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문 대표, 김인수, 한경록(왼쪽부터)
[텐아시아=권석정 기자]올해는 인디 신이 탄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1995년 4월 5일 클럽 드럭에서 커트 코베인의 사망 1주기 추모공연이 열렸고, 이를 시작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이 홍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발화하기 시작한 인디 신의 음악들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움직임으로 자리하게 된다. 시장 규모의 측면이 아닌 앨범 수, 장르의 다양성 측면에서 봤을 때 지금의 인디 신은 가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봐도 허언은 아니다. 만약에 인디 신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한국 대중음악은 얼마나 편협하고, 또 초라할까?# 드럭, 문 열다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려면 과거를 알아야 하는 법. 인디 20주년을 맞아 지금은 사라진 라이브클럽 드럭을 설립했던 이석문 전 드럭레코드 대표와 드럭의 터줏대감이었던 크라잉넛의 한경록, 김인수를 함께 만났다. 이석문 대표는 인디 신을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갔고, 크라잉넛은 인디 신의 큰 형님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디 신의 발화점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왜 홍대였을까? 그때 그 놀이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Q. 주위에 이석문 대표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연극배우로 활동하신다고 들었다.
이석문: 근황은 도봉산 밑에 텃밭을 일구고 있다. 농번기가 지나면 연극을 한다. ‘아저씨와 아이들’이라는 밴드도 잠깐 했었다. 크라잉넛 애들은 1년에 한 두세 번씩은 본다. 공연 때 보고, 가끔 술 마시는 정도다.
Q. 1994년 7월에 드럭이 문을 열었다. 어떻게 문을 열게 됐나? 처음에는 음악 감상실이었다고 알고 있다. 왜 홍대였나?
이석문: 당시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가게를 열게 됐다. 특별히 홍대를 고집한 이유는 없었다. 친구가 홍대 근처 건물 1층에 로바다야끼를 얻었다고 해서 난 그 바로 밑 지하에 가게를 열게 된 것이다.
Q. 이름은 왜 드럭이라고 지었나?
이석문: 처음부터 드럭은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가게가 홍대 영화 동아리 애들의 아지트가 됐다. 그들과 술 마시고 놀다가 분위기를 뭔가 파격적으로 바꿔보자고 같이 아이디어를 짜내기 시작했다. 음악은 마약 같은 거니까 약국이 어떻겠냐고 해서 드럭스토어로 했다가 길어서 드럭으로 결정했다.
Q. 드럭 이후에 여러 클럽들이 생겨났다. 당시 함께 있던 곳이 스팽글, 프리버드, 블루데빌 등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석문: 드럭이 생기기 전에 와우교 건너편에 메탈 전문클럽 록월드가 있었다. 록월드는 시나위, 크래쉬 등의 메탈 밴드들이 주로 오르던 클럽이었다. 와우교 이쪽으로 드럭이 생기고 이후 스팽글, 재머스, 프리버드, 블루데빌 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들 음악 스타일이 조금씩 달랐다. # 첫 만남
Q. 1994년 말에 수능을 마친 크라잉넛 멤버들이 드럭에 놀러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는 록월드에 가려고 했는데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드럭에 갔다고?
한경록: 맞다. ‘핫뮤직’에 실린 클럽 광고를 보고 록월드에 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드럭을 발견했다. 그때는 상수역이 없었고, 드럭은 외진 곳에 있었다. 운명적으로 찾아간 거지 뭐. 클래쉬의 ‘런던 콜링(London Calling)’ 앨범재킷으로 된 드럭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펑크록 팬이었으니까 그게 반가웠다. 그때 공연했던 밴드가 성기완(3호선버터플라이), 권병준(고구마)가 함께 했던 ‘토마토’라는 밴드였다. 섹스 피스톨즈의 ‘아나키 인 더 유케이(Anarchy In The UK)’와 같은 곡들이었다. 그때는 그런 카피 곡이 매우 신선했다. 대학로, 종로의 음악감상실에서 헤비메탈, 하드록을 주로 틀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에게는 드럭이 딱 맞았다.
이석문: 그게 토마토의 대관공연이었을 거다.
Q. 간판은 왜 ‘런던 콜링’으로 하셨나?
이석문: ‘펑크’와 ‘파격’ 이 두가지가 조화된 것이 그 앨범재킷이었으니까.
