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주리 기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이 발매된다.
생애 후반부의 음악을 따져도 지금으로부터 40년이 지나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지형도를 바꾼 열풍기인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대중과 만난 지도 6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너무 멀다. 그렇다고 미국음악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그의 음악이 세대단절이란 질곡에 빠져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 시제와의 탈출을 꾀하고 지금에도 통해야 한다.
우선은 오리지널 레코딩이 리바이벌 붐을 타고 돌아오는 것이나 후배 인기가수의 리메이크도 좋다. 하지만 전자는 요행이고 후자는 원곡의 터치를 온전하게 전하기는 어렵다. 2002년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디제이 JXL의 리믹스 ‘A Little Less Conversation’이나 이듬해 폴 오켄폴드의 리믹스인 ‘Rubberneckin’’의 경우는 그럴 염려는 없지만 결과물이 포괄적 세대의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엘비스의 ‘판타스틱’ 보이스를 그대로 살리면서 지금의 감수성과 조화를 꾀해 여러 세대가 공히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이 요구된다는 것. 아내였던 프리실라는 이 점에서 미래적인 열린 시선을 원했다. “만약 우리가 그대로의 것에만 집착한다면 어떻게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미래로 전할 것인가? 어떻게 그를 지금의 세대와 만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 이 위대한 유산을 계승해갈 것인가?”
이런 기본적 사고의 토대에서 프로듀서이자 엘비스 프레슬리가 한창 라스베가스 쇼에 출연할 당시 악단의 지휘자였던 돈 리드먼(Don Reedman)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오리지널 음원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클래시컬 사운드가 조우하는 원대한, 그러나 리스크가 강한 합(合)의 구상을 품었다. 발상 그 자체가 획기적, 파격적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보이스와 오케스트럴 사운드가 만난다고?” 그가 활동했던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대는 대중의 팝과 클래식이 소비층과 계급 그리고 인식 등 제반 측면에서 철저히 갈라져 있던 때였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프로듀서의 기획적 산물이어서는 곤란하며 평소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남겨놓은 그의 지향과 취향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고인이라고, 또 지금은 이런 사운드가 어울린다고 그의 의사에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음악적 가공과 선택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프리실라는 이 대목에서 평소 엘비스가 ‘로큰롤’에만 머물지 않고 가스펠, 블루스, 컨트리, 월드뮤직 등 광대한 장르를 섭렵했다는 점을 들면서 그가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도 좋아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실 큰 무대, 다세대 관객의 공연장에 익숙한 ‘킹’ 엘비스 프레슬리는 몇몇 대표곡만 들어봐도 크고(Big) 꽉 차고(Full) 드라마(Drama) 같은 사운드를 선호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프리슬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가는 직(直) 코스다. 살아 있었다면 꼭 하고 싶었던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 결과물은 굉장히 잘 어울린다. 물론 군에서 전역 후 공격적인 로큰롤과 일정한 선을 긋고 기성세대를 겨냥한 스탠더드 음악으로 전향했기에 반드시 부조화는 아닐 테지만 원래가 클래시컬 터치를 보유하고 있었나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바이브레이션 풍부한 그의 목소리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토록 자연스레 융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명작 ‘In The Ghetto’(1969년, 3위)를 비롯해 이탈리아 출신 팝 트리오 일 볼로(Il Volo)가 도운 ‘It’s Now Or Never’(1960년 1위), ‘Love Me Tender’(1956년 1위), ‘Can’t Help Falling In Love’(1962년 2위)는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으며 블루스 넘버 ‘Steamroller Blues’(1973년 17위)와 찬송가 ‘How Great Thou Art(전지전능한 신이시여)’(1967년 싱글 미발표)는 섞이지 않을지 모른다는 예측을 뭉개며 우리를 경이의 세계로 끌어간다. 잘 나가는 가수 마이클 부블레와의 듀엣으로 꾸민 ‘Fever’나 현을 튕기는 듯 독특한 이른바 트왱(Twang) 사운드로 유명한 엘비스 동시대의 인물 듀언 에디(Duane Eddy)의 기타가 첨가된 ‘Bridge Over Troubled Water’ ‘An American Trilogy’보다도 생애 후반기의 유일한 로큰롤 ‘Burning Love’(1972년 2위)는 첫 곡에 배치되었음에도 이미 절정을 선사하는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다.
