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
이수(한효주)는 5일 전, 브래드 피트를 닮은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4일 전에는 50대 아저씨와 여행을 갔다. 3일 전에는 열일곱 ‘고딩’과 사랑을 속삭였고, 2일 전에는 또래의 남자와 키스를, 오늘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여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낄낄거리고 있다. 이수는 말로만 듣던 문어발 연애의 고수? 믿기 힘들겠지만 브래드 피트를 닮은 남자도, 50대 아저씨도, 열일곱 ‘고딩’도, 또래의 남자도, 일본어를 하는 여자도 모두 ‘같은 사람’이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이상한 마법(?)에 걸린 우진(유연석 포함 21명)이라는 이름의 남자. 이수와 우진은 그들에게 닥친 운명에 저항하기보다는 끌어안으며 사랑하는 중이다.
# 이수는 ‘권태’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울까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봤다. 미안하지만 영화를 보고 와 닿은 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내면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내세운 영화가 미남 배우들에게만 중요한 러브씬을 허락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 사랑을 둘러싼 시간의 분절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얼굴이 매일 바뀌는 사람을 만나는 이수를 보면서 그녀의 사랑은 ‘권태’라는 우물에 빠지지 않을까라는 다소 뜬금없는 상상을 한 것이다.
719일. 최근 미국 코넬대 연구소가 발표한 사랑의 유효기간이란다. 굳이 연구 결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아무리 반짝반짝 빛나던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일상 속에서 조금씩 부식된다는 것을. 마법의 시간을 통과하면 ‘권태’라는 녀석이 찾아온다는 것을.
권태(倦怠).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그렇다면 궁금하다. 우리가 상대에게 질리는 건 그 사람의 얼굴일까, 습성일까, 버릇일까, 내면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권태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게 ‘일상의 반복’이다. 매일매일 비슷한 만남과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 빠지기 쉬운 게 권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의 사랑은 다르다. 그녀가 사랑하는 우진은 매일 매일 다른 얼굴로 나타나고, 여자로 변하기도 하며, 때론 지구 반대편 나라의 언어를 쓰고, 꼬부랑 노인이 돼서 눈이 침침하다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녀의 사랑엔 반복이 없다. 날마다 새로울 뿐. 추측컨대, 권태의 감정에서 이수는 남들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문제는 남는다. 사랑은 열정이나 설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계의 초반엔 서로에게 얼마나 뜨거운가가 중요하지만, 뜨거웠던 두 사람의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면 결국 ‘인간적 신뢰’가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하지만 이수는 권태에는 강할지언정, 우진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면에서는 취약하게 노출 돼 있다. 실제로 그녀는 우진과의 연애를 가족들에게 털어놓지도, 우진을 동료들에게 떳떳이 소개시켜주지도, 날마다 다른 우진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는다.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닮은 사랑
어쩌면 이들 사랑의 진짜 위험요소는 우진의 얼굴이 매일 바뀌는 게 아닐지 모른다. 그건 우진이 시간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시간과 함께 늙어 가는 것. 너무나 당연한 숙명 앞에서 우진은 예외다. 반면 이수의 시간은 자연의 법칙대로 흐른다. 두 사람의 시간은 자주 엇갈린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떠오르는 이유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데이비드 핀처가 매만진 ‘벤자민 버튼…’에는 점점 어려지는 남자 벤자민(브래드 피트)과 늙어가는 여자 데이시(케이트 블란쳇)가 등장한다. 나이 그래프 곡선이 아래로 하강하는 남자와 상승하는 여자가 서로에게 열정적일 수 있었던 시간은 그래프가 만나 접점을 이루는 그 즈음이었다. 크지 않은 낙차 안에서 그들은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래프는 역전됐다. 어느 날, 등에 검버섯이 나고 피부 탄력을 잃은 데이시는 뽀얀 광채를 내뿜으며 침대에 잠들어 있는 벤자민을 보며 알 수 없는 인생의 환멸을 느낀다. 어쩌면, 이수는 데이시가 겪은 감정을 느끼며 자주 울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극장을 나서며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적 상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 사랑 힘겹겠다, 생각한 것은.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영화 스틸
# 이수는 ‘권태’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울까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봤다. 미안하지만 영화를 보고 와 닿은 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내면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내세운 영화가 미남 배우들에게만 중요한 러브씬을 허락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 사랑을 둘러싼 시간의 분절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얼굴이 매일 바뀌는 사람을 만나는 이수를 보면서 그녀의 사랑은 ‘권태’라는 우물에 빠지지 않을까라는 다소 뜬금없는 상상을 한 것이다.
719일. 최근 미국 코넬대 연구소가 발표한 사랑의 유효기간이란다. 굳이 연구 결과를 들먹이지 않아도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아무리 반짝반짝 빛나던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일상 속에서 조금씩 부식된다는 것을. 마법의 시간을 통과하면 ‘권태’라는 녀석이 찾아온다는 것을.
권태(倦怠). 사전적 의미로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그렇다면 궁금하다. 우리가 상대에게 질리는 건 그 사람의 얼굴일까, 습성일까, 버릇일까, 내면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 권태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게 ‘일상의 반복’이다. 매일매일 비슷한 만남과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 빠지기 쉬운 게 권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수의 사랑은 다르다. 그녀가 사랑하는 우진은 매일 매일 다른 얼굴로 나타나고, 여자로 변하기도 하며, 때론 지구 반대편 나라의 언어를 쓰고, 꼬부랑 노인이 돼서 눈이 침침하다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녀의 사랑엔 반복이 없다. 날마다 새로울 뿐. 추측컨대, 권태의 감정에서 이수는 남들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문제는 남는다. 사랑은 열정이나 설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계의 초반엔 서로에게 얼마나 뜨거운가가 중요하지만, 뜨거웠던 두 사람의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면 결국 ‘인간적 신뢰’가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하지만 이수는 권태에는 강할지언정, 우진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면에서는 취약하게 노출 돼 있다. 실제로 그녀는 우진과의 연애를 가족들에게 털어놓지도, 우진을 동료들에게 떳떳이 소개시켜주지도, 날마다 다른 우진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는다.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닮은 사랑
어쩌면 이들 사랑의 진짜 위험요소는 우진의 얼굴이 매일 바뀌는 게 아닐지 모른다. 그건 우진이 시간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시간과 함께 늙어 가는 것. 너무나 당연한 숙명 앞에서 우진은 예외다. 반면 이수의 시간은 자연의 법칙대로 흐른다. 두 사람의 시간은 자주 엇갈린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떠오르는 이유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데이비드 핀처가 매만진 ‘벤자민 버튼…’에는 점점 어려지는 남자 벤자민(브래드 피트)과 늙어가는 여자 데이시(케이트 블란쳇)가 등장한다. 나이 그래프 곡선이 아래로 하강하는 남자와 상승하는 여자가 서로에게 열정적일 수 있었던 시간은 그래프가 만나 접점을 이루는 그 즈음이었다. 크지 않은 낙차 안에서 그들은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래프는 역전됐다. 어느 날, 등에 검버섯이 나고 피부 탄력을 잃은 데이시는 뽀얀 광채를 내뿜으며 침대에 잠들어 있는 벤자민을 보며 알 수 없는 인생의 환멸을 느낀다. 어쩌면, 이수는 데이시가 겪은 감정을 느끼며 자주 울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다. 극장을 나서며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적 상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 사랑 힘겹겠다, 생각한 것은.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영화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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