Q. 크라잉넛이 록월드를 제대로 찾아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경록: 못 어울리지 않았을까?
이석문: 거기 애들은 키가 크거든. 메탈 하는 애들은 키가 커.
한경록: 키가 무슨 상관이에요?
김인수: 말구두 신어서 그렇지. 메탈 형들이 다 큰 건 아니었어.
Q. 이석문 대표는 크라잉넛을 처음 본 느낌이 어땠나?
이석문: 얘들 뭐지? 저 고삐리인지 중삐리인지 분간이 잘 안 갔다. 그런데 어린 애들이 음악을 알더라. 신기했다. 수능 끝났으니 드럭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대학교 들어간 다음에 오라고 했다.
크라잉넛
# 4월 5일Q. 인디 신의 시작을 1995년 4월 5일 클럽 드럭에서 커트 코베인의 사망 1주기 추모공연으로 본다. 이우성을 중심으로 한 ‘드럭 밴드’가 공연을 했다고.
이석문: 드럭의 첫 밴드라 할 수 있는 드럭 밴드의 첫 공연이었다. 드럭에 놀러오던 이우성, 황명수 등이 중심이 돼서 드럭 밴드가 결성됐는데, 둘이 나중에 코코어를 만든다. 그때는 계속 정기적으로 공연을 할 생각은 없었고 그냥 추모공연을 열어보자고 한 것이다. 그때 놀러온 크라잉넛 애들이 무대에 난입해서 난리가 났었다. 드럭 밴드가 공연 막판에 싸구려 기타와 앰프를 부수기 시작하니까 크라잉넛 애들도 같이 올라와서 부쉈다.
한경록: 우리는 그래야만 되는 줄만 알았다. 그때 드럭 한 귀퉁이에는 먹고 버린 캔맥주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거기로 다이빙하고 그랬다.
Q. 크라잉넛은 드럭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이석문: 커트 코베인 추모공연 이후에 드럭에서 여러 밴드들이 로테이션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이발관, 남상아가 있었던 멜포지션, 그리고 드럭밴드 이렇게 네 팀이 돌아가면서 공연했다. 그런데 드럭밴드 말고 다른 세 팀이 갑자기 안 오더라. 공연할 팀이 없어지자 크라잉넛 애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오디션 보러오라고 삐삐를 쳤다. 그게 1995년 7월경이었을 거다. 오디션을 보는데 그린데이, 너바나, 스매싱펌킨스 이런 곡을 하더라. 그때는 멤버들 포지션도 딱히 정해지지 않은 초짜들이었는데 딱 드럭 스타일이었다.
Q. 그렇게 역사가 시작됐군.
한경록: 드럭밴드와 우리가 번갈아 공연을 하다가 드럭밴드가 해체하고 나머지 멤버들이 버거킹(버거킹을 빨리 발음하면 ‘뻑킹’이 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란 팀을 했다. 버거킹이 나중에 코코어가 됐다.
이석문: 코코어 애들도 드럭에서 한창 공연했었는데 나중에 펑크록과는 음악이 안 맞는다고 스팽글로 갔다. 그때 모던록 밴드드리 스팽글에서 많이 공연했다.
한경록: 결국 우리만 남았다. 그래서 클럽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있다가 손님이 오면 바로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하곤 했다. 그러던 중에 빨간 머리의 사내가 드럭에 놀러왔다. 옐로우키친을 결성하게 되는 최수환이었다. 이후 드럭에 크라잉넛의 펑크록과 옐로우키친의 소닉유스 스타일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밴드가 함께 드럭의 첫 컴필레이션 앨범 ‘아워 네이션’을 내게 된다.
노브레인
# 펑크록Q. 크라잉넛과 옐로우키친 이후 노브레인, 위퍼, 레이지본, 자니로얄, 18크럭 등이 드럭에서 공연하고 앨범도 냈다. 주로 펑크록 밴드들이 모인 이유가 있나?
이석문: 우리가 펑크를 주제로 했으니까. 펑크록, 펑크 패션을 추구했다. 펑크 숍도 함께 운영했었다. 너바나, 그린데이를 기점으로 록의 조류가 바뀔 때였다.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거지.
한경록: 그때 마침 섹스 피스톨즈가 재결성하고 재조명을 받았었다. 그때 ‘네버마인드 더 볼라스 히어즈 더 섹스 피스톨즈(Never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도 한국에 라이선스로 발매됐다.
