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보
심현보와 마주 앉아 발라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니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항상 라디오로 듣던 그의 목소리는 은은하게 퍼졌다. 신승훈, 이승환, 윤상, 김현철의 발라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치 90년대로 잠시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록밴드 아일랜드 출신의 히트작곡가, 라디오에서 한때 노총각의 대명사로 불렸던 심현보가 자신의 솔로 4집 ‘따뜻’으로 돌아왔다.Q. 2011년 정규 3집 이후 약 4년 만의 새 앨범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앨범 ‘따뜻’은 제목 그대로 따뜻한 감성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스며들어’에 약간의 전자음이 첨가되긴 했지만, 그 외에 전반적으로 어쿠스틱 악기의 따스함을 잘 살린 사운드가 실려 있다. 문학적으로도, 노랫말로서도 예사롭지 않은 심현보의 가사는 읽는 맛이 난다. 특히 ‘황사’의 가사를 보면 도대체 심현보는 얼마나 로맨틱하게 살 길래 이런 가사를 쓸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따뜻한 남자 심현보와 이야기를 나눴다.
심현보: 작년에는 결혼을 위해서 살았다. 1년 내내 결혼 준비했던 것 같다. 결혼하고 났더니 한 해가 다 갔다. 새 앨범 곡들은 2012년부터 틈틈이 작업했다. 그 중에 몇 곡은 싱글로 발표했다. 난 단기간에 앨범을 작업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곡들이 자연스럽게 쌓이면서 앨범이 됐다.
Q. 지난 앨범과 사이에 가장 큰 변화는 역시 결혼일 것이다. 이것이 음악을 만드는 것에도 영향을 미치던가?
심현보: 사실 큰 변화는 못 느낀다. 주변에서 결혼을 하면 무언가 구속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난 자유롭지 못하다거나 그런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원래 자유분방하게 생활하면서 곡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다. 난 정해진 툴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Q. 사람마다 작곡 방식이 다 다르다. 자유롭게 여행을 떠난다는 이도 있고, 또 회사원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곡을 쓴다는 사람도 있다.
심현보: 난 절충 형이다. 주위를 보면 몇 개월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고, 오후에 일어나 느지막이 작업실에 가는 이들도 많다.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전업 작곡가 친구들은 정말 회사원처럼 곡을 쓴다. 난 그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보통 아침 8~9시에 일어난다. 바로 작업실로 가는 건 아니다. 난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한다. 요새는 겨울이라 그러지 못하지만 날이 좋을 때에는 공원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그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봄이 되면 공원에 앉아있는 게 직업인 것처럼 그러고 있는다. 가사를 생각할 때도 있고, 그냥 멍하니 있을 때도 있다.
Q. 가만히 있는 시간이 창작의 원동력인가?
심현보: 그런 것 같다. 생각이 정돈되는 시간이니까.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참 중요하다. Q. 앨범 제목이 ‘따뜻’이다.
심현보: 몇 년에 걸쳐 만든 곡들을 보니 계절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계절의 변화를 몇 번씩 겪으면서 만든 곡이니까. 2011년부터 온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춥고, 따뜻하고, 혹은 덥고. 그러다보니 온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음악에 공통적으로 담기게 된 것 같다. 늘 그렇지만 결국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번에는 그것을 온도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날 따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러고 보니 한창 연애하고 있을 때 만든 곡들이다.
Q. 심현보가 만든 곡들이 대개 따뜻했던 것 같다.
심현보: 그런 편이다. 반면에 이별에 대해서는 궁상맞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헤어짐에 대해서는 그런 편이다. 엉엉 목 놓아 우는 것이 아니고 뒤돌아가지고 “그래 내가 그렇지” 이러면서 눈물 한 방울 또르르 떨어지는 가사들 말이다.
Q. 타이틀곡은 2AM 임슬옹이 부른 ‘차갑다’이다.
심현보: ‘차갑다’는 이번 앨범에서 거의 유일한 이별 노래다. 이 곡은 마구 슬픈 분위기는 아니다. 서늘하고 무심한, ‘한 번 더 헤어지는구나’ 정도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부를 가사인 것 같지 않았다. 화자가 청년이었으면 좋겠더라. 서른 정도 된 청년 말이다.
Q. 결혼하고 나서 이별 이야기 부르기 힘들어진 것은 아니고?
심현보: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앞으로 이별에 대한 노래를 못 부를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내가 부르면 이 노래가 더워질 것 같았다. 이 곡은 서늘한 노래니까. 내가 부를 수 있는 이별이야기는 따로 있는 것 같다.
Q. 본인이 부른 ‘차갑다’ 버전도 담았다.
심현보: 처음 곡이 완성됐을 때의 정서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나 더’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역시 내가 부르니까 노래가 덥더라.
