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영 편집감독
[텐아시아=정시우 기자]편집의 위력을 말해볼까. 컷 하나에 등급이 달라지고, 컷 하나에 장르가 바뀌고, 컷 하나에 조주연이 바뀌기도 한다. 지난해 ‘설국열차’의 북미개봉을 두고 봉준호 감독과 미국 배급사 와인스타인컴퍼니가 마지막까지 힘겨루기를 한 것도 편집 때문이었다. 개봉한 영화가 훗날 디렉터스 컷(감독판)으로 재개봉한다든지, 한국버전과 해외버전이 다른 것 역시 편집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 있는 편집기사들이 컷 하나에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하는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민영 편집감독은 많은 연출가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마법의 손으로 통한다. ‘웰컴 투 동막골’의 팝콘 터뜨리는 씬 ‘최종병기 활’의 속도감 넘치는 액션, ‘설국열차’의 감각적인 편집이 이 사람의 손에서 매만져졌다. 가위손이라기보다는 마법의 손이랄까.Q. 어떻게 이 길에 들어서게 됐나.
‘연평해전’ ‘악의 연대기’ ‘화장’ ‘좋은 친구들’(2014) ‘몬스터’(2013) ‘설국열차’(2013) ‘몽타주’(201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2012) ‘오싹한 연애’(2011) ‘최종병기 활’(2011) ‘만추’(2010) ‘포화 속으로’(2010) ‘사요나라 이츠카’(2010) ‘거북이 달린다’(2009) ‘아내가 결혼했다’(2008)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 ‘음란서생’(2006) ‘웰컴 투 동막골’(2005)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최민영: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갔다. AFI(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편집 석사과정을 마친 후 자연스럽게 미국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10살 많은 형 덕분에 한국영화와 한국문학, 한국음악 등을 꾸준히 접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영화에 푹 빠져 있었는데, 마침 미국 유학을 온 박철관 감독(‘달마야 놀자’ 감독)과 독립영화를 하면서 친해졌다. 이후 박철관 감독이 두 번째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함께 하려고 11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영화가 엎어지고 말았다. 중간에서 붕 뜬 거다. 뭘 하지 고민하던 찰나에 우연히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웰컴 투 동막골’을 하게 됐다. 마침 두 영화 모두 잘 됐고, 이후 작품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한국에 눌러 앉았다.
Q. 처음 경험한 충무로는 어땠나. 미국과 달랐을 텐데.
최민영: 한국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특히 첫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연출한 이재한 감독님이 충무로에서 꼼꼼하기로 유명한 감독이어서 쉽지 않았다.(웃음) 하지만 감독님과는 그것을 인연으로 ‘사요나라 이츠카’ ‘포화 속으로’ 등을 함께 하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가장 먼저 경험한 건, 박찬욱 감독님의 ‘쓰리 몬스터’ 현장편집이다. 현장편집이라는 개념도 모르고 갔었다. 왜냐하면 현장편집은 한국에만 있는 시스템이거든. 미국 영화 현장에는 현장편집이 없다. 광고 쪽에서는 비슷한 게 있기는 한데, 그렇게 바쁜 현장에서 편집까지 하는 건 드문 경험이었다. Q. 편집감독으로서 성장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작품, 혹은 사람이 있다면.
최민영: ‘웰컴 투 동막골’.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한 작품이고 워낙 잘 됐다. 그 작품엔 출연도 했다. 영어하는 연합군으로.(웃음) “영어 할 줄 아는 군인이 필요한데 와 줄 수 있냐”고 해서 갔는데 추위에 덜덜 떨면서 촬영했다. 그때 “연기는 하면 안 되겠구나. 쉬운 게 아니구나” 절감했다.