이석문: 그때 드럭밴드 멤버였던 임현종이라는 친구가 한국에서 못 구하는 펑크록 앨범들을 미국에서 가져와 드럭에서 틀었다. 김인수도 이런저런 앨범을 많이 가져왔다.
김인수: 1994년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그린데이 공연 영상이 인기가 많았다. 그린데이의 인기가 대단해서 1995년 초에 음악감상실에 가면 “‘바스켓 케이스(Basket Case)’는 1시간에 한 번만 틀어드립니다”라고 벽에 써 붙였을 정도였다. 이런 것들이 맞물리면서 펑크 붐이 온 것이다.
한경록: 우리가 드럭에 오기 전부터 인수 형은 드럭에서 DJ를 했었다. 가방에 CD를 40장 씩 가져와서 음악을 틀곤 했다. 형이 들려준 데드 케네디스와 같은 팀의 음악이 당시 우리에겐 충격이었다. 인수 형은 1997년경부터 우리와 함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Q. 1998년에 드럭에 처음 갔을 때 김인수가 크라잉넛 공연에서 희한한 퍼포먼스를 하는 걸 봤다. 좀 무서웠다. 그때 크라잉넛 보려고 전주에서 고속버스 타고 서울로 왔다.
이석문: 홍대 인디 신이 알려지면서 시골에서 상경해서 드럭으로 온 애들이 꽤 있었다. 대표적인 게 마산에서 온 불대가리 이성우(노브레인)였다. 성우가 드럭에서 먹고 잤는데 그게 소문이 나면서 시골에서 음악 하고 싶다는 아이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계들 집에 돌려보내느라 애먹었다.
Q. 이성우는 어떻게 드럭에 합류했나?
한경록: 이성우와는 합주실에서 만났다. 그때 이성우가 합주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빨간색 펑크머리에 시드 비셔스의 자물쇠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니 “뭐, 한마디로 달리는 펑크죠”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만나서 급격히 친해졌고 크라잉넛 공여에서 객원보컬로 서기 시작했다.
Q. 그때 차승우(전 노브레인)는 없었나?
이석문: 그때는 없었다. 서울대, 경희대, 건국대에서 ‘소란’이라는 기획공연을 열렸었는데 건대 공연에서 차승우가 하던 ‘크라이 베이비’의 공연을 봤다. 고등학생들로 이루어진 밴드였는데 그때 차승우는 이미 ‘천재 기타리스트’로 정평이 나 있었다. 어린 친구들이 지미 헨드릭스를 연주하고 실력이 좋았다. 차승우가 강남의 한 클럽에서 홍대 밴드들이 깽판 친 공연을 보고 드럭에 찾아왔다. 그때는 차승우 본인이 보컬을 하려 했는데 내가 이성우를 붙여줘서 크라잉넛의 라이벌이 되는 노브레인이 탄생하게 됐다.
Q. 차승우가 어떤 공연을 보고 찾아온 것인가?
김인수: ‘록 미 아마데우스’라고 압구정동 클럽에서 MTV 주최로 열린 행사였다. 홍대 밴드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공연을 했는데 거기서 일이 좀 생겼다.
이석문: MTV에서 홍대 밴드들을 방송에 나갈 기회를 준다고 말했는데 속으로는 딴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속셈을 알고 “야, 다 엎어버리자” 그래서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난리를 쳤다. 그때 밴드들만 간 것이 아니고 드럭 죽순이들이 함께 있었다. 우리가 무대를 다 뒤집어 놓는 걸 차승우가 본 거다. # 아워 네이션
Q. 크라잉넛과 옐로우키친의 노래를 반반씩 담은 ‘아워 네이션’ 1집은 배드 테이스트의 앨범과 함께 인디 1호 앨범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 앨범은 어떻게 기획을 하게 됐나?
이석문: 자연스럽게 때가 돼서 나온 앨범이다.
한경록: 자작곡이 많이 쌓였고, ‘스트리트 펑크쇼’ 등을 하면서 조금씩 붐이 일어나 앨범을 녹음하게 된 것이다. ‘스트리트 펑크쇼’를 통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한 번 올라갔으니 뭔가 기록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제작, 유통 이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때다. 시나위 (신)대철 형님의 퍼플 존 스튜디오에서 정말 저렴한 가격(200만원)으로 녹음했다.
