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Q. 부끄러움을 타네. 의외다. 영화를 보고 굉장히 외향적일 줄 알았는데.
구교환: 나를 드러내는 것에 방어기제가 있다. 무리들 사이에 있을 때 조용한 편이다. 초면인 사람 앞에선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영화로 뭔가를 표출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Q. ‘오늘영화’는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인디트라이앵글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영화다. 지난해엔 <서울연애>를 통해 배우로 참여했는데, 올해엔 연출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의미가 남다르겠다.
구교환: 서독제 인디트라이앵글의 오랜 팬이다. ‘한번쯤 연출로 참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전과 달리 올해 인디트라이앵글은 서독제 상영 이력이 있는 감독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공모했다. 서류심사에 합격한 후 면접을 보러 갔는데 윤성호 감독님이 계시더라. 처음에는 면접관인 줄 알았다.(웃음) 윤 감독님이 서독제 심사위원도 했었고, 워낙 베테랑이시잖나. 면접 보러 온 걸 알고는 속으로 ‘반칙이야!’ 생각했었다.(웃음)
Q. 윤성호 감독에게 이런 속마음은 털어놨다.
구교환: 못 했지.(웃음) 윤성호 감독님의 오랜 팬이다. 결과적으로 오래 전부터 동경했던 분과 작업하게 돼서 가문의 영광이다. GV(관객과의 대화) 같은 자리에서 윤 감독님이 <연애다큐> 칭찬을 많이 해 주신다. 큰 힘이 된다. 옴니버스 영화의 내부적인 매력이라고 한다면, 참여한 감독들이 점점 애틋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Q. 애틋하기만 할까. 세 팀이라는 것 자체가 은근히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도 할 텐데. 다른 감독의 작품을 의식하진 않았나.
구교환: 난 오히려 (<연애다큐>를 공동연출한) 이옥섭 감독을 의식했다. 오래 전부터 이옥섭 감독과 작업을 함께 했지만, 공동연출은 처음이었다. 공동연출을 하면서 서로 싸우기에 바빴던 것 같다. 저랑 이옥섭 감독이 사실 ‘썸’ 타는 사이인데…
Q. 사귀는 사이라고 들었다.(웃음)
구교환: 공식적으로는 ‘썸’이다. 하하하. 왜 그런 말들 하지 않나. 결혼하기 전에 결혼할 상대와 둘만의 여행을 가보라고. 그럼 상대의 민낯이 더 잘 보인다고.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그 의미를 세삼 실감했다. 이옥섭 감독의 성향과 고집 등을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이 작품이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머뭇)됐으면 좋겠다!(일동 폭소)
Q. 거북이를 배설하는 남자라는 설정의 단편 ‘거북이들’(2011)부터 미장센단편영화제 <희극지왕> 왕좌에 오른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3) 등 당신의 작품들은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뭐랄까. 슬픈 상황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웃게 만들고, 웃게는 하는데 또 뭔가 애잔하게 만드는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구교환: 그걸 보여주기 위해 희극을 하는 것 같다. 내 작품 속 인물들을 돌아보니 모두 힘들어 하고 있더라. 결국 나는 나에게 응원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방법으로 가는 길에, “나 힘들어요!” 떼쓰긴 싫다. 그렇게 만들 자신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깜냥이 코미디인 것 같다.
구교환: 하하. 그런가. 나는 재미있는 영화가 좋다. 류승완 감독님의 ‘베테랑’도 롤러코스터 타는 느낌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또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같은 영화도 너무 좋다. 내가 평소 집에 누워있는 스타일인데,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고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다르덴 형제‘님’들 보다는 한창 밑이지만,(웃음) 그런 영화들을 만들고 싶다.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영화들 말이다.
Q. 포털사이트에 등록돼 있는 ‘배우 구교환’의 공식적인 첫 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아이들’(2008)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찾아봤는데 당신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뒤늦게 발견한 느낌이었다. 코미디에 최적화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더라. 우울한 감성의 연기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구교환: 그건 아마, 내 연출작에서 내가 연기하는 톤과 다른 감독님의 작업물에서 연기하는 자세가 달라서일 거다. ‘아이들’의 진욱(구교환)은 윤성현 감독이 디자인한 인물이다. 그 분이 디자인한 세계 안에서는 그 분이 원하는 인물 톤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연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괜히 내가 비집고 들어가서 소용돌이를 만들 필요는 것 같다. 실제로 윤성현 감독이 연기에 대한 제한을 많이 걸기도 했고.
