종종 드라마, 영화 촬영장에 다녀와서 “욕 많이 먹었어요. 너무 달라요”라고 할 때도 있는데 “낯선 건 어쩔 수 없다. 시간이 걸릴 거다. 기대할 필요 없이 여유를 가져라”고 말해줄 뿐이에요.
10. 연기할 때 자신의 가치관과 충돌할 때는 없나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연기해야 하는 고충 같은 거 말이죠. 조한철 : 나 자신과 분리하는 건 쉽지 않아요.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평소에도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애써요. 그럼에도 연기를 하면서 충돌하죠. 예를 들면 정말 싫어하는데 말로라도 “좋아”라고 하는 게 쉽지만은 않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평소에도 열린 사고를 갖고 편견이 없어야 해요. 배우 최민식을 좋아하고 따르는데, 정말 막히지 않은 사람이거든요. 그가 간혹 툭툭 던지는 말들이 있어요. “오라 그래” “가라고 해”가 자주 하는 말이죠. 후배들이 농을 섞어 따라 하기도 하는데, 늘 열려있는 최민식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죠.(웃음) 올 연말에 개봉할 영화를 같이 찍으며 많이 배웠습니다.
10. ‘그그목’을 계기로 연극을 통해 자주 볼 수 있을까요? 조한철 : ‘그그목’을 통해 저도 새로운 관계 맺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는 8월 20일 막을 내리기 전까지 관객들과 잘 소통하고 싶고요. 하반기에는 영화, 드라마에서 만날 수 있어요. 부지런히 해야죠. 연극도 물론 계속 하려고요. 앞으로도 저는 배우로 살겁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