김인수: 1996년에 사전심의가 철폐되면서 그 앨범의 녹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석문: 그래서 가사에 욕도 들어가고, ‘닥쳐’라는 말도 나왔으니까.
Q. 옐로우 키친과 크라잉넛은 음악이 달랐는데 둘을 묶은 이유는?
이석문: 크라잉넛이 펑크록이고 옐로우키친은 소닉유스 스타일인데 그게 크게 보면 다 펑크지 뭐.
한경록: 그 앨범이 테이프로 나왔는데 서로 B면을 하겠다고 싸웠다. 멋있어 보이려고 말이다. 크라잉넛이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A면에 들어갔다.
Q. A면 하겠다고 싸워야 하는 거 아닌가?
한경록: 그때는 무조건 B급이 멋진 거였다.
Q. ‘아워 네이션’은 제작뿐만 아니라 유통방식도 독립적이었는데, 그럼에도 꽤 팔렸다.
이석문: 일단 제작까지는 했는데 어떻게 팔까 고민을 했다. 당시 우리는 해외 인디 펑크록 밴드들의 사례를 알고 있었다. 그들처럼 해보자 해서 공연장 투어를 돌면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디’가 부각되면서 우리가 기삿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레미 레코드에서 유통을 맡기라고 하더라. 난 “야, 우리는 인디다. 도레미와는 안 해” 이랬다. 그러다 도매상에 직접 물건을 줬는데 중간에 사기를 당해서 돈을 못 받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물건을 빼와서 조그만 도매상 위주로 물건을 다시 풀었다. 그렇게 해서 만 장 정도 팔렸다.
Q. 앨범 제목은 왜 ‘아워 네이션’으로 했나?
한경록: 그때 다른 록밴드들은 우리 음악을 장난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연주를 못한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펑크록의 정체성을 욕하기도 했다. “너희들은 노동자 계급도 아니고 동부이촌동 살면서 프롤레타리아 코스프레 하냐?”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떡하나? 그래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부질없는 거였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있었고, 우리만의 펑크록이 있었던 거니까. 그래서 ‘아워 네이션’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만의 세계다! # 말달리자
Q. 라디오에서 ‘말달리자’ 처음 들었을 때 ‘닥쳐’라는 노랫말 때문에 깜짝 놀랐다. 내 귀를 의심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듣고 깜짝 놀랐다.
한경록: 이래도 되나 싶었다.
이석문: 내가 ‘말달리자’ 방송심의를 받으러 갔다. MBC, SBS는 심의가 바로 났다. KBS는 심의가 안 났는데 사실 그게 심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심의를 안 넣은 것이었다. 접수하는 곳에서부터 나를 업신여겨 보더라. 글씨가 틀려서 볼펜으로 찍찍 긋고 다시 쓰니까 접수창고에서 “이래서 윗 분들이 좋아하겠어요?”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씨발 안 해” 하고 나왔다.
한경록: 우리는 모두 “아저씨 잘 하셨어요”라고 했다.
Q. ‘말달리자’가 브라보콘 광고에 삽입되면서 히트곡이 됐다. 홍대 인디 신의 존재를 전국에 알린 첫 히트곡의 탄생이었다.
이석문: 그 광고 덕을 많이 봤지. 사실 광고에 음악 싣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인디 밴드이기 때문에 말들이 많았다. 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 유명해지면서 ‘음악캠프’ ‘수요예술무대’ 등에 나갔다. 하지만 골수팬들은 크라잉넛이 방송에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한경록: 섹스 피스톨즈도 방송에 나가서 유명해진 것인데….
이석문: 팬클럽은 자신들이 드럭에 다니면서 크라잉넛을 키워줬다고 생각했는데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이 언짢았을 거다. 내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Q. 팬클럽이 화가 난 것이군.
이석문: 팬들이 “이석문이가 크라잉넛 망쳐놓고 있다”고 난리를 쳤다. 당시 PC통신에 ‘아워네이션’이라는 크라잉넛 팬클럽이 있었다. 사실 내가 드럭에 자주 오는 애들 시켜서 팬클럽을 조직한 것이었다. 그런데 걔들이 똘똘 뭉쳐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한경록: 아저씨는 참 오래 사실 거예요.
