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나
[텐아시아=권석정 기자]김이나 작사가의 책 ‘김이나의 작사법’을 읽기 전에는 가사 속 상황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다. 가령, 수백 번 불렀을 ‘남행열차’ 속의 화자가 비오는 날 왜 열차에 탔는지, 그게 왜 호남선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반만 들었던 것이다.Q. 책을 내고 방송, 인터뷰를 많이 했더라. 가수 뒤에서 가사를 쓰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서서 하려니 기분이 색다를 것 같다.
김이나는 2003년 성시경의 ‘10월에 눈이 내리면’으로 데뷔해 현재까지 아이유의 ‘좋은 날’, 가인의 ‘피어나’ 등 300여 곡을 발표했다. ‘김이나의 작사법’은 ‘수학의 정석’과 같이 딱딱한 책은 아니다. 책에는 단어가 가슴을 통과해 노래가 되는 과정들, 즉 김이나가 ‘이불 차고 하이킥’을 하며 만든 속내 담긴 가사부터 가수에게 딱 맞춤형으로 빚어낸 프로페셔널한 작사노트들이 에세이와 함께 담겼다. 김이나 특유의 철학과 위트는 양념이다.
책을 통해 김이나가 가사를 써내려간 과정을 살피다보면, 노래라는 ‘나무’와 함께 음악산업이라는 ‘숲’이 보인다. 김이나는 자신이 가요계에 입문하게 된 시작점부터 일을 의뢰받고 처리하는 과정, 녹음실 현장의 분위기, 전문적인 영역인 A&R에 이르기까지 시스템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세세하고, 또 솔직담백하게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책은 단순히 가사에 대한 이론적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가사뿐만 아니라 책도 얄미울 정도로 잘 쓰는 김이나를 만났다.
김이나: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게 일종의 나를 파는 일 아닌가? 내가 만든 걸 파는 건 익숙한데, 지금은 나 자신을 어필하고 있다. 솔직히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배우는 게 많다.
Q. ‘김이나의 작사법’을 보면서 가사 이면의 상황에 대해 그다지 궁금해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가사는 ‘운율이 좋아. 잘 붙어. 내용이 좋아’ 정도까지만 생각했던 것 같다.
김이나: 사실 대중이 가사의 세세한 디테일까지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작사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음악을 덕후처럼 소비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내용들이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난 영화 한편이 꽂히면 메이킹 필름이나 감독의 전작들, 살아온 생애들을 다 찾아보는 편이다.
Q. 책 제목은 왜 ‘김이나의 작사법’으로 지었나?
김이나: 편집자가 가제로 붙인 제목이다. 난 처음에 턱없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고종석의 문장’이라는 책을 읽고 있긴 했는데 사실 그런 식의 제목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김이나의 작사법’이라는 제목이 맞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정통한 비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나름대로 깨우친 작사 방법, 즉 ‘난 가사를 쓸 때 이런 요령을 피웠다. 이런 작전을 세웠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수학의 정석’과 같이 모든 상황에 다 관통하는 룰은 아니다. 그저 내 비법을 말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서는 작사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Q. 책이 크게 작사법+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이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서 이런 철학으로 이런 가사를 썼구나’ 하는 것이 보인다.
김이나: 처음에는 에세이를 넣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다. 에세이는 글쓴이의 밑장까지 그대로 꺼내어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내 안에 그렇게 대단한 뭐가 없다. 그런 게 드러나는 것이 싫었나보다. 그런데 가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니 필연적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더라. 사실 가사를 쓴 과정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면 내가 세운 작전들, 노림수와 같은 비작가적으로 비쳐지는 모습을 다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일반인들이 작사가에 대해 갖고 있는 보편적인 모습, 가령 시인과 같이 고뇌하며 글을 쓰는 그런 모습과는 동떨어져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 난 그렇지 않거든. 책을 통해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하니 속이 편하더라. 이제 앞으로는 더 이상 어떤 ‘척’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Q. 약 10년 전부터 작사에 대한 책을 쓰겠다는 마음먹었다고?
김이나: 항상 허무맹랑한 상상을 한다. 고등학교 때에는 자미로콰이의 ‘버추얼 인새내티(Virtual Insanity)’가 정말 좋아서 내가 이 곡의 작곡가로서 연말 시상식에 상 받으러 가는 장면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10년 전이면 히트곡도 없었고 다섯 곡정도 냈을 때였다. 그때부터 언젠가는 작사로 책을 낼 만큼 많은 곡들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감히 그런 상상을 하다니. 하하!
