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1)
김고은(1)
[텐아시아=정시우 기자]‘은교’의 신비로운 소녀가 깊게 각인돼서 그럴까. 김고은을 생각하면 늘 싱그러운 여름 화초가 떠올랐다. 뭔가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여릴 것 같은, 예민할 것 같은 ‘느낌 혹은 선입견’이 그녀에게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만난 김고은은 영화로 따지자면 반전드라마 같은 인물이었다. ‘으흐흐흐’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말간 얼굴 속에 김고은은 두둑한 배짱을 품고 있었다. 새로움과 파격이라면 뭐든 환영하겠다는 씩씩함, 남들이 내딛지 않은 길을 기꺼이 걸어가겠다는 대담함. 타인의 시선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단단함. 상상 이상으로 강하고, 거침없고,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김고은. 이제껏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다.

Q.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의 홍이(김고은)를 보면서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이 살짝 떠올랐어요. 어머니(전도연/김혜수)와의 대치상황도 그렇고, 복수의 대상도 그렇고. 마침 고은 씨의 아역을 두 작품 모두에서 김수안 양이 연기 했더라고요.
김고은: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협녀’ 촬영이 끝나고 ‘차이나타운’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구조적으로 ‘협녀’와 비슷하다고 느꼈죠. 그런데 더 깊게 파고들어가다 보니, 인물들의 다른 감정이 확실히 보이더라고요. ‘차이나타운’의 일영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반면 ‘협녀’의 홍이는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파악했죠.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옳다고 믿기에 행하는 아이.

Q. ‘대의’라는 건 개인의 ‘복수 ’보다 큰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대의를 몸에 두른 홍이를 관객들에게 설득하는데 적지 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고은: 인물들의 감정을 큼지막하게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는 신념이라는 게 인생을 좌우하는 부분이잖아요? 홍이가 월소(전도연)의 신념이 이해했다고 해석했어요. 월소가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이고 살아 온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했기에, 그녀가 원하는 걸 대신 행했다고 생각했죠.

Q. ‘협녀’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중국 무협의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어요. 전도연 이병헌 같은 걸출한 (한국)배우가 하늘을 막 날아다니고, 물 위를 걷는 게 국내 관객들에겐 생소한 부분이 있을 거예요. 반면 중국에서 자란 고은 씨에겐 굉장히 익숙한 그림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김고은: 맞아요.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무협은 저에게 굉장히 친근한 장르예요. 무협이 낯설다는 반응이 저에겐 오히려 문화 충격이었죠.(웃음) 정말 많은 무협을 보며 자랐어요. 좋아하는 무협영화요? 너무 많은데, 설명할 길이 없네요. 한국어로 어떻게 해석해서 소개해야 할지… ‘동방불패’ ‘동사서독’ ‘와호장룡’ 같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것들로 예를 들 수밖에 없겠네요. 무협은 전개가 굉장히 쿨하고 시크해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죠.

Q. ‘뻥’의 세계죠.
김고은: 네. 맞아요. 그게 무협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무협에서 경공(몸을 날리는 무공)은 기본이에요. 장르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어요.
김고은(2)
김고은(2)
Q. 무협은 ‘신념’이 좌우하는 세계라고 했는데, 현 시대는 어떤 것 같나요?
김고은: 그 시대에는 한번 세운 신념이 쉽게 바뀌지 않았어요. 바뀌면 안 되는 거였고요. 월소가 힘들어 했던 것도 신념을 저버렸다는 죄의식 때문이었죠. 그에 반해 현대사회는 신념이라기보다는 생각, 가치관, 우선순위, 태도…이런 것들이 매일매일 바뀌는 것 같아요. 옳다고 생각했다가도 내일 바뀌는 게 오늘날의 세계죠. 어쩌면 당연한 거라고 봐요. 성장하면서 변하는 게 인간인 것 같아요.

Q. 그렇다면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배우 김고은’과 지금의 ‘배우 김고은’의 가치관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김고은: 똑같아요! 제가 유일하게 고집하는 부분이 딱 하나, 바로 연기예요. 다른 것들은 진짜 많이 바뀌거든요? 이성관도 바뀌고, 생각도 자주 바뀌어요. 그런데 연기만큼은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이나 지금의 마음이나 같아요. 그건, 일부러라도 놓치지 않고 가려고 해요.

Q. 경험치가 늘어나면 시각도 변하기 쉽잖아요? 조금 더 커진 영화 현장을 겪다보면 연기에 대한 여러 생각이 들 것 같은데요.
김고운: 그래서 작품을 선택할 때, 저만의 기준이 있어요. ‘깊게 생각하지 말자!’ 깊게 생각했다면 ‘협녀’와 ‘차이나타운’을 연달아 못했을 거예요. ‘깊게 생각하지 말자’라는 건, ‘깊게 생각한다고 해서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인 것도 있어요.

