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화려한 외모의 한 여인이 있다. 큰 눈과 오뚝한 코, 조막만한 얼굴. 게다가 눈 꼬리를 강조한 진한 화장에 높은 하이힐까지 신었다. 이 여인이 입을 열었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믿음을 보낼까?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화려함을 진심의 반대말쯤으로 생각하곤 한다. 당신이 이 같은 과오를 피해 이 여인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눈을 감고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라. 가수 박지윤의 얘기다. (물론 그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최근 ‘미스틱 오픈런’ 공연장에서 만난 박지윤은 여전히 예쁘고 화려했다. 하지만 기타와 함께 이어진 그의 노래는, 수줍으면서도 더없이 솔직했다. 지난 해 7월 싱글앨범 ‘유후(YOO HOO)’를 발표한 이후 무대에 선 것은 약 1년 만. 박지윤은 이날 “최근 앨범작업을 하고 있다. 9~10월 발매를 목표로 준비 중이다”고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요즘에는 9집 앨범에 정신을 다 쏟고 있어요. 곡도 직접 많이 썼고 프로듀싱도 제가 하고 있죠. 전반적으로 7,8집의 느낌을 이어갈 것 같습니다. 발라드도 있고 어쿠스틱한 음악도 있는데 좀 더 화려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진이나 디자인 작업도 직접 하려고 하고 영상 작업도 생각 중이에요. 여행을 다녀오면서 틈틈이 찍어둔 것들이 있거든요.” 2000년대 초반, 박지윤은 ‘성인식’ ‘할줄 알어’ 등을 히트시키며 국내 최고 섹시 여가수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섹시 이미지는 그에게 비수가 됐다. 온갖 악성루머가 나돌았고 박지윤은 얼마 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지난 2009년, 박지윤은 독립레이블을 만들고 자신의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 하며 새로운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제 외모가 화려한 편이어서 그런지, 외부 프로듀서들도 앨범도 비슷한 방향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성인식’처럼 섹시한 콘셉트로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음악이 제 성격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앨범 프로듀싱에 나섰을 때에는 제 안에 있는 박지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발매된 7, 8집 앨범에는 평단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이대로 박지윤의 향후 행보가 결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미스틱89로 이적해 새로운 프로듀서를 만났다. 박지윤은 소속사 수장 윤종신을 비롯해 포스티노, 프라이머리, 신재평 등 다양한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네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전작에서 보여준 포크나 모던 록은 사라졌고 댄스곡이 빈 자리를 메웠다. ‘미스터 리(Mr.Lee)’ ‘빕(Beep)’ 등을 부르며 춤도 다시 추기 시작했다.
“회사에 10년 만에 들어온 거예요. 당시에는 7, 8집을 이어간다는 생각보다는 프로듀서한테 맡긴다는 마음으로 들어온 거였어요. 그래서 이후의 음악들은 온전히 맡겼죠.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분명하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보는 박지윤과 내가 원하는 방향이 서로 융합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색깔이 애매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아예 프로듀싱을 받거나 내가 원하는 걸 하거나, 둘 중 하나로 가기로 했어요. 물론 음악적인 방향이나 콘셉트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지만 프로듀싱을 받은 덕분에, 좀 더 편안하게 작업을 했습니다. 퍼포머로서, 가수로서 집중해서 작업했죠.” 매 계절 발매됐던 네 장의 싱글앨범은 당초 하나의 EP 앨범으로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지윤은 “한 곡 씩 모아서 앨범을 내는 게, 나와는 맞지 않는다”며 계획을 틀었다. 대신 그는 다시 한 번 프로듀서로 나서며 자신의 앨범을 진두지휘했다. 8집 ‘나무가 되는 꿈’ 이후 3년 만이다. 경험은 더욱 늘었고 고민도 쌓였다. 그리고 그만큼 박지윤의 눈빛도 깊어졌다.
“제가 어린나이가 아니다 보니 경험할 것들은 이미 다 경험을 해봤어요. 아무래도 소비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생기더군요. 삼십대 중반의 가수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깊은 고민을 했어요. 결국 ‘내 음악을 더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정규 앨범을 낸지 워낙 오래 돼서, 음악을 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르기도 했고요. 감사하게도 종신 오빠가 받아들여주셔서 작업을 진행하게 됐어요. 저번 앨범에 호평을 많이 해주셔서 부담도 됐지만, 제가 하던 음악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기쁨이 더 크더군요.”