Q. ‘아이들’도 그렇고, 이번 <연애다큐>도 그렇고. 배우로서도 가진 게 많은 느낌이다.
구교환: 하하. 많지는 않은데 좋아한다, 연기를.
Q. 연기가 지닌 어떤 면이 좋은 건가.
구교환: <연애다큐> 첫 대사에 나오는데, 내가 기록되고 싶은 욕심이 굉장히 많다. 어떤 시기의 나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건 모두의 욕구가 아닐까 싶다.
Q. 그러고 보니 <연애다큐>에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록해 줬으면 좋겠다”는 대사가 나온다.
구교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찍어주면 얼마나 예쁘겠나. 배우 최고의 연기도 감독과 연애했을 때 나오는 것처럼.(일동 폭소) 상대가 마음을 담아서 찍어주는 거니까 최고가 나올 수밖에.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2014)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Q. 아버님께서 방배동에서 30년째 사진관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사진도 기록하는 매체이지 않나. 아버지 영향으로 영화보다 사진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구교환: 이유는 간단하다. 동영상 시대니까.(웃음) 집에 사진앨범이 많긴 하다. 내 증명사진도 연대기처럼 있다. 아버님이 찍어주신. 감히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웃음)
Q. 하하하. ‘8월의 크리스마스’(1999)를 남다르게 봤겠다.
구교환: 너무 낭만적인 영화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웃음) 심지어 내가 다림(심은하)과 비슷한 주차단속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는데, 심은하(같은 사람)는 없었다. 한석규(같은 사람)도 없었고. 하하.
Q. 당신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과거의 작품을 돌아보면 어떤가.
구교환: 안 본다. 하하. 그런데 ‘웰컴 투 마이 홈’은 예외다.
Q. 아! 개인적으로 당신 작품 중 ‘웰컴 투 마이 홈’을 가장 좋아한다. 보면서 배꼽 빼는 줄 알았다.
구교환: 나 역시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일단 음악이 좋다. 그리고 ‘웰컴 투 마이 홈’의 경우 친한 친구들과 셋이서 색보정 테스트용으로 찍은 작품이다. 정해진 것 없이, 순간의 아이디어로 낄낄거리며 찍었다. 연기할 사람도 가위바위보를 통해 정했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내가 출연한 거다. 우연한 순간들이 모여서 즐겁게 만들어진 영화. 이게 내가 지양하는 영화에 대한 자세인 것 같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아이디어가 용솟음 치고, 즐거움이 반짝이는 영화.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마 그런 자유스러움이 느껴져서이지 않을까 싶다.
Q. 서울예대 영화과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연출엔 어떻게 발 담그게 된 건가.
구교환: 연극과가 따로 있다는 걸 간과했다.(웃음) 연기를 매일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들어가 보니 연기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고, 나머지는 ‘영화제작실습’ ‘촬영과 기초’ 같은 기술적인 수업이 많더라. 그래서 처음엔 영화과를 선택한 것에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그런데 과제를 하다 보니, 이게 또 재밌더라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연기와 달리 연출은 잘 만들든 못 만들든 온전히 내 것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Q. 첫 연출작은 학교 과제였겠다.
구교환: 맞다. 첫 작품 때 이상한 걸 찍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영화처럼 만들어서 과제를 냈는데, 의도했던 것 보다 교수님이 좋게 봐 주셨다. 순수예술을 하는 아이인 줄 알고 극찬해 주시더라고. 힘이 났다. 두 번째로 찍은 단편은 ‘키스’라고, 들어볼 텐가. 여자랑 남자가 막 싸운다. 남자가 연락이 잘 안 되는 여자에게 “어제 뭐 했어? 왜 전화 안 받았어” 추궁한다. 지지부진한 싸움에 지친 여자가 “됐어!” 이별을 고하고 떠나려 한다. 그런 여자를 남자가 잡으니까, 여자가 남자의 팔을 깨문다. 그렇게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홀로 남아 아파하다가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뒤쫓기 시작한다. 추격자처럼. 겨우겨우 여자를 찾는데 성공. 여자를 보자마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서 팔을 깨문다. 그게 그들만의 ‘키스’였는데, 영화제에는 못 가더라고.(웃음)
Q. 재밌다. 당시의 심리 상태가 아마도….
구교환: 복수! 하하. 당시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복수심이 불탔나보다.
