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지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내뱉었다. 이병헌 이야기다.
24일 롯데시네마 건대 입구에서는 박흥식 감독과 배우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이 참석한 가운데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취재진들로 붐볐다. 이병헌이 이른바 ‘50억원 협박사건’ 논란에 휘말린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식행사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병헌이 과연 논란에 대한 심경을 밝힐까에 이목이 집중되는 시간. 이병헌은 정면 돌파로 그러한 궁금증을 빨리 차단했다. 이병헌은 본격적인 제작보고회에 앞서 무대 위에 올라 논란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영화 ‘황야의 7인’ 촬영으로 인해 길게 기른 수염이 상황과 맞물려 절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홀로 무대에 오른 이병헌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어떤 말씀을 드려야할까 미국에서 촬영하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함께 영화 작업했던 많은 스태프, 관계자분들께 죄송함을 전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그 어떤 비난도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내 책임이다. 나 때문에 그분들의 노고가 가려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이병헌은 “오늘 감독님과 배우들, 영화 관계자분들께도 내가 혹시나 불편함을 드리지 않을까 죄송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배우 이병헌으로서 살 수 있었던 건 여러분의 관심 덕분이다. 큰 실망감을 드리고 뉘우침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함의 가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또 “큰 실망감이 몇 번의 사과, 시간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늘 죄송한 마음 가지고 잊지 않고 많은 분께 드린 상처와 실망감 갚아나가기 위해 노력하겠다. 다시 한 번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한 후 허리를 깊이 숙였다.
3분가량 이어진 사과의 자리가 이병헌에게는 3시간 같지 않았을까.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이병헌은 시종일관 진지했고,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내 마음의 풍금’(1999)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전도연에 대해 “그때보다 목소리도 커지고 이런저런 요구사항이 많아졌지만 여배우로서 순수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을 뿐, 평소 입담 좋기로 소문난 이병헌 특유의 유머는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이병헌에 대해 사회자 박경림이 “이병헌 씨가 말을 할 때마다 다큐멘터리 같은 분이기가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병헌은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개봉이 1년 넘게 미뤄지면서 ‘협녀’가 본의 아니게 ‘암살’ ‘미션 임파서블’ ‘베테랑’ 등 막강한 경쟁자를 만나게 된 상황에 대해 이병헌은 “나 때문”이라며 미안함을 전했다. 이병헌은 “이 모든 건 아무래도 나의 영향이 가장 크다. 원래 좀 더 일찍 개봉을 예정했는데 여러 가지 분위기와 상황 때문에 이제 여러분들 앞에 선보이게 됐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먼저 배우나 감독님 관계자 분들께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어 “영화를 개봉하고 홍보를 하고 배급을 하는 쪽에서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점이라는 생각으로 선택을 한 것 같다. 좋은 영화들이 나오고 있지만 다른 영화들은 시대극이-현대극이고 우리 영화는 무협 사극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영화들을 관객이 선택할 수 있게 됐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재미있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협녀’는 박흥식 감독이 2004년 ‘인어공주’ 촬영 때 처음으로 구상한 이야기다. 무려 11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투자를 받기까지의 오랜 기다림, 이병헌 사건으로 인한 개봉일 연기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협녀’가 ‘도둑들’ ‘베테랑’ ‘미션 임파서블’ 등 쟁쟁한 영화들이 즐비한 여름 시장에서 어떤 결과물을 낼지,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정시우 siwoorain@
사진. 팽현준 pang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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