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베일
베일
김원준은 스스로를 ‘정한종 키드’라고 칭했다. 때문에 정한종이 밴드 결성을 제의해 왔을 때, 그에겐 ‘거절’이란 선택지가 없다시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 베일이다. 초창기 베일에는 김원준과 정한종 외에도 김구, 이창현, 강선우가 속해있었다. 김원준이 노래를 하고, 김구가 랩을 했다. 특이한 팀이었다.

3년간의 활동 뒤, 베일은 7년이라는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 김원준은 드라마와 예능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고, 정한종은 사업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뮤지션의 피가 어찌 그리 쉽게 식으랴. 지난 해 추석 즈음,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뜻을 모았다. 여기에 정한종은 평소 눈 여겨 보았던 ‘홍조(홍대 조상님)’ 엄주혁을 끌어들였다. 밴드 베일은 그렇게 다시 만들어졌다. 세 사람 모두 곡을 쓰고, 모두 노래를 부른다. 나아가 스스로를 연주자 밴드가 아닌 프로듀서 집단으로 정의한다. 여전히 특이한 팀이다.

Q. 13일 열리는 공연의 1차 오픈 티켓이 모두 매진됐다고 들었다. 축하한다. 비결이 무엇인가?
정한종 : 잘생긴 외모? 하하. 농담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공백이 있었잖아. 그런데 아직 의리를 지켜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도 감사하고 놀랐다. 우리가 베일의 팬들을 ‘베일러’라고 칭했는데, 예전부터 베일러들이 의리는 좋았던 것 같다.
김원준 : 2차 스탠딩석의 티켓 오픈이 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중요하다. 한 분이라도 많이 봤으면 좋겠다. 우리 공연을 칭찬하든 안 하든, 일단 라이브와 음원은 느낌이 다르니까. 청각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공연의 분위기를 느끼는 게 우리로선 고마운 일이고 더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Q. 멤버들이 워낙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김구의 랩과 김원준의 보컬이 어우러지는 게 베일만의 시그니처 컬러였다면, 지금은 뭔가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정한종 : 멤버가 바뀌었다는 건, 음악적으로 색깔이 바뀌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예전에도 그 때 나름대로 우리의 음악을 좋아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조금은 치기어린 면도 있었던 것 같다. 보여주고 싶었고 과시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지. 지금은 좀 더 자연스러운, 이를 테면 ‘민낯’을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밴드명의 표기도 ‘베리어스 엘레먼트 인 라이프(Various Elements In Life)’에서 ‘러브’로 바뀌었다. 사실 전부터 ‘러브’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서, 데뷔곡 ‘퍼스트(first)’의 가사에도 ‘엘(L)’이 ‘러브’의 표기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사랑의 L”) 그런데 당시 멤버들이 좀 더 사회적이고 심각한 주제를 건드리길 원했었지. 그래서 표기를 바꾼 게 우리로서는 초심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새 앨범 제목 역시 ‘커밍 홈(Coming Home)’으로 지었고. 어쨌든 멤버가 변하면서 래퍼가 없어지다 보니, 멜로디 라인이나 감성적인 부분이 부각되는 앨범이 됐다.

Q. 표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히려 지금이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더 적합한 시기 아닌가?
정한종 : 우리가 생각하는 ‘러브’는 훨씬 무겁다. 더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얘기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정치가 어떻고 핵문제가 어떻고 하는 이념보다는, 본질에 대한 전쟁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이번 앨범에서는 남자의 사랑을 얘기했지만, 이게 부모의 사랑일수도 있고 인류애일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

Q. 결국 베일의 ‘러브’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 될 수 있다는 말이군.
정한종 : 조금만 더 부연설명하자면, 밴드 붐이 일었던 60년대 히피즘도 결국 ‘러브’에서 태어난 거다. 플라워 칠드런(flower children)이 정치, 사회, 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을 때, 자기들을 향한 총구에다가 꽃을 꽂을 수 있었던 건 결국 ‘러브’에서 비롯된 행위거든.