어느덧 22년 차. 윤종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영삼 대통령 때” 데뷔했다. 아이돌에서 시작해 싱어송라이터에 이르기까지, 박지윤은 긴 시간만큼이나 스펙터클한 행보를 보였다. 10년 후에도 공연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그에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런 자취를 남긴 가수가 거의 없지 않느냐”고 응원을 건넸다. 시종 수줍은 미소를 띄던 박지윤에게 사뭇 비장한 표정이 머물렀다. 화려한 그의 외모에는, 세월이 남긴 강단이 더해졌다.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게 있어요. 박지윤이라는 가수가 10대 아이돌로 데뷔해,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또 제 회사도 차려서 직접 앨범 프로듀싱을 하기도 했잖아요. 그러다가 색 다른 피디를 만나서 앨범을 내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니 그런 궤적을 걸었던 선배가 없더군요.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비슷한 동료·선배 가수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고민스러울 때, ‘나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굳게 지키기도 했어요. 요즘 아이돌 중에서도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을 거예요. 제가 좋은 선배로서,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네요.”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미스틱89
우리는 때로 화려함을 진심의 반대말쯤으로 생각하곤 한다. 당신이 이 같은 과오를 피해 이 여인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눈을 감고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여라. 가수 박지윤의 얘기다. (물론 그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최근 ‘미스틱 오픈런’ 공연장에서 만난 박지윤은 여전히 예쁘고 화려했다. 하지만 기타와 함께 이어진 그의 노래는, 수줍으면서도 더없이 솔직했다. 지난 해 7월 싱글앨범 ‘유후(YOO HOO)’를 발표한 이후 무대에 선 것은 약 1년 만. 박지윤은 이날 “최근 앨범작업을 하고 있다. 9~10월 발매를 목표로 준비 중이다”고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요즘에는 9집 앨범에 정신을 다 쏟고 있어요. 곡도 직접 많이 썼고 프로듀싱도 제가 하고 있죠. 전반적으로 7,8집의 느낌을 이어갈 것 같습니다. 발라드도 있고 어쿠스틱한 음악도 있는데 좀 더 화려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진이나 디자인 작업도 직접 하려고 하고 영상 작업도 생각 중이에요. 여행을 다녀오면서 틈틈이 찍어둔 것들이 있거든요.” 2000년대 초반, 박지윤은 ‘성인식’ ‘할줄 알어’ 등을 히트시키며 국내 최고 섹시 여가수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섹시 이미지는 그에게 비수가 됐다. 온갖 악성루머가 나돌았고 박지윤은 얼마 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지난 2009년, 박지윤은 독립레이블을 만들고 자신의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 하며 새로운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제 외모가 화려한 편이어서 그런지, 외부 프로듀서들도 앨범도 비슷한 방향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성인식’처럼 섹시한 콘셉트로요. 그런데 저는 그런 음악이 제 성격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앨범 프로듀싱에 나섰을 때에는 제 안에 있는 박지윤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발매된 7, 8집 앨범에는 평단의 호평이 줄을 이었다. 이대로 박지윤의 향후 행보가 결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미스틱89로 이적해 새로운 프로듀서를 만났다. 박지윤은 소속사 수장 윤종신을 비롯해 포스티노, 프라이머리, 신재평 등 다양한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네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전작에서 보여준 포크나 모던 록은 사라졌고 댄스곡이 빈 자리를 메웠다. ‘미스터 리(Mr.Lee)’ ‘빕(Beep)’ 등을 부르며 춤도 다시 추기 시작했다.
“회사에 10년 만에 들어온 거예요. 당시에는 7, 8집을 이어간다는 생각보다는 프로듀서한테 맡긴다는 마음으로 들어온 거였어요. 그래서 이후의 음악들은 온전히 맡겼죠.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분명하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보는 박지윤과 내가 원하는 방향이 서로 융합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색깔이 애매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아예 프로듀싱을 받거나 내가 원하는 걸 하거나, 둘 중 하나로 가기로 했어요. 물론 음악적인 방향이나 콘셉트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지만 프로듀싱을 받은 덕분에, 좀 더 편안하게 작업을 했습니다. 퍼포머로서, 가수로서 집중해서 작업했죠.” 매 계절 발매됐던 네 장의 싱글앨범은 당초 하나의 EP 앨범으로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지윤은 “한 곡 씩 모아서 앨범을 내는 게, 나와는 맞지 않는다”며 계획을 틀었다. 대신 그는 다시 한 번 프로듀서로 나서며 자신의 앨범을 진두지휘했다. 8집 ‘나무가 되는 꿈’ 이후 3년 만이다. 경험은 더욱 늘었고 고민도 쌓였다. 그리고 그만큼 박지윤의 눈빛도 깊어졌다.
“제가 어린나이가 아니다 보니 경험할 것들은 이미 다 경험을 해봤어요. 아무래도 소비된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생기더군요. 삼십대 중반의 가수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깊은 고민을 했어요. 결국 ‘내 음악을 더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정규 앨범을 낸지 워낙 오래 돼서, 음악을 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오르기도 했고요. 감사하게도 종신 오빠가 받아들여주셔서 작업을 진행하게 됐어요. 저번 앨범에 호평을 많이 해주셔서 부담도 됐지만, 제가 하던 음악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기쁨이 더 크더군요.”
어느덧 22년 차. 윤종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영삼 대통령 때” 데뷔했다. 아이돌에서 시작해 싱어송라이터에 이르기까지, 박지윤은 긴 시간만큼이나 스펙터클한 행보를 보였다. 10년 후에도 공연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그에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런 자취를 남긴 가수가 거의 없지 않느냐”고 응원을 건넸다. 시종 수줍은 미소를 띄던 박지윤에게 사뭇 비장한 표정이 머물렀다. 화려한 그의 외모에는, 세월이 남긴 강단이 더해졌다.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게 있어요. 박지윤이라는 가수가 10대 아이돌로 데뷔해,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또 제 회사도 차려서 직접 앨범 프로듀싱을 하기도 했잖아요. 그러다가 색 다른 피디를 만나서 앨범을 내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니 그런 궤적을 걸었던 선배가 없더군요.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비슷한 동료·선배 가수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고민스러울 때, ‘나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더 굳게 지키기도 했어요. 요즘 아이돌 중에서도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는 친구들이 많을 거예요. 제가 좋은 선배로서,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네요.”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미스틱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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