Q. 시나리오를 쓸 때 어디에서 출발하는 편인가. 어떤 이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던데.
구교환: 슬픈 농담. 친구들과 나눴던 슬픔 농담들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도 그 경우다.
Q. 그런데 진짜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잘 안 주는 건가. 당신의 경우부터 들어보자. 출연배우들에게는 나눠 줬나?
구교환: 나 역시 못 준 영화들이 많다. 감독들이 DVD를 잘 안 주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하다. 더 좋은 화질로 뽑기 위해서인 분도 있고, DVD 보다 파일로 주는 걸 선호하는 분도 있다. 내 경우엔 ‘이거 하나로 나를 판단하지 말라’는 게 좀 강하다. 조심스러운 거다. 혹시 DVD 하나로 모든 게 판단 될까봐. 생각보다 사람들은 기회를 많이 안 주지 않나. 장편 준비하는 감독들이 선배들에게 자주 듣는 말도 그거다. “잘 생각해서 준비하라”고. “영화 한 편 잘못 찍으면 10년을 쉴 수 있다”고.
Q. 프로필에 ‘영화를 찍기도 하고 찍히기도 한다’고 본인을 소개했더라. 찍힐 때와 찍을 때의 구교환은 다른가.
구교환: 다른 것 같다. 일단 배우로서의 나는 아직 알려진 게 많이 없다. 그러다보니, 스태프들 앞에서 첫 컷이 들어갔을 때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게 있다. 연출할 때는 약간 우길 수가 있거든 “저, 편집 잘 해요!” 하면서.(웃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마냥 뻥을 칠 수 있지만 연기는 온전히 현장에서 나를 증명해야 하는 거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스태프들이 나를 신뢰하고 좋아해줘야 그 씬이 잘 나오니까. 그게, 참 어렵다.
Q. 공감한다. 어쩌면 스태프가 첫 관객인 셈이니까. 배우 유아인 역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스태프 앞에 처음 섰을 때라고 하더라. 관객보다 스태프에게 먼저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구교환: 유아인 씨는 잘 알려지기라도 했지, 내 경우엔 “쟤, 뭐야?” 하기 딱 좋다.(웃음) 오래전 일이다. 모 붐마이크 기사님이 오시더니 목소리를 더 크게 해 달라고 했다. 원래의 내 연기 발성이 있고 지향하는 연기 톤이 있는데, 남들과 비슷한 걸 요구하셔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연기든 뭐든 도식화 되는 걸 지양한다. 어떻게든 비켜가려고 애쓰는 편이다. 연기란, 익숙한 것들을 피해가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거든. 결국 나를 증명해 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 그런 단계에 있다.
Q. 영화에서도 느낀 거지만, 목소리가 굉장히 독특하다.
구교환: 콤플렉스였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가 와서 “너 귀여운 척 하려고 목소리 그렇게 내는 거지?” 하더라. 이름도 기억한다. 김O화!(일동 웃음) 그때 트라우마가 됐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내 목소리로 연기를 안 할 정도였다.
Q. 지금은 어떤가. 장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구교환: 매력이었으면 좋겠다. ‘디시인사이드 영화갤’에 어떤 분이 글을 남기셨다. “구교환, 목소리랑 얼굴이랑 달라서 졸라 깸. 그런데 그게 구교환의 매력임!”(일동 웃음) 말이 과격하긴 해도 결국은 나를 지지해 주시는 거잖나. 뭔가 이상하고 병신 같은 목소리지만, 그 병신 같은 게 나는 좋다.
Q. 10년 후, 연기와 연출 중 어떤 것에 더 힘을 쏟고 있을지 궁금하다.
구교환: 이상적인 모습은, 200억 짜리 영화를 내가 찍는데 그 영화에 10억 받고 배우로 출연하는 거다.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어디까지나 꿈이니까! Q. ‘찍히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은가.
구교환: 이옥섭 감독님.(웃음) 이옥섭의 작품을 지지하는 팬이다. 그녀는 프로 같다. 나보다 더 많은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 같고. <연애다큐> 이후 다시 각자의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직 나에게 콜을 안 하네.