Q. 판타지가 현실이 된 거다. 책을 보면 그런 김이나의 판타지적인 모습과 ‘몽상가가 되지 마라’고 현실적인 모습이 겹쳐진다.
김이나: 몽상가가 되지 말라고 한 것은 창작을 한답시고 몽상만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몽상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몽상은 터무니없이 없을수록 좋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터무니없는 몽상을 하는 정도가 줄어드니까.
Q. 가사는 키보드로 치나?
김이나: 펜으로 쓰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야 글이 나온다. 워드로 작업하지 않고 텍스트 파일로 쓴다. 워드로 하면 문법에서 어긋난 표현, 가령 이런저런 비유나 시적 허용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데 그런 게 내게는 방해가 된다. 이번 책도 텍스트 파일로 써서 넘겼다. 그래서 편집자가 고생 많이 하셨다.
Q. 김이나의 ‘히트법’으로도 읽힌다.
김이나: 히트를 하는데 필요한 작사 공식은 전혀 모른다. 대신 곡이 좋아야 히트를 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에 가사를 쓸 때 곡이 최대한 잘 들릴 수 있도록 한다. 문장 욕심보다는 멜로디 살리기에 치중하는 것이 훈련이 돼 있다. 곡의 히트는 작곡이 좌우한다. 곡이 별로인데 가사가 좋아서 히트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사가 안 좋아도 곡이 좋아 히트하는 경우는 수두룩하다. 청자를 홀리는 것은 멜로디다. 가사는 ‘롱런’을 시킬 수는 있다. 곡에 이미지를 주고, 가수와 팬의 유대 관계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Q. 첫 감상에 홀리는 역할을 작곡가가 해냈다면,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고 또 듣게 하는 역할은 작사가가 해내야 한다고 책에 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김이나: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등이 다 그런 가사들이다. 좋은 가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르게 들린다. 구창모의 ‘희나리’, 이문세의 ‘옛사랑’고 같은 곡들이 내게는 그렇다. ‘희나리’는 개인적으로 가장 ‘야마’ 있는 가사로 꼽는다. 한 줄, 한 줄이 다 사비다. 다른 노래였으면 사비에 쓰일만한 센 가사들이 자연스럽게 기승전결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다. Q. 책을 보면 김이나는 단지 가사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가수의 캐릭터 설정 및 스토리에도 깊이 관여한다.
김이나: 그건 남편 조영철 프로듀서의 영향이다. 사람들이 남편이 프로듀서라서 쉽게 작사가 데뷔한 줄 알 때 매우 억울하다. 사실 난 결혼 전에 이미 작사가였고, 그때 남편은 일반 직장인이었으니까. 그래서 남편 이야기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작사가로서 앨범 콘셉트 전반에 관여하게 된 것에는 남편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영철 프로듀서는 음반에 참여하는 스태프들이 자기 역할 이상의 무언가를 하게끔 유도한다. 가령 엔지니어에게 믹싱 외에 음악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한다. 그러면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사실 다른 프로듀서와 일하면 작사가가 가사 이상의 것에 관여하지 못한다. 우리의 시스템을 좋아하는 이들은 일부러 이런 식의 작업을 의뢰하기도 한다.
Q. 가인의 앨범 ‘하와’에는 작사가보다 큰 개념인 리릭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김이나: 조영철 프로듀서가 주문한 역할이다. 프로듀서들은 앨범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일관성으로 띠는 것을 선호한다. 싱글의 모임이 아닌 앨범으로서 가치를 갖기 위해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일반 가수의 경우 다양한 장르를 앨범에 넣다 보면 일관성을 갖기 힘들다. 리릭 프로듀서는 가사를 통해 일관성을 주는 것이다. 이로써 음악에 하나의 스토리 또는 세계관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가수와 팬덤을 더 밀접하게 엮어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Q. 가수의 캐릭터를 중요시하는 것 같다.
김이나: 가수와 노래의 싱크로율이 딱 맞았을 때의 쾌감이 대단하다. 비의 ‘아임 커밍(I’m Coming)’과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Q. 그런 멋있는 가사 말고 찌질한 게 어울리겠다고 생각해서 작심하고 쓴 가사 없나?
김이나: 난 찌질함이 매우 사랑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센 척하는 게 별로다. 찌질함까지는 아니고, 비참한 가사를 꼽자면 가인의 ‘돌이킬 수 없는’이다. 그건 작심하고 그렇게 만든 거다. 가인 같이 얼굴도 하얗고, 안 울 것 같은 아이가 흙 묻히고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내게 그런 변태적인 성향이? 그런데 가인이 비참해질 때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Q. 동의하는 부분이다.