앨범의 발견은 닐 다이아먼드의 원곡으로 블루스, 컨트리, 로큰롤이 환상적으로 교배된 엘비스 목소리의 특징과 광대한 흡수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And The Grass Won’t Pay No Mind’ 아닐까 한다.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편곡도 엘비스의 보이스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존중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1961년 앨범 [Something For Everybody]에 수록되어 있으나 1967년에 싱글(56위)로 낸 ‘There’s Always Me’ 역시 소박한 해석이 돋보이는 숨은 보석이다. 엘비스 마니아들이 저 옛날부터 아끼는 레퍼토리인 동시에 앨범이 엘비스의 꿈이었다는 점과 연결하려는 뜻에서 타이틀로 채택한 ‘If I Can Dream’은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흥분의 극치를 제공하며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몰아갈 것이다. 앨범의 방점을 찍는 곡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경험이 적은 요즘 세대는 풍성하고, 한없이 부드러우며, 고독이 짙게 배인 그 세기의 보컬이 살포하는 마력에 압도당할 것이며 기성세대는 하나로 합쳐진 엘비스와 로열 필이 제공하는 감동에 흐뭇해 할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엘비스의 80번째 생일 축하 행사의 일환이기도 하다. 과거에 매달림을 거부하고 시제를 미래로 벌리기 위해 리스크를 감행하면서 후대와의 소통을 창출하려는 그 탄력적 접근이 돋보인다. 앨범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시대에도 강렬하게 호흡하는 현재진행형 전설이라는 절대 위상을 획득한다.
김주리 기자 yuffie5@
사진. 소니뮤직 제공
생애 후반부의 음악을 따져도 지금으로부터 40년이 지나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지형도를 바꾼 열풍기인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대중과 만난 지도 6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너무 멀다. 그렇다고 미국음악을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 그의 음악이 세대단절이란 질곡에 빠져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 시제와의 탈출을 꾀하고 지금에도 통해야 한다.
우선은 오리지널 레코딩이 리바이벌 붐을 타고 돌아오는 것이나 후배 인기가수의 리메이크도 좋다. 하지만 전자는 요행이고 후자는 원곡의 터치를 온전하게 전하기는 어렵다. 2002년 영국차트 1위에 오르는 디제이 JXL의 리믹스 ‘A Little Less Conversation’이나 이듬해 폴 오켄폴드의 리믹스인 ‘Rubberneckin’’의 경우는 그럴 염려는 없지만 결과물이 포괄적 세대의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엘비스의 ‘판타스틱’ 보이스를 그대로 살리면서 지금의 감수성과 조화를 꾀해 여러 세대가 공히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이 요구된다는 것. 아내였던 프리실라는 이 점에서 미래적인 열린 시선을 원했다. “만약 우리가 그대로의 것에만 집착한다면 어떻게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미래로 전할 것인가? 어떻게 그를 지금의 세대와 만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 이 위대한 유산을 계승해갈 것인가?”