Q. 굉장히 잘 맞는 것 같다. 그런 동료를 옆에 두고 있다는 건 행운이다.
구교환: 잘 맞는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나중에 영화사를 차리면 이름을 뭘로 할까 이야기 하곤 한다. 일단 ‘HD’는 넣기로 했다. 요즘은 필름으로 영화를 안 찍으니까. 문제는 ‘구교환 HD’로 하느냐 ‘이옥섭 HD’로 하느냐인데, 계속 그걸로 싸우는 중이다.
Q. 확실히 ‘썸’ 이상으로 보인다.
구교환: 으하하하하.
Q 정서 이야기를 했는데, 구교환의 정서는 뭐라고 생각하나.
구교환: 나의 정서라. 단점일 수도 있는데 우연성에 기대는 면이 좀 있다. 왜 ‘쎄뻑’이 좋다고 하지 않나.
Q. ‘쎄뻑?’(알아보니, ‘행운’이라는 뜻의 은어였다.)
구교환: 단점일 수도 있는데, 그때그때 튀어나오는 현장성이 좋은 편이다. 확 망하기 좋은 스타일이지만, 위력을 발휘할 때는 또 엄청나다. 하하하.
Q. 당신의 ‘쎄뻑’을 응원하며 지켜보겠다. 그나저나 인터뷰 초반에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 같다는 말은 취소다.(웃음) 이토록 유쾌하다니.
구교환: 그러게. 나, 지금 입이 막 풀렸다. 하하하.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오늘영화’ 스틸
서울독립영화제 프로젝트 ‘오늘영화’는 윤성호 감독의 <백역사>, 강경태 감독의 <뇌물>, 구교환·이옥섭 감독의 <연애다큐>등 3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다. 처음 ‘오늘영화’를 눈여겨 본 이유는, (오랜만에 영화를 들고 나온) 윤성호 감독 때문이었다. 윤성호 감독의 연출작 <백역사>는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의외의 복병이 있었으니, 세 번째에 자리한 <연애다큐>였다. <연애다큐>가 머금은 재기발랄함과 패기와 신선함에 홀딱 반해서, 감독 겸 배우인 구교환의 이전 작품들을 탐색했다. 그리곤 구교환이라는 감독/배우가 지닌 재능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아마, 구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이들이 많을 게다. 하지만 상관없다. 머지않아 충무로에서 자주 거론될 인물일 테니 말이다. 그땐 당신도 구교환에 반하게 될 것이다.# 구교환을 설명할 방법? 작품만큼 확실하게 그의 매력을 증명해 줄 건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인터뷰에 관심이 있다면 그의 단편 영화 ‘웰컴 투 마이 홈’부터 보고 가자. 구교환이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Q. 부끄러움을 타네. 의외다. 영화를 보고 굉장히 외향적일 줄 알았는데.
구교환: 나를 드러내는 것에 방어기제가 있다. 무리들 사이에 있을 때 조용한 편이다. 초면인 사람 앞에선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영화로 뭔가를 표출하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Q. ‘오늘영화’는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인디트라이앵글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영화다. 지난해엔 <서울연애>를 통해 배우로 참여했는데, 올해엔 연출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의미가 남다르겠다.
구교환: 서독제 인디트라이앵글의 오랜 팬이다. ‘한번쯤 연출로 참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전과 달리 올해 인디트라이앵글은 서독제 상영 이력이 있는 감독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공모했다. 서류심사에 합격한 후 면접을 보러 갔는데 윤성호 감독님이 계시더라. 처음에는 면접관인 줄 알았다.(웃음) 윤 감독님이 서독제 심사위원도 했었고, 워낙 베테랑이시잖나. 면접 보러 온 걸 알고는 속으로 ‘반칙이야!’ 생각했었다.(웃음)
Q. 윤성호 감독에게 이런 속마음은 털어놨다.
구교환: 못 했지.(웃음) 윤성호 감독님의 오랜 팬이다. 결과적으로 오래 전부터 동경했던 분과 작업하게 돼서 가문의 영광이다. GV(관객과의 대화) 같은 자리에서 윤 감독님이 <연애다큐> 칭찬을 많이 해 주신다. 큰 힘이 된다. 옴니버스 영화의 내부적인 매력이라고 한다면, 참여한 감독들이 점점 애틋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Q. 애틋하기만 할까. 세 팀이라는 것 자체가 은근히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도 할 텐데. 다른 감독의 작품을 의식하진 않았나.