Q.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단역들을 편집에서 자를 때 그들의 마음을 잘 알겠다.(웃음)
최민영: 맞다. 내가 현장 가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데, 되도록이면 안 가려고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현장에서 내 눈으로 본 그림들을 잘 못 자른다. 한 씬을 찍다보면 많은 에피소드들이 생긴다. 그 씬을 위해 감독과 PD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스태프들이 고생하고, 배우 컨디션이 어땠는지 등등. 그걸 보고 와서 편집을 하면 이야기가 안 보이고 현장이 보여서 냉정하지 작업을 못한다. 감독들이 본인 영화를 편집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사실 감독만큼 그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데 편집기사를 따로 두는 이유는 냉정한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Q. 작업을 하다보면 감독과 의견이 갈릴 때도 있을 텐데, 어떻게 조율하나.
최민영: 영화에 이유가 없는 씬은 없다고 본다. 모든 장면은 원작자와 감독이 의도가 있기에 찍은 거다. 하지만 말씀드렸듯, 편집기사는 첫 관객으로서 냉정한 시선으로 영화를 봐야 한다. 대개 1차 편집 과정에서 영화가 3시간 반 분량으로 압축된다. 3개월 동안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고생하면서 찍은 걸 잘라내야 하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편집기사의 임무이니 불필요해 씬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그래도 가끔은 배가 산으로 간다는 느낌이 있어도 감독님 의견대로 가보기도 한다. 가 봐서 좋으면 그대로 가고, 아니면 다시 돌아온다. 영화라서 가능한 거다. 드라마의 경우 살인적인 스케줄이라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다. 연출자가 찍어온 대로 붙이기에 바쁘지만 영화의 경우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통해 조율해 나간다.
‘웰컴 투 동막골’ 편집하자는 주위 반대 속에서 지켜낸 팝콘 터지는 장면
Q. 드라마 편집과 영화 편집은 접근을 완전히 달리해야 하나.최민영: 완전 다르다. 드라마는 ‘아테나: 전쟁의 여신’과 ‘아이리스2’ 등을 했는데, 촬영 테이프를 배달할 퀵서비스맨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웃음) 살인적인 방송스케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는 연출자와 의도에 거의 100% 기술적으로 맞춘다. 반면 영화는 편집 과정에서 이야기가 많이 바뀐다. 결말이 바뀔 때도 있다.
Q. 편집이 중요한 게, 컷 하나에 등급이 달라지고 장르가 바뀌기도 한다. 조주연이 바뀔 때도 있고.(웃음)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작업 하나.
최민영: 영화라는 매체가 책과 다른 것은 그림과 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해 준다는 것일 게다. 그랬을 때 그 안에 있는 그림과 소리를 이용해서 감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지에 편집의 묘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극에 호기심을 느끼도록 정보를 감췄다가 후반에 알리기도 하고, 컷을 조금 홀드 했다가 주기도 하고, 빠른 컷으로 긴장감을 살리기도 한다.
Q. ‘설국열차’ 편집에도 참여했다. ‘설국열차’가 미국 개봉을 앞두고 편집으로 시끄러웠다. 미국 배급사 와인스타인이 20분 가량 가위질 하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을 때 마음이 어땠나.
최민영: 우리 쪽에서도 짧은 버전으로 작업을 해보기는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개봉한 버전이 감독님이 원하는 형태였고, 나 역시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편집 문제로 미국 개봉 타이밍을 놓친 것과 대규모 개봉을 못한 것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원래의 모습으로 개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컷을 1초 반이 아니라 2초로 한 것엔 모두 이유가 있는 건데, 의도와 다르게 편집이 됐다면 굉장히 속상했을 거다.
Q. 여러 감독과 작업을 했는데 가장 자극이 됐던 감독은 누구인가.
최민영: ‘아내가 결혼했다’의 정윤수 감독님. 결과 못지않게 과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다. 좋은 과정을 거쳐야 진정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라 만드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즐거웠다. 연출자들마다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도, 영화를 대하는 태도도, 철학도 제각각이다. 다르기 때문에 작품을 할 때마다 많은 걸 배우고 느낀다. Q. 편집 감독으로서 보는 배우는 또 다를 텐데.