Q. 굉장히 큰 깨달음인데요? 어떤 부분에서 그런 걸 느꼈나요.
김고은: 영화라는 게 혼자서 하는 작업이 아니잖아요. 모두가 함께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어디 하나가 빠그라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영화죠. 후반 작업을 통해 시나리오와 완전히 다르게 나올 수 있는 게 또 영화고요. 한마디로 너무나 많은 변수들이 있어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변할 수 있는.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만 딱 봐요. 이야기를 보고, 좋다 싶으면 바로 “할래요!”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Q. 지금의 김고은은 결과보다 동기가 더 중요한 것 같네요.
김고은: 네. 아직까지는.
김고은(3)
김고은(3)
Q 액션을 90% 직접 소화했다고 들었어요.
김고은: 90%가 아니라, 95%! 5%가 굉장히 중요합니다.(일동 웃음)

Q 정정할게요. 95%(웃음). 원래 액션을 직접 소화하기로 하고 작품에 들어간 건가요? 아니면 하다 보니 욕심이?
김고은: 제가 좀 과소 평가받는 경향이 있어요. 액션을 굉장히 못할 것처럼 생겼나 봐요. 마냥 연약할 것 같고. 신재명 무술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이었는데, 저를 쓱 보시더니 박흥식 감독님에게 “(심드렁하게) 쟤가 뭘 하겠어요?” 이러지 뭐예요. 거기에 핀트가 ‘탁!’ 상해서 이를 악물고 액션에 임했어요.(웃음) 소화를 다 해 낸 거죠. 그랬더니 신 감독님 눈이 휘둥그래지시면서 갑자기 대역을 거의 안 쓸 것처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말미쯤에는 “대역이 거의 없을 거다!” 했고요.

Q. ‘대역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땠어요?
김고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웃음)

Q 만약 신 감독님이 “쟤가 뭘 하겠어요?”라고 한 걸 몰랐다면, 액션 소화 비중이 달랐을까요?
김고은: 달랐겠죠. 으흐흐흐.

Q 결국 어떤 말(言)이 당신을 도발한 셈인데, 악바리 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김고은: 말씀 드렸듯이 제가 유일하게 욕심을 내는 게 연기에요.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저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가 액션스쿨을 많이 거쳤어요. ‘몬스터’ 때 트리플A, ‘협녀’ 때 베스트, ‘차이나타운’에선 서울액션스쿨에서 액션을 배웠어요. 그런데 신재명 감독님처럼 시키는 분은 없었어요. 오죽하면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니까요. ‘내가 배우야 무술인이야?’ 이랬어요. 하하하. 신 감독님은 심지어 “배우 그만 두고 와라. 무술만 해도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농담을 하셨어요. ‘협녀’에서 강하게 한 덕분에 ‘차이나타운’ 때는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와이어에 매달리는 것도 제가 직접 하겠다고 막 그랬어요. “기왕 하는 거, 제가 할게요!” 이러면서.(웃음)
김고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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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역시 사람은 강하게 커야 하나 봐요.(웃음)
김고은: 네. 저는 제가 강하게 커 나가는 게 좋아요. 으흐흐흐흐.

Q. 경쟁에서 지는 거, 싫어하나요?
김고은: 아니요. 경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연기에 있어서는 더욱 더요. 연기를 잘 하는 것엔 기준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보는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다르니까요. 다만 ‘특별한 사람은 왜 특별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요. 그 외에는 크게 개의치 않아요.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다는 것도 없고요. 그런 생각 자체를 배제하고 가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그냥 내가 욕심이 나니까 열심히 하는 것일 뿐.

Q 그 욕심의 근원은 뭘까요. 거기에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 않을까요?
김고은: 인정받고 싶다라…음…그런 건 진짜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랄까. 아! ‘후회하고 싶지 않다’라는 게 맞겠네요. ‘은교’라는 작품에 들어갈 때 이 영화가 가장 망할 것을 생각하고 참여했어요. ‘망했을 때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각오하고 현장에 간 거죠.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야 훗날 혹평을 듣거나 ‘못했어’라는 평가를 받아도 그게 상처가 되거나 인정이 안 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적어도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Q. 정말 처음부터 강한 것들과 싸웠네요.(웃음)
김고은: 네. 저는 정말 처음부터 강하게 컸어요. 그래서 뭐! 다! 다 괜찮아요!! 흐흐흐흐.

Q. 영화라는 게 관객들의 평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김고은: 그냥 제 방식인 것 같아요. 저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는 방법이랄까.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생각하면 부담이 느껴질 테고, 또 잘 하고 싶으니까 마음이 더 조급해지고 불안해질 거예요. 실제로 많은 배우들이 힘들어하는 지점이고요. 그런데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컨트롤을 할 수 있어요. 별로 욕심이 안 생겨요.
김고은(4)
김고은(4)
Q. 평소 대담하다는 얘기, 듣지 않아요?
김고은: 가끔, 들어요.(웃음) 다들 저를 너무 소녀로 보시는 것 같아요.