구교환: 난 오히려 (<연애다큐>를 공동연출한) 이옥섭 감독을 의식했다. 오래 전부터 이옥섭 감독과 작업을 함께 했지만, 공동연출은 처음이었다. 공동연출을 하면서 서로 싸우기에 바빴던 것 같다. 저랑 이옥섭 감독이 사실 ‘썸’ 타는 사이인데…
Q. 사귀는 사이라고 들었다.(웃음)
구교환: 공식적으로는 ‘썸’이다. 하하하. 왜 그런 말들 하지 않나. 결혼하기 전에 결혼할 상대와 둘만의 여행을 가보라고. 그럼 상대의 민낯이 더 잘 보인다고.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그 의미를 세삼 실감했다. 이옥섭 감독의 성향과 고집 등을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이 작품이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머뭇)됐으면 좋겠다!(일동 폭소)
Q. 거북이를 배설하는 남자라는 설정의 단편 ‘거북이들’(2011)부터 미장센단편영화제 <희극지왕> 왕좌에 오른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3) 등 당신의 작품들은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뭐랄까. 슬픈 상황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웃게 만들고, 웃게는 하는데 또 뭔가 애잔하게 만드는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구교환: 그걸 보여주기 위해 희극을 하는 것 같다. 내 작품 속 인물들을 돌아보니 모두 힘들어 하고 있더라. 결국 나는 나에게 응원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방법으로 가는 길에, “나 힘들어요!” 떼쓰긴 싫다. 그렇게 만들 자신도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깜냥이 코미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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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코미디가 사실 가장 어려운 거다.구교환: 하하. 그런가. 나는 재미있는 영화가 좋다. 류승완 감독님의 ‘베테랑’도 롤러코스터 타는 느낌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또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같은 영화도 너무 좋다. 내가 평소 집에 누워있는 스타일인데,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고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다르덴 형제‘님’들 보다는 한창 밑이지만,(웃음) 그런 영화들을 만들고 싶다.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영화들 말이다.
Q. 포털사이트에 등록돼 있는 ‘배우 구교환’의 공식적인 첫 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아이들’(2008)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찾아봤는데 당신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뒤늦게 발견한 느낌이었다. 코미디에 최적화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더라. 우울한 감성의 연기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구교환: 그건 아마, 내 연출작에서 내가 연기하는 톤과 다른 감독님의 작업물에서 연기하는 자세가 달라서일 거다. ‘아이들’의 진욱(구교환)은 윤성현 감독이 디자인한 인물이다. 그 분이 디자인한 세계 안에서는 그 분이 원하는 인물 톤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연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괜히 내가 비집고 들어가서 소용돌이를 만들 필요는 것 같다. 실제로 윤성현 감독이 연기에 대한 제한을 많이 걸기도 했고.
Q. ‘아이들’도 그렇고, 이번 <연애다큐>도 그렇고. 배우로서도 가진 게 많은 느낌이다.
구교환: 하하. 많지는 않은데 좋아한다, 연기를.
Q. 연기가 지닌 어떤 면이 좋은 건가.
구교환: <연애다큐> 첫 대사에 나오는데, 내가 기록되고 싶은 욕심이 굉장히 많다. 어떤 시기의 나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건 모두의 욕구가 아닐까 싶다.
Q. 그러고 보니 <연애다큐>에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록해 줬으면 좋겠다”는 대사가 나온다.
구교환: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찍어주면 얼마나 예쁘겠나. 배우 최고의 연기도 감독과 연애했을 때 나오는 것처럼.(일동 폭소) 상대가 마음을 담아서 찍어주는 거니까 최고가 나올 수밖에.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2014)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Q. 아버님께서 방배동에서 30년째 사진관을 운영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사진도 기록하는 매체이지 않나. 아버지 영향으로 영화보다 사진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구교환: 이유는 간단하다. 동영상 시대니까.(웃음) 집에 사진앨범이 많긴 하다. 내 증명사진도 연대기처럼 있다. 아버님이 찍어주신. 감히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웃음)
Q. 하하하. ‘8월의 크리스마스’(1999)를 남다르게 봤겠다.
구교환: 너무 낭만적인 영화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웃음) 심지어 내가 다림(심은하)과 비슷한 주차단속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했는데, 심은하(같은 사람)는 없었다. 한석규(같은 사람)도 없었고. 하하.