베일
베일


Q. 다시 멤버 교체 이야기를 하자면, 신기하게도 드러머가 없어졌다. 드러머가 없는 밴드,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김원준 : 연주자적인 접근보다, 프로듀서 세 명이 모였다고 생각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정한종 : 예를 들어 봄여름가을겨울도, 우리는 밴드라고 부르지만 2인조잖아. 그것과 비슷하다. 공연을 할 때에는 우리를 도와주는 파트너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무대에서 연주할 때에는 6인조의 사운드를 내는 밴드가 되는 거지.

Q. 밴드들은 합주를 하면서 곡 작업을 진행하잖아. 그런데 드러머가 없으면 어떻게 합주가 이뤄지는지도 궁금하다.
정한종 : 우리가 기본적으로 직업이 프로듀서였기 때문에 사운드를 구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 컴퓨터 샘플을 쓴다던가. 우리가 만들 사운드를 미리 구현해보는 작업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드러머가 없더라도 미리 그림을 그려볼 수 있지. 실질적으로 이번 앨범에서는 예전 베일에 비해서 참여 스태프진이 굉장히 작아졌다. 녹음부터 믹싱 전까지 우리끼리 다 했다. 외부에선 우리가 뭘 하는지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오히려 그게 더 심플하고 재밌었다. 편안하기도 하고.
엄주혁 : 참고로 드럼은 마우스로 찍었다.
김원준 : 시퀀싱이라고 하지. 우리와 비슷한 팀들이 꽤 있다.

Q.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드러머가 없는 밴드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팀은 록 밴드라기보다는 팝 밴드의 개념이었다. 일렉트로닉 소스들을 많이 쓰는 팀이었지.
정한종 : 우린 좀 더 거꾸로 갔던 게, 드러머가 있을 때에는 컴퓨터로 여러 효과를 많이 넣었다. 멤버들이 단출해지고 나서는 오히려 풀 라이브로 진행하게 됐고. 음악적인 정의는 우리 역시 스스로를 록 밴드로 규정하진 않는다. 어떤 장르에 얽매기 보다는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김원준 : 3인조로 다시 나온 것의 가장 큰 초점은 셋이서 곡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연주적인 부분은 세션에서 충당이 되거든. 어떤 사람들은 밴드니까 풀 사운드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도 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프로듀서의 접근법으로 갔다.
엄주혁 : 그냥 회식하면서도 통기타 한 대만 있으면 곡을 만들어서 휴대폰에 녹음해 둔다. 그렇게 상상했던 걸 나중에 컴퓨터 앞에서 구현해내고.
김원준 : 재밌게 생각해볼 부분인 게, 만약 프로듀싱이 가능한 드러머가 있었다면 4인조가 됐을 지도 모른다. 한종이 형이 베일을 다시 하자고 했을 때, 멤버를 구성하는 본질은 프로듀서로서의 조합이 좋을 것 같다는 거였거든.
정한종 : 사람이 중요하다. 그런데 음악하는 사람들이 개성이 강하거든. 사람이 많아질수록 의견 조율하기가 힘들더라. 내가 판단하기에 지금 멤버 3명이 가장 좋은 조합이었다. 서로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인데 충돌은 없고 시너지가 났다. 이 이상의 멤버였다면 에너지가 반감됐을 것이다.
김원준 : 처음부터 연주자를 찾을 생각은 아예 없었고, 프로듀서로서 모인다는 생각이 강했다.