Q. 지금 본인이 노래를 ‘덥다 서늘하다’고 온도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심현보: 그러고 보니 그러네.(웃음)
Q. ‘이를테면 헤어짐 같은’ ‘당신이 한창’ ‘황사’는 전에 싱글로 발표됐다. 곡을 만든 시간차가 있다고 하지만 정서는 통일되는 느낌이다.
심현보: 내가 ‘아일랜드’로 음악계에 데뷔한지 이제 17~18년 정도 됐다. 그동안 만든 곡을 보면 정말 중구난방이다. 처음에는 록을 했지만 상업음악계에 뛰어들어 다른 가수들의 곡을 만들면서부터는 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했다. 이번 4집을 만들면서는 이 음악이 ‘내가 하고 싶은 음악, 잘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느꼈다. 포크에 기반을 둔 모던한 음악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그래서 이러한 일관된 정서가 나온 것 같다.
Q. ‘두근 두근 오늘은’은 스윗소로우 권순관, 옥달, 융진이 참여했다.
심현보: 이제까지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내 솔로앨범 내면서 사랑이 아닌 이야기를 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이 곡은 4집에서 유일하게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일상, 삶에 대해 노래해보고 싶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이런 이야기가 잘 안 써진 것이 고민이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술술 나오더라. 이런 이야기는 여러 후배들과 함께 하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8명이 함께 노래를 하는 것이 최근에는 별로 없는 작업이다. 과거, 90년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여럿이서 작업해보니 정말 즐겁더라. 스튜디오 안에서 웅성웅성하니까 정말 작업다운 작업을 하는 기분이었다.
Q. 더블 타이틀곡 중 하나인 ‘웃어본다’는 20분 만에 만들었다고?
심현보: 어떤 가사는 한 달 걸릴 때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실시간으로 4~5분 만에 써질 때도 있다. ‘웃어본다’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동안 아이패드로 쓱쓱 가사를 썼고 수정 없이 바로 녹음을 했다. 이렇게 가사가 써지면 막힘없이 풀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예전에 윤미래의 ‘시간이 흐른 뒤’는 작곡을 한 박근태와 함께 논현동 치킨집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만들었다. 근태가 만든 멜로디를 들으면서 가사를 치킨 집 냅킨에다가 썼다. 늘 있는 일은 아니고 가끔 그렇다.(웃음)
Q. ‘황사’는 가사가 매우 감성적이다. 어떻게 ‘황사’란 제목으로 이런 로맨틱한 가사를 쓸 수 있는 건지?
심현보: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대개 비슷하다. 결국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 때문에 아프고, 누구를 그리워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가사를 쓰는 것은 이러한 감정을 우리 일상의 상황과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먼지를 보면서 “왜 먼지가 날아올까”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지만, 그걸 보고 “저 먼지의 입자 하나하나가 다 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런 식으로 가사가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일상 속에 가사의 모티브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가사가 나와야 듣는 사람들도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Q. 작곡과 작사 중 뭐가 더 재밌나?
심현보: 난 가사 쓰는 것이 더 재밌다. 작사는 정말 재밌는 작업이다. 작곡과는 다른 쾌감이 있다. 멜로디의 정서만 있는 음악에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불어넣는 작업이 정말 재밌다.
Q. 이번 앨범에서 가사 쓰기가 가장 어려웠던 곡은?
심현보: ‘스며들어’였다. 만든 지 가장 오래된 곡인데 제일 많이 고쳤다. 이 곡은 1~2절 가사가 똑같다. 2절 가사를 바꾸고 싶었는데 아무리 써봐도 1절보다 좋은 가사가 나오지 않는 거다. 그래서 그냥 1절을 반복하게 됐다.
Q. 이제 4집 가수다. 이번 앨범에서 새롭게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심현보: 사실 다른 가수 작업하면서 내 음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양쪽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그렇게 못한다. 솔로로 1집부터 4집까지 내는데 10년이 걸렸다. 이번 앨범의 의미라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의 형태를 분명하게 찾은 것 같다는 것이다. 또 내 앨범을 만드는 작업은 내가 나이가 들어도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남의 곡을 만드는 것도 즐겁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내 앨범을 계속 하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미니앨범이 일반화되면서 정규앨범을 내는 빈도가 줄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앨범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수록곡들이 모였을 때 완성되는 정서나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