김이나: 물론 가인이 잘 표현하기 때문에 시키는 것이다. 내가 뭘 보고 싶어 하는지 귀신 같이 알아맞힌다. Q. 책에서 아이유와 가인을 비교하는 부분이 재밌더라. 둘 다 ‘조영철-김이나-이민수’가 합작한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이렇게 팀으로 작업해서 그런지 아이유, 가인은 일정한 스토리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성장도 직관적으로 느껴지고.
김이나: 프로덕션 팀이 아무리 화려해도 터지고 안 터지고는 전적으로 가수의 몫이다. 우리가 황금알을 낳는 오리면 좋은데 가만히 보면 오리는 없고 황금알만 있는 것 같다. 아이유는 우리와 잘 맞아서 함께 전성기를 보냈지만, 그것은 아티스트가 훌륭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아이유나 가인이나 그들 자신이 스스로 완성한 부분이 크다.
Q. 아이유보다 가인을 더 막 다루는 것 같다.
김이나: 절대 막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가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아낌 없이 지원하는 편이다. 가인은 본인이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다. 이번에 ‘파라다이스 로스트’을 위해 현대무용을 배운다고 한 것도 본인이고, ‘피어나’에서 폴 댄스도 스스로 하겠다고 한 것이다. 가인은 현실감이 있다. 본인이 이효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뭔가를 노력하는 모습, 의외의 것을 해낼 때 사람들이 주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Q. 아이유 역시 김이나가 쓴 ‘좋은 날’ ‘너랑 나’ ‘분홍신’을 통해 점점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김이나: 아이유는 이제 본인이 가사를 잘 쓴다. ‘금요일에 만나요’ 가사 쓴 거 보고 ‘이제 혼자서도 잘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지은이는 남의 노래 가사도 잘 쓴다. 대단한 친구다.
Q. 여성의 오르가즘을 표현한 가인의 ‘피어나’는 기념비적인 가사라고 생각한다. 그 노래를 한동안 알람으로 썼다.
김이나: 기념비라니! 제주도 성박물관에 노래비 세워 달라! ‘피어나’가 단순히 첫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요즘도 사랑을 할 때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 그런 모습을 매력적이라 느끼지 못한다. ‘피어나’를 만들 때에는 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었다. Q. 책에는 녹음 현장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됐다. 특히 A&R을 설명하기 위해 이성수 SM엔터테인먼트 그룹장, 정병기 울림엔터테인먼트 이사 인터뷰까지 실은 것이 흥미로웠다. 김이나 본인도 YG엔터테인먼트에서 A&R로 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이나: A&R이 음악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국내에서 A&R이 가장 잘 갖춰진 곳이 SM이고, 또 A&R로서 가장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이가 정병기 본부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둘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책을 빌미로 인터뷰를 한 것이다. 내가 A&R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 누가 봐도 성공한 분들의 인터뷰를 담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이 인터뷰는 책에서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실무적인 부분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가사를 쓰는데 엄청난 차이를 주기 때문이다.
Q.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상업 작사가는 영화에 노래를 입히는 영화음악가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김이나: 맞다. 창작으로 하지만 스태프의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영화 음악의 경우 작곡가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드러내는 것보다 장면을 살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작사가도 곡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민수 작곡가의 경우 가이드를 줄 때 발음적인 면에서도 까다롭게 요구하는 편이다. 그런 발음에 맞추면서 말이 되게 쓰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결국 그렇게 해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Q. 책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작사법’을 빙자한 ‘사랑법’?
김이나: 결혼 전에 연애를 많이 한 편이다. 실패도 많이 해봤고 그래서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잘 아는 편이다. 연애의 매 순간에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모습인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런저런 조언으로 주변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적이 있다. 문자, 이메일 대필을 해준 적도 있다. 일차원적인 ‘밀당’ 수준이 아니라 더 고차원적인 방법 말이지. 그런 게 책에서 드러나는지는 몰랐다. 많이들 써먹으시라.
Q.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하며 후회한)을 가사로 쓴 일화들도 소개되고 있다. 요새도 그렇게 이불 차고 하이킥을 자주 하나?
김이나: 이제는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일들이 이렇게 돈벌이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Q. 자신을 미친 듯이 다 털어놓은 가사를 하나 꼽는다면?
김이나: 흠…. 타이틀곡은 아니고 수록곡인데 서지영의 ‘어느 멋진 날’이란 노래다. 이민수 작곡가와 처음 작업한 곡이다. 내게 실제로 있었던 일 ‘하늘 파란 청명한 날 차였던’ 일을 가사로 쓴 곡이다. 대낮에 비참하게 차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지양하게 됐다. 하지만 그때는 신인이었고, 다른 이야기는 잘 쓸 줄 몰랐던 때라 그런 가사가 나온 것 같다. 진짜 내 심정, 내 이야기가 그 노래 속에 있다.
권석정 moribe@
사진. 팽현준 pang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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