Q. 당신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과거의 작품을 돌아보면 어떤가.
구교환: 안 본다. 하하. 그런데 ‘웰컴 투 마이 홈’은 예외다.
Q. 아! 개인적으로 당신 작품 중 ‘웰컴 투 마이 홈’을 가장 좋아한다. 보면서 배꼽 빼는 줄 알았다.
구교환: 나 역시 가장 아끼는 작품이다. 일단 음악이 좋다. 그리고 ‘웰컴 투 마이 홈’의 경우 친한 친구들과 셋이서 색보정 테스트용으로 찍은 작품이다. 정해진 것 없이, 순간의 아이디어로 낄낄거리며 찍었다. 연기할 사람도 가위바위보를 통해 정했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내가 출연한 거다. 우연한 순간들이 모여서 즐겁게 만들어진 영화. 이게 내가 지양하는 영화에 대한 자세인 것 같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아이디어가 용솟음 치고, 즐거움이 반짝이는 영화.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마 그런 자유스러움이 느껴져서이지 않을까 싶다.
Q. 서울예대 영화과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연출엔 어떻게 발 담그게 된 건가.
구교환: 연극과가 따로 있다는 걸 간과했다.(웃음) 연기를 매일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들어가 보니 연기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이고, 나머지는 ‘영화제작실습’ ‘촬영과 기초’ 같은 기술적인 수업이 많더라. 그래서 처음엔 영화과를 선택한 것에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그런데 과제를 하다 보니, 이게 또 재밌더라고.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연기와 달리 연출은 잘 만들든 못 만들든 온전히 내 것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Q. 첫 연출작은 학교 과제였겠다.
구교환: 맞다. 첫 작품 때 이상한 걸 찍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영화처럼 만들어서 과제를 냈는데, 의도했던 것 보다 교수님이 좋게 봐 주셨다. 순수예술을 하는 아이인 줄 알고 극찬해 주시더라고. 힘이 났다. 두 번째로 찍은 단편은 ‘키스’라고, 들어볼 텐가. 여자랑 남자가 막 싸운다. 남자가 연락이 잘 안 되는 여자에게 “어제 뭐 했어? 왜 전화 안 받았어” 추궁한다. 지지부진한 싸움에 지친 여자가 “됐어!” 이별을 고하고 떠나려 한다. 그런 여자를 남자가 잡으니까, 여자가 남자의 팔을 깨문다. 그렇게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홀로 남아 아파하다가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뒤쫓기 시작한다. 추격자처럼. 겨우겨우 여자를 찾는데 성공. 여자를 보자마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서 팔을 깨문다. 그게 그들만의 ‘키스’였는데, 영화제에는 못 가더라고.(웃음)
Q. 재밌다. 당시의 심리 상태가 아마도….
구교환: 복수! 하하. 당시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복수심이 불탔나보다.
Q. 시나리오를 쓸 때 어디에서 출발하는 편인가. 어떤 이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하던데.
구교환: 슬픈 농담. 친구들과 나눴던 슬픔 농담들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도 그 경우다.
Q. 그런데 진짜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잘 안 주는 건가. 당신의 경우부터 들어보자. 출연배우들에게는 나눠 줬나?
구교환: 나 역시 못 준 영화들이 많다. 감독들이 DVD를 잘 안 주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하다. 더 좋은 화질로 뽑기 위해서인 분도 있고, DVD 보다 파일로 주는 걸 선호하는 분도 있다. 내 경우엔 ‘이거 하나로 나를 판단하지 말라’는 게 좀 강하다. 조심스러운 거다. 혹시 DVD 하나로 모든 게 판단 될까봐. 생각보다 사람들은 기회를 많이 안 주지 않나. 장편 준비하는 감독들이 선배들에게 자주 듣는 말도 그거다. “잘 생각해서 준비하라”고. “영화 한 편 잘못 찍으면 10년을 쉴 수 있다”고.