베일
베일


Q. 세 사람 모두 프로듀서의 입장이라면, 상상했던 그림을 구현해내기 위해 더 자유로운 포맷을 쓸 수도 있을까? 이를 테면, 객원 가수를 불러온다던지.
정한종 :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한테 베일은 상직적인 의미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 에너지가 통한다면 콜라보레이션의 형식을 빌릴 수 있겠지.
김원준 : 기자님이 보컬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웃음)

Q. 그게 아니라, 황프로젝트(황세준, 황성제, 황찬희)가 생각나서 했던 질문이었다. 그들 역시 작곡가가 중심이 되는 팀이잖아. 반면 보컬은 앨범마다 다르게 쓰고.
김원준 : 그들은 토이 같은 느낌이고 우리는 좀 다르다. 노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멤버들이 가창을 다 한다. 그게 매력이다. 심지어 주혁이 같은 경우에는 노래를 굉장히 잘한다. 누가 분량을 더 많이 가져간다고 해도, 전혀 서운할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접근을 하니까. 사실 나는 지금 상당히 고무적인 기분이다. 아, 그래서 우리 앨범은 어떻게 들었나?

Q. 대답하기 부담스러운데(웃음), 첫 트랙은 굉장히 편하게 들었다. 이지 리스닝 같은 느낌도 있고. 그런데 뒤로 가면 발라드도 있고, 탱고 느낌이 나는 곡도 있더라. 편곡의 방향은 어떻게 잡았나?
정한종 : 10곡이 연작 스타일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그가 겪어야 하는 감정, 상황이 장르적으로 표현된 거다. 1년 동안 작업을 하다 보니 계절성도 담겼다. 처음 사랑에 빠졌던 게 봄이라면, 열정이 불타오른 게 겨울, 헤어짐이 가을, 혼자 남은 게 겨울로 표현될 수 있지. 그 남자가 가질 수 있었던 표현들이 장르에 녹아난 거다. 앞 쪽은 라이트하고 뒤로 갈수록 깊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까 얘기한 자연스럽고 솔직하다는 느낌도 감정을 장르로 녹여낸 데에서 기인한 것 같다.

Q. 풀 앨범을 들었을 때 듣기 좋게 만든 느낌이다.
정한종 : 그렇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공연은 어떤 코멘터리 없이 음악만 들어도 스토리가 연상되는, 일종의 뮤직 쇼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이번 앨범 하나로는 어려울 테고 앞으로 앨범이 더 쌓여야겠지.

Q. 그러면 앨범 안에서의 연작을 넘어, 앨범끼리의 연작 구성도 가능하겠다.
정한종 : 그것 역시 구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원준 : 한종이 형이 스토리텔러를 지향하기도 하고, 감각도 뛰어나다. 실제로 곡의 얘기가 이어지기도 하고, 개중에는 내 경험과 싱크로율이 높은 곡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디서든 누군가 이 노래를 듣고 ‘이건 내 얘긴데’라고 공감할 수 있을 거다. 그게 음악의 힘이지.
정한종 : 이건 혼자만의 상상인데,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살아 있지 않더라도, 후배 뮤지션들이 우리의 노래를 연주하면서 자신의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을 거다. 어떤 영화감독이 우리의 노래를 바탕으로 작은 단편 영화라도 만들어 볼 수 있다던가. 그런 꿈도 꾸고 있다.

Q. 그러면 앨범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 역시 스토리 전달이라고 보면 될까?
정한종 : 우리 음악이 굉장히 힘을 줬다거나 기술을 보여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 음악의 정체성은 이모셔널 팝이라고 생각하거든. 감수성이 있는 음악을 하고 싶은 거다. 거기엔 물론 멜로디 선율도 있겠지만,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는 가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가사의 스토리로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베일
베일