Q. 그들의 모양새가 지금의 빅뱅, 엑소 팬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석문: 다 고등학생들이었으니까. 그 친구들은 H.O.T. 팬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우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행동은 비슷했지 뭐.
한경록: 어쨌든 고마운 팬들이었다.
Q. ‘말달리자’가 방송에 나가 팬들에게 욕을 먹었을지언정, 그 노래 때문에 전국적으로 인디 신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이석문: ‘말달리자’가 뜨고 나서 크라잉넛의 전국투어가 비로소 가능해졌다. 공연 기획자들이 붙기 시작했다.
한경록: 그때 전국의 클럽 공연장 환경이 정말 열악했다. 대구에서는 스모그가 없어서 대신 쑥을 태우기도 했다.
이석문: 그런 일화들이 모여서 나온 노래가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다. 공연을 많이 해서 연주 실력도 한층 성숙해졌다. ‘서커스 매직 유랑단’을 방송국 PD들이 듣더니 크라잉넛 음악 많이 발전했다고 반겼다.
한경록: 2집부터 아코디언도 들어가고 인수 형이 정식 멤버로 합류하게 됐다.
Q. 이석문 대표는 인디를 지향했지만, 결국은 주류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나?
이석문: 돈을 벌고 싶었다. 얘들도 이게 직업인데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닌가. 뮤지션으로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집 ‘하수연가’에서 ‘밤이 깊었네’가 또 히트를 치면서 욕을 엄청 먹었다. 특히 노브레인 팬들에게 욕 많이 먹었다.
Q. 노브레인은 드럭을 나가서 ‘문화사기단’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안티태제가 생기면서 음악도 다양해진 것 같다.
이석문: 문화사기단이 생겼고, 럭스 애들이 스컹크 레이블을 만들었다.
한경록: 그때 원종희가 드럭 오디션을 세 번 봤는데 모두 떨어져서 열 받아서 만든 것이 스컹크 레이블이었다.
이석문: 반항의 정서가 더 커진 것이다. 걔들은 펜진도 만들고 정말 외국의 인디 펑크 밴드처럼 활동했다. # 드럭에서 DGBD로
Q. 크라잉넛이 군대를 간 후 2003년 12월에 드럭은 블루 데빌과 합쳐져서 DGBD(Drug & Blue Devil)로 이름을 바꿨다. 운영난 때문인가?
이석문: 크라잉넛이 없으니 드럭이 돌아가질 못했다. 펑크록 밴드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블루데빌과 합치게 됐다.
한경록: 우리는 군대에서 드럭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드럭의 공간은 스컹크레이블에서 인수했다.
김인수: 지금은 그 터에 ‘머리에 꽃을’이라는 술집이 들어섰다.
Q. 이석문 대표는 2008년에 인디 신에서 은퇴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이석문: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물러설 때가 된 것이지.
Q. 인디 신이 20년을 맞이함과 동시에 크라잉넛도 결성 20년이 됐다.
이석문: 크라잉넛 아이들이 20년 갈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정말 대견스럽다.
한경록: 우리가 20년 동안 올 수 있었던 힘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뭔가를 계산하고 머리를 썼다면 이렇게 못 했을 거이다. 운도 좋았다. 사전심의도 철폐되고 클럽도 합법화되고 그런 움직임과 함께 왔다.
이석문: IMF 덕도 봤던 것 같다. 경제는 어려워지는데 오히려 밴드는 잘 됐다. 섹스피스톨즈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Q. 인디는 뭘까?
이석문: ‘과정’이고 또 ‘발판’이지 않을까? 너바나도 인디로 시작해서 슈퍼스타가 됐다. 우리나라도 인디 신을 발판 삼아 메이저 기획사로 가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우리 때에는 인디에 머물면서 인기를 얻는 것이 멋진 거라고 여겼지만 말이다.
김인수: 그냥 ‘여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디라서 위대할 것도 없고, 이것을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인디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씩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옛날부터 쭉 있어온 움직임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80년대에 봤던 언더그라운드의 메탈 형들처럼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형들이 했던 것을 보고 듣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렇게 밴드를 할 수 없었을 거다. ‘언더그라운드’, 또는 ‘인디’라고 하는 용어 자체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권석정 기자 moribe@
사진. 팽현준 pang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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