Q. 프로필에 ‘영화를 찍기도 하고 찍히기도 한다’고 본인을 소개했더라. 찍힐 때와 찍을 때의 구교환은 다른가.
구교환: 다른 것 같다. 일단 배우로서의 나는 아직 알려진 게 많이 없다. 그러다보니, 스태프들 앞에서 첫 컷이 들어갔을 때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게 있다. 연출할 때는 약간 우길 수가 있거든 “저, 편집 잘 해요!” 하면서.(웃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마냥 뻥을 칠 수 있지만 연기는 온전히 현장에서 나를 증명해야 하는 거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스태프들이 나를 신뢰하고 좋아해줘야 그 씬이 잘 나오니까. 그게, 참 어렵다.
Q. 공감한다. 어쩌면 스태프가 첫 관객인 셈이니까. 배우 유아인 역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스태프 앞에 처음 섰을 때라고 하더라. 관객보다 스태프에게 먼저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구교환: 유아인 씨는 잘 알려지기라도 했지, 내 경우엔 “쟤, 뭐야?” 하기 딱 좋다.(웃음) 오래전 일이다. 모 붐마이크 기사님이 오시더니 목소리를 더 크게 해 달라고 했다. 원래의 내 연기 발성이 있고 지향하는 연기 톤이 있는데, 남들과 비슷한 걸 요구하셔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연기든 뭐든 도식화 되는 걸 지양한다. 어떻게든 비켜가려고 애쓰는 편이다. 연기란, 익숙한 것들을 피해가는 싸움이라고 생각하거든. 결국 나를 증명해 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 그런 단계에 있다.
Q. 영화에서도 느낀 거지만, 목소리가 굉장히 독특하다.
구교환: 콤플렉스였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가 와서 “너 귀여운 척 하려고 목소리 그렇게 내는 거지?” 하더라. 이름도 기억한다. 김O화!(일동 웃음) 그때 트라우마가 됐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내 목소리로 연기를 안 할 정도였다.
Q. 지금은 어떤가. 장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구교환: 매력이었으면 좋겠다. ‘디시인사이드 영화갤’에 어떤 분이 글을 남기셨다. “구교환, 목소리랑 얼굴이랑 달라서 졸라 깸. 그런데 그게 구교환의 매력임!”(일동 웃음) 말이 과격하긴 해도 결국은 나를 지지해 주시는 거잖나. 뭔가 이상하고 병신 같은 목소리지만, 그 병신 같은 게 나는 좋다.
Q. 10년 후, 연기와 연출 중 어떤 것에 더 힘을 쏟고 있을지 궁금하다.
구교환: 이상적인 모습은, 200억 짜리 영화를 내가 찍는데 그 영화에 10억 받고 배우로 출연하는 거다.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어디까지나 꿈이니까! Q. ‘찍히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은가.
구교환: 이옥섭 감독님.(웃음) 이옥섭의 작품을 지지하는 팬이다. 그녀는 프로 같다. 나보다 더 많은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 같고. <연애다큐> 이후 다시 각자의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중이다. 그런데 아직 나에게 콜을 안 하네.
Q. 굉장히 잘 맞는 것 같다. 그런 동료를 옆에 두고 있다는 건 행운이다.
구교환: 잘 맞는다. 우리끼리 농담으로 나중에 영화사를 차리면 이름을 뭘로 할까 이야기 하곤 한다. 일단 ‘HD’는 넣기로 했다. 요즘은 필름으로 영화를 안 찍으니까. 문제는 ‘구교환 HD’로 하느냐 ‘이옥섭 HD’로 하느냐인데, 계속 그걸로 싸우는 중이다.
Q. 확실히 ‘썸’ 이상으로 보인다.
구교환: 으하하하하.
Q 정서 이야기를 했는데, 구교환의 정서는 뭐라고 생각하나.
구교환: 나의 정서라. 단점일 수도 있는데 우연성에 기대는 면이 좀 있다. 왜 ‘쎄뻑’이 좋다고 하지 않나.
Q. ‘쎄뻑?’(알아보니, ‘행운’이라는 뜻의 은어였다.)
구교환: 단점일 수도 있는데, 그때그때 튀어나오는 현장성이 좋은 편이다. 확 망하기 좋은 스타일이지만, 위력을 발휘할 때는 또 엄청나다. 하하하.
Q. 당신의 ‘쎄뻑’을 응원하며 지켜보겠다. 그나저나 인터뷰 초반에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 같다는 말은 취소다.(웃음) 이토록 유쾌하다니.
구교환: 그러게. 나, 지금 입이 막 풀렸다. 하하하.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오늘영화’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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