Q. 요즘 젊은 밴드들은 외국 느낌을 자기들 식으로 소화해내잖아. 베일은 그런 트렌디한 방향에 대한 생각은 없었나?
정한종 : 그건 그들이 할 일이다. 비꼬는 게 아니라, 우리 역시 어린 친구들의 외국물 냄새, 핫하고 트렌디한 코드들을 박수치며 좋아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에너지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 공감에 대한 부분이지. 가사에 대한 공감이든 에너지에 대한 공감이든. 이 정도의 나이와 경력에서 우리가 세상에 공유할 수 있는 얘기들이 있다면, 그건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Q. 이 정도의 나이와 경력이라… 선배 뮤지션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나?
정한종 : 나는 조금 느낀다. 스무 살 초반에는 서른 살이 넘어가는 선배들을 보면서 ‘저 사람도 죽지 않고 음악하네’ 생각했다. 특히 록계에서 활동했던 친구들은 30대가 되면 사회에 찌든 기성세대가 될 거고 순수한 마인드의 전쟁을 하지 못할 거라고 배웠다. 그러면서 욕도 했다. 저 30~40대가 넘은 유명한 선배들은 왜 우리 후배들을 이끌만한 권력을 남겨주지 못하고, 오히려 밴드가 구석에 숨어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드는 걸까. 정말 많이 비판했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 40대 중반이 됐다. 어렸을 때의 기준으로는 할아버지가 된 거다. 지금도 만약 늦지 않았다면 그런(밴드가 사회로 나올 수 있는) 자리들을 만들어주고 싶다. 연작스타일의 앨범이 그들의 인생에 얼마큼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꾸만 흔적을 남기는 작업들을 하고, 내 또래의 뮤지션들 역시 밖으로 많이 나와서 여러 시도를 해준다면 지금보단 낫지 않을까 싶다.
김원준 : 형은 충분이 느낄 것 같다. 최고의 밴드인 시나위에 몸담고 있었으니까.
엄주혁 : 나는 사명감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진정성 있게 음악을 꾸준히 하는 것 자체를 후배들이 보고 좋아하는 거지. 후배들한테 뭘 남겨야 한다고 의식하면서 음악을 하지는 않는다.
김원준 : 주혁이 말에서 정답이 나왔다. 지속성. 우리가 꾸준히 이 행보를 이어가면 언젠가는 이게 하나의 우직함, 책임감을 통해 사명감이 되겠지.

Q. 사실 회사 입장에선 비용적으로 부담스러울 거다. 듣자하니, 회사에 삼고초려를 했다면서. 더욱이 요즘 정규앨범 내기가 정말 힘들지 않나.
정한종 : 우린 계속 정규로 하려고 한다.
김원준 : 사실 제작에 관련된 것 우리가 다 한다. 경영적인 측면까지도. 회사는 파트너쉽으로 가는 거고.
정한종 : 음악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게 뭘 그리 힘든 작업이겠나. 우리는 본질적인 걸 하는 거다. 시간을 투자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에너지를 투자하는 거지. 그렇게 많이 힘들진 않다.

Q. 앞으로의 활동은 아무래도 공연 위주로 진행되겠지?
정한종 : 공연이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부가 가치가 가장 높은 사업이기도 하고. 정말 작은 소극장 공연부터 꺼리지 않을 생각이다. 시나위할 때 이런 경험이 있었다. 공연을 하면 한 번에 스무 명 정도의 스태프가 움직였는데, 네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된 거다. 비가 엄청나게 많이 온 날이었지.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다가 관객과 스태프들 스물 네 명이서 취할 때까지 마시며, 잼하고 연주했다. 그 네 명이 굉장히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의 본질이 그런 것 같다. 공연은 살아있는, 유기적인 거라서 어떤 형태와 규모가 됐던 우리가 진심만 가지고 임한다면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Q. 마지막으로, 이 앨범을 듣는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정한종 : 아주 좋은 콘텐츠의 음악이 세상에 많이 있다. 건방진 얘기를 하자면 한국 음악도 우리가 어릴 때보다 퀄리티나 수준도 좋아지고 장르의 방향성이 다양해졌다. 직접 연주를 하는 밴드 음악은 건축의 기초공사만큼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밴드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 자극적인 즐거움은 덜할 수 있겠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으니, 그 부분은 기대해줬으면 좋겠다.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에프이엔터테인먼트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