최민영: 손예진 씨와는 ‘내 머릿속에 지우개’ ‘아내가 결혼했다’ ‘오싹한 연애’ 세 작품을 함께 했다. 화면으로 자주 만나다보니 그 배우가 가지고 있는 습관들이 보인다. 어느 쭉 앵글이 더 예쁜지도 보이고. 나는 영화에서 여배우가 예뻐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이라, 최대한 배우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편집하는 편이다. 그렇게 몇 개월을 편집하다가 시사회에 가서 해당 배우를 만나면 너무 반갑다. 배우야 나를 처음 보는 거지만 나는 매일 만난 셈이니까. 그렇다고 다가가서 “반가워요!” 이럴 수는 없지만.(웃음)
Q. 가장 힘들었던 편집의 순간을 꼽자면.
최민영: 이재한 감독의 ‘사요나라 이츠카’가 가장 힘들었다. 프로덕션부터 기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언어가 일본어여서 애를 많이 먹었다. 통역하는 친구가 붙기는 했다. 하지만 내 느낌으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서 어려웠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게, 말 아닌가. 말투에서 오는 뉘앙스 하나에도 느낌이 확 달라지니까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Q. 편집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뭐라고 보나.
최민영: 편집은 시간을 굉장히 많이 투자해야 하는 일이다. 세밀한 퍼즐을 맞춰가야 하는 일이라서, 집중 하다보면 시간이 금세 흐른다. 밤을 샐 때가 비일비재하다. 시간으로 따지면 못할 짓인 거다. 그래서 이 일은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편집을 통해 이야기가 효과적으로 바뀌는 것들에 흥미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편집기사는 리듬감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잘 나가는 편집기사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내가 너처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랬더니 “음악이나 춤을 배워라”고 하더라. 굉장히 좋은 조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원래부터도 음악을 좋아해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이다. 그게 편집을 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지금도 편집을 하다 막히면 음악을 듣는다.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한 ‘설국열차’, 편집의 묘가 살았던 ‘최종병기 활’
Q. 최민영이 꼽은 ‘잊기 힘든 이 장면’을 말해 달라.최민영: 최근 작품 중에서는 4월에 개봉하는 임권택 감독님의 102번째 작품 ‘화장’이 기억에 남는다. ‘화장’은 영화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 죽어가는 아내와 매혹적인 젊은 여인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년 남성의 심리를 관객들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부담이 있는 영화다. 감정선이 잘 드러나도록 어떻게 편집할까 고민하며 작업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원래 시나리오와 상당히 다르게 편집이 됐다. 몇몇 씬은 순서도 완전히 바꾸는 대공사를 했다. 자세히 보면 아침저녁으로 계절이 살짝 바뀌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낮에는 인물들이 여름옷을 입고 있는데 저녁에는 긴 옷은 입고 있는 식이다. 그림적으로는 튀지만 감정적으로는 더 잘 붙는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다행히 감독님께서 보시고는 흔쾌히 오케이를 해 주셔서 보람이 크게 남는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도 아끼는 작품이다. 힘든 과정 속에서 다양한 형식의 편집을 시도했었다. 비록 크게 흥행은 안 됐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만족하는 작품이다.
Q. 편집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파트는 어디라고 생각하나.
최민영: 일단 촬영. 편집 센스가 있는 촬영감독을 만나면 그림이 굉장히 잘 붙는다. 편집하면서 “이 촬영감독은 편집을 아는 구나” 싶을 때가 있고, “뭐지? 도대체 왜 이렇게 찍은 거야?” 하게 되는 촬영감독이 있다.(웃음)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업하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과 편집의 목표는 비슷하다. 둘 다, 큰 이야기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씬의 감정을 조율할 수 있다. 영화의 감상을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라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Q. 최민영만의 무기라면?
최민영: 편집은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건 모르겠고 전체 이야기에 대한 이해도는 큰 것 같다. 무엇보다 감독과의 큰 충돌 없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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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구혜정 photo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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