이런 기본적 사고의 토대에서 프로듀서이자 엘비스 프레슬리가 한창 라스베가스 쇼에 출연할 당시 악단의 지휘자였던 돈 리드먼(Don Reedman)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오리지널 음원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클래시컬 사운드가 조우하는 원대한, 그러나 리스크가 강한 합(合)의 구상을 품었다. 발상 그 자체가 획기적, 파격적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보이스와 오케스트럴 사운드가 만난다고?” 그가 활동했던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대는 대중의 팝과 클래식이 소비층과 계급 그리고 인식 등 제반 측면에서 철저히 갈라져 있던 때였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프로듀서의 기획적 산물이어서는 곤란하며 평소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남겨놓은 그의 지향과 취향에 부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고인이라고, 또 지금은 이런 사운드가 어울린다고 그의 의사에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음악적 가공과 선택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프리실라는 이 대목에서 평소 엘비스가 ‘로큰롤’에만 머물지 않고 가스펠, 블루스, 컨트리, 월드뮤직 등 광대한 장르를 섭렵했다는 점을 들면서 그가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도 좋아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실 큰 무대, 다세대 관객의 공연장에 익숙한 ‘킹’ 엘비스 프레슬리는 몇몇 대표곡만 들어봐도 크고(Big) 꽉 차고(Full) 드라마(Drama) 같은 사운드를 선호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프리슬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엘비스 프레슬리로 가는 직(直) 코스다. 살아 있었다면 꼭 하고 싶었던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 결과물은 굉장히 잘 어울린다. 물론 군에서 전역 후 공격적인 로큰롤과 일정한 선을 긋고 기성세대를 겨냥한 스탠더드 음악으로 전향했기에 반드시 부조화는 아닐 테지만 원래가 클래시컬 터치를 보유하고 있었나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바이브레이션 풍부한 그의 목소리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토록 자연스레 융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명작 ‘In The Ghetto’(1969년, 3위)를 비롯해 이탈리아 출신 팝 트리오 일 볼로(Il Volo)가 도운 ‘It’s Now Or Never’(1960년 1위), ‘Love Me Tender’(1956년 1위), ‘Can’t Help Falling In Love’(1962년 2위)는 기대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으며 블루스 넘버 ‘Steamroller Blues’(1973년 17위)와 찬송가 ‘How Great Thou Art(전지전능한 신이시여)’(1967년 싱글 미발표)는 섞이지 않을지 모른다는 예측을 뭉개며 우리를 경이의 세계로 끌어간다. 잘 나가는 가수 마이클 부블레와의 듀엣으로 꾸민 ‘Fever’나 현을 튕기는 듯 독특한 이른바 트왱(Twang) 사운드로 유명한 엘비스 동시대의 인물 듀언 에디(Duane Eddy)의 기타가 첨가된 ‘Bridge Over Troubled Water’ ‘An American Trilogy’보다도 생애 후반기의 유일한 로큰롤 ‘Burning Love’(1972년 2위)는 첫 곡에 배치되었음에도 이미 절정을 선사하는 앨범의 베스트 트랙이다.
앨범의 발견은 닐 다이아먼드의 원곡으로 블루스, 컨트리, 로큰롤이 환상적으로 교배된 엘비스 목소리의 특징과 광대한 흡수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And The Grass Won’t Pay No Mind’ 아닐까 한다.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편곡도 엘비스의 보이스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존중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1961년 앨범 [Something For Everybody]에 수록되어 있으나 1967년에 싱글(56위)로 낸 ‘There’s Always Me’ 역시 소박한 해석이 돋보이는 숨은 보석이다. 엘비스 마니아들이 저 옛날부터 아끼는 레퍼토리인 동시에 앨범이 엘비스의 꿈이었다는 점과 연결하려는 뜻에서 타이틀로 채택한 ‘If I Can Dream’은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흥분의 극치를 제공하며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몰아갈 것이다. 앨범의 방점을 찍는 곡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경험이 적은 요즘 세대는 풍성하고, 한없이 부드러우며, 고독이 짙게 배인 그 세기의 보컬이 살포하는 마력에 압도당할 것이며 기성세대는 하나로 합쳐진 엘비스와 로열 필이 제공하는 감동에 흐뭇해 할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엘비스의 80번째 생일 축하 행사의 일환이기도 하다. 과거에 매달림을 거부하고 시제를 미래로 벌리기 위해 리스크를 감행하면서 후대와의 소통을 창출하려는 그 탄력적 접근이 돋보인다. 앨범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시대에도 강렬하게 호흡하는 현재진행형 전설이라는 절대 위상을 획득한다.
김주리 기자 yuffie5@
사진. 소니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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