Q. 옛날이야기를 좀 해보자. 록밴드 ‘아일랜드’로 시작을 했는데 어떻게 전업작곡가로 데뷔를 하게 됐나?
심현보: 여러 기획사에 내가 만들어놓은 데모를 보냈는데 베이시스와 같은 회사에서 1997년에 아일랜드로 데뷔를 하게 됐다. 그때는 내가 록에 빠져있던 시절이었다. 아일랜드 1집이 흥행은 못했는데 주변 동료 뮤지션들이 많이 좋아해주셨다. 어느 날은 소극장에서 아일랜드 공연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승환 선배님이었다. 내 공연에 오셔서 게스트를 해주신다고 하셨다. 또 신승훈 선배님에게도 먼저 연락이 와서 가사 작업을 함께 해보자고 하셨다. 신해철 선배님도 ‘음악도시’ 진행을 하실 때 아일랜드를 많이 소개시켜주셨다. 그런 상황들이 내게는 참 신기했었다. 하지만 2집을 내고 회사가 문을 닫았는데 아일랜드란 이름으로 계약이 묶여 있어서 차기작을 낼 수 없었다.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계속 곡만 썼다. 마침 그 시기에 곡 의뢰가 하나둘 들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업 작곡가로 행보가 바뀌게 됐다.
Q. 아일랜드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 많이 아쉬웠겠다.
심현보: 밴드를 그만두면서 더 많은 곡을 쓸 수 있게 되긴 했지만, 밴드를 못하게 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내가 가장 부러운 게 델리 스파이스와 같이 자신들의 스타일로 오랫동안 유지되는 팀이다. 아일랜드를 하던 시기에 델리 스파이스, 자우림, 에메랄드 캐슬, 레드 플러스 등의 밴드들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 중에서 델리 스파이스, 자우림은 여전히 살아남지 않았나? 정말 부럽고, 또 존경스럽다. Q.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음악들을 좋아했나?
심현보: 계속 바뀌었다. 록, 재즈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발라드는 내가 꾸준히 잘하고 싶은 음악이다. 내가 30대 초반까지는 발라드를 잘 쓸 수 있는 역량이 안 됐다. 난 지금도 여전히 발라드는 작곡가, 작사가 모두에게 궁극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발라드 쓸 역량은 모두에게 다 내려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작곡가마다 특기 장르가 있겠지만 좋은 발라드를 쓰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여전히 발라드가 제일 어렵다.
Q. 그렇다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발라드는.
심현보: 20대 때에는 어떤날, 빛과 소금의 발라드들을 좋아했다. 그게 나의 시작점이었다. 이후 김현철과 윤상의 발라드를 좋아했고, 이승환, 신승훈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선배님들의 발라드는 정말 대단하다. 물론 나도 내 스타일의 발라드가 있겠지만, 위 선배들이 나에게 준 감흥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다. 나도 언젠가 저런 발라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Q. 그렇다면 본인의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발라드는?
심현보: 좋아한다기보다는 애착이 가는 곡이 있다. 1999년에 발표된 박혜경의 ‘하루’다. 내가 작곡가 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준 곡이다. 그 전까지 난 내가 좋아하는 록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히트곡에 대한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다. 그럴 때 내가 쓴 곡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곡이 바로 ‘하루’였다.
Q. 심현보가 좋아했던 가요들이 나왔던 시대와 지금은 가사의 의미가 많이 바뀌었다.
심현보: 스타일, 트렌드 모두 중요하지만, 결국은 좋은 음악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가사와 좋은 멜로디로 이루어진 음악 말이다. 그런 좋은 곡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결국은 대중에게 알려진다고 믿는다. 정말 부지런한 작곡가들을 보면 매번 트렌드를 따라잡아가며 시대가 요구하는 스타일의 곡을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은 내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정말 좋은 가사와 멜로디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Q. 그러고 보면 요새는 예전 가요를 다시 듣는 일들이 꾸준히 일어난다.
심현보: 노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발표 된지 오래된 곡들이 오디션이건 뭐건 간에 약간의 장치만 붙으면 다시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결국 노래가 좋기 때문이다. 요새는 차트 1위 곡은 나오지만 진짜 히트곡은 많지 않다고 말들을 하곤 하는데 나도 일정부분 동의한다. 지금의 차트를 보면 그저 벽돌쌓기를 하는 것 같다. 결국 순위를 매기면 어떤 곡은 반드시 1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전에는 지금의 역주행처럼 노래가 하나 나오면 오랜 시간 사랑받다가 1위에 오르곤 했는데, 지금은 곡이 나오자마자 순서대로 1위를 했다가 그냥 사라지는 느낌이다.
Q. 활동 계획은?
심현보: 4월부터 콘서트를 시작할 계획이다. 이번에는 공연을 많이 하고 싶다. 예전에는 내 앨범 내고 바로 다른 가수 작업에 들어가야 해서 별로 앨범 활동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대에 자주 서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작년에 난생 처음 음악 페스티벌(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 나갔는데 정말 재밌더라. 내가 이런 즐거움을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2015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연을 많이 하고 싶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에프이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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