Q. 그러니까요. 저 역시, 만나기 전까지는…미안해요, 오해해서.(웃음) 대화를 하다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좋은 의미에서요. 뭐랄까. 생각도 상당히 트인 것 같고. 보통의 여배우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엿보이는데, 자란 환경의 영향도 있을까요?
김고은: 환경의 영향도 없지는 않은 거예요. 한국에 돌아오고, 처음엔 너무 힘들었어요. 한국 사람들 특유의…‘돌려 말하기’라고 하나요? 저는 상대가 한 말 그대로 이해했는데, 거기엔 숨은 뜻들이 있더라고요. 가령 “나 공부 하나도 못 했어”라고 하는데 실상은 다른, 그런 거…(일동 웃음) 시험 문제 한개 틀렸다고 펑펑 울고. 처음엔 그런 것들에 대한 배신감이 장난 아니었어요. 알고 봤더니 한국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시스템이더라고요. 중국은 모두가 함께 학교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성적표를 학교 벽에다가 붙여요. 성적이 잘 나오면 1반이었다가 떨어지면 7반으로 쫓겨나고 그래요. 학교 내에서 치열할 수밖에 없어요. 자존심 싸움인 거죠. 반면 한국은 너무 편해요. 처음에 왔을 때 “와, 우리나라 되게 ‘프리’하다. ‘널널’하다” 그랬어요. 그런데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았죠.(웃음)

Q. ‘돌려 말하기’가 유독 강한 곳이 엔터테인먼트업계일 거예요. 그런 세계에 들어와 있는 셈인데요.
김고은: 쉽지는 않죠. 사회생활, 처음엔 참 힘들었어요. 초반엔 ‘돌려 말하기’를 안 해서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또 하나 적응이 안 됐던 건, 나이가 어리면 어린 것에 대한 처세가 달라야 한다는 거.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요. 물론 버릇없이 하지는 않죠. 다만 제 생각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Q. 데뷔작 ‘은교’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은교’에서의 김고은은 굉장히 신비롭고 임팩트 강했죠. 그래서 우려하기도 했어요. ‘과연 이 배우가 은교 이미지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굳이 은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김고은은 김고은 자체로 사랑받고 있어요.
김고은: 감사해요. 그렇게 느끼신다면, 아까 말했듯이 제가 별로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웃음)

Q. 진짜 신경 쓰지 않았어요? ‘은교’로 청룡 신인상을 받고 펑펑 우는 걸 보고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생각했었거든요.
김고은: 그 울음은 가족에 대한 거였어요. ‘은교’는 나를 위한 선택이었어요. 배우가 되고 싶었던 나를 위한 거였죠. 저로 인해 가족들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았는데, 다들 묵묵히 버텨줬어요. 티도 안 내고. 오히려 적극적이셨어요. 작품에 대한 여러 조언을 해 주셨죠. 그런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눈물로 표출됐던 것 같아요.
김고은(6)
김고은(6)
Q. 최근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출연을 확정했어요. 김고은을 이야기할 때 자주 호출되는 게 ‘미지의 배우’ ‘잡히지 않는 분위기의 배우’ 같은 것들이에요. ‘치즈인더트랩’ 출연으로 대중과 더 가까워지는 반면, 장점일 수도 있는 신비한 이미지는 벗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고은: 그렇죠. 대중과 가까이… 제가 가장 어려워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웃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아시다시피 20대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영화가 많이 없잖아요? 이 시기에만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더 늦게 전에 표현하고 싶었어요. ‘치즈인더트랩’을 선택한 욕심은 딱 그거 하나에요. ‘은교’를 보면 요새도 드는 생각이 ‘딱 저 때였으니까 가능했구나. 정말 운이 좋았다. 지금은 절대 못할 것 같다’예요. 연기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왜 그 시기에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지금 제가 지니고 있는 느낌들도 1-2년이 지나면 없어지겠죠. 그걸 놓치지 않고 작품에 담아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Q.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불편한가요?
김고은: 불편하다기보다는, 낯설죠. 차츰 적응해 가고 있어요. 저는 뭐랄까. 오그라다는 걸 조금 싫어해요. 대중의 사랑…(?)

Q. ‘대중의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오그라들죠?(웃음)
김고은: 하하하. 맞아요. 더 많이 알려지고 인지도가 쌓이면 대중들이 제게 어떤 기대를 하게 될 거 아니에요. 작품 속 이미지로 저를 바라볼 테고요. 그런 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Q. 그건 김고은의 욕심일 수 있어요.
김고은: 알아요, 욕심인 거. 그래도 조금 관대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웃음)

Q. 그나저나, 이전 출연작들을 종종 꺼내서 보나 봐요.
김고은: 그게, 아까 말한 신념과 같은 거예요. 그 당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가를 확인하는 거예요.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해요.

Q. 먼 훗날, ‘협녀’나 ‘차이나타운’ 등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김고은: 지금과 똑같아요.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기자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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