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첫 정치에 입문했을 때, 국회의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300명 중에 150명이 내 편이어야 자신이 발의한 법안이 통과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 ‘연구실 안전법’을 처음 발의해 2005년 제정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로 인해 당시 과학기술부에 연구실 안전을 담당하는 조직도 생기고, 예산도 배정되고, 과학기술연구소 연구실험실에 안전을 다지는 인프라가 구축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ADVERTISEMENT
이상민 의원은 “위헌 법률에 근거해 세금처럼 국가가 강제로 걷어가는 부담금이 있었다”며, “초선 때 4년간 국회의원들을 설득해 ‘학교용지부담금 환급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거부권을 행사하던 노무현 대통령까지 설득했다”며, 결국 “이 법으로 전국 23만 가구에 약 5,000억원을 국가가 돌려주게 돼 매우 보람이 있었다”고 했다.
법사위원장으로서 “임기동안에 ‘군 사법 개혁안’을 통과시켜 군대의 사령관 밑에 군판사, 군 검사가 있는 민주적이지 않는 군 사법체계를 좀 더 현대적이고 민주적으로 바꾸고 싶다”며 “정부와 협의를 해서 통과시키려 노력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또 “장애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장애인 복지법’은 인간 이상민의 평생 과제다”라고도 했다.
ADVERTISEMENT
이 위원장은 대전을 떠나기 싫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서울로 이사하지 않고 매일 대전에서 서울까지 왕복 4시간 출퇴근하고 있다. 주변에선 힘들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오히려 쉴 수 있는 좋은 공간이 생겨 기쁘다며, 학창시절 포기했던 성악가의 꿈을 출퇴근 시간 KTX 내에서 듣는 음악으로 달랜다고 했다. 또 국회의원 이전에 한 가정의 아들로서 가장으로서 그 동안 듣지 못했던 아내와의 결혼생활, 세 자녀와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 위원장은 정계에 입문 후 소신껏 해보자며 쌈닭 노릇도 마다않았고, 국민에 필요한 법을 만들겠다며 큰 소리와 주먹다짐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여당의원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야당 소속 의원인 그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성악가를 꿈 꿨을 정도로 아름답던 목소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며, 언젠가 “대통령도 해보고 싶다”고 전했다.
ADVERTISEMENT
장서윤 기자 ciel@
사진. 아리랑TV
ADVERTISEMENT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