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통해 팬들의 사랑에 응답받은 정우가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이번엔 60년대로 갔다. 송창식, 윤형주로 이뤄졌던 트윈폴리오가 사실 듀엣이 아닌 트리오였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쎄시봉’에서 정우는 제3의 인물 오근태를 연기했다. 정우에게서 시간을 가르는 ‘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짹각짹각.Q. 오근태는 돌아선 여자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혼자 속을 태우는 남자다. 이건…찌질함일까.
정우: 그게 남자의 진짜 모습이지 않을까.
Q. 어떤 면에서?
정우: 우리나라 남자 중에 사랑 앞에 찌질하지 않은 남자가 얼마나 되겠나.(웃음) 당신들은 과연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때 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펑펑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앞에서는 괜찮은 척 해도, 돌아서면 홀로 우는 남자들. 그런 많은 남자들이 근태에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태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지나치게 수동적이란 생각이다. 어쩜 한 번 잡아 볼 생각도 안 해?
정우: 크~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다.
Q. 정우라면 그러진 않을 것이다?
정우: 나라면? 나라면… “그게 나라면~♪(흥얼흥얼)” 하하하하. 진짜 고민되겠다. 아마, 상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Q. ‘사랑하니까 보내준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느끼나.
정우: 그건 별로인 것 같다. Q. 변명 같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우: 그런 분들이 계시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은 아니다.
Q. ‘바람’,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 ‘쎄시봉’ 등 연이어 복고풍 작품에 출연했다.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왜 이렇게 주구장창 복고로 가냐고.
정우: 일단 복고를 좋아한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보다는 시나리오,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 선택한 작품들이다. 이번 영화 역시 이야기의 배경보다는 스토리에 매력을 느꼈다. 플러스 알파로 음악이 있으니 더 풍성하게 다가왔다.
Q. 같은 복고이긴 해도 ‘바람’의 경우엔 당신의 진짜 이야기가 투영된 작품이다. ‘우리들의 추억’을 연기하는 것과 ‘나의 추억’을 연기하는 것은 달랐을 것 같다.
정우: 오… 그렇네. (추억에 빠져 잠시 말을 잊지 못한다) ‘바람’을 연기할 때도 감정적으로는 큰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등장하는 씬들에서는 조금…장례식 씬이라든지, 목욕탕 씬을 찍을 때는 여느 작품과 느낌이 확연히 다르긴 했다.
Q. 개인적으로, 정우의 베스트 씬이 뭐냐고 묻는다면, ‘바람’에서 아버지 등을 밀어주는 씬을 꼽겠다.
정우: 하.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연기하다보니 촬영하면서 많이 울었다. 내가 연기할 때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순간의 감정과 이야기에 집중하는 편이라 울음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Q. 오근태는 가상의 캐릭터지만 모티브가 된 인물(이익균)이 있기는 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등 실존인물을 맡은 다른 배우들보다 연기하기 편했거나, 반대로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스러웠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 같다.
정우: 오근태라는 인물로만 봤을 때는 자유로웠다. 이야기가 허구였기에 연기하는데 부담은 없었다. 많은 분들이 ‘트윈폴리오’ 제3의 인물에 대해선 많이 모르시기도 하고. (강)하늘이나 (조)복래, 진구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을 거다. 워낙 전설적인 분들을 노래해야 하니, 노래 부르는 것부터 버겁지 않았을까 싶다. 복래의 경우 송창식 선생님이 계신 미사리 라이브 카페도 따로 찾아가고 했더라. Q. 당신도 이익균 선생님을 만났다고 들었다.
정우: 촬영 들어가기 한 달 전, ‘쎄시봉’ 콘서트에서 선생님을 뵀다. 그때 공연을 보고, 대기실에서 인사를 드렸다. 이익균 선생님이 “내가 부산 사람인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연기할 수 있겠나”라고 걱정하셔서 “선배님, 저도 고향이 부산입니다”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이익균 선생님이 부산상고 선배셨다. 진짜 신기했다.
Q. 부산상고, 낯익은 느낌인데…
정우: 아, 부산상고! 참고로 이익균 선생님 동창 분이 고 노무현 대통령님이시다.
Q. 배우가 실존했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부담이기도 하고 도전이기도 하다.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
정우: 실존인물이라는 틀에 꼭 갇힐 필요는 없다고 봤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신경 안 쓰겠어!’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도 이전엔 기존 인물에 최대한 끼워 맞추는 연기를 해봤는데, 결국 나 자신만 힘들어지더라고. 그것만 쫓다 보면 도리어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Q. 반대로 시간이 지나서 정우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나타나면 어떨 것 같나.
정우: 와~ 느낌이 굉장히 특별할 것 같다. 가족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은데.
Q. 그 배우가 당신을 어떻게 연기 했으면 좋겠나.
정우: 그 친구 나름대로 솔직하게 연기해 줬으면 좋겠다. 연기가 됐든 어떤 행위가 됐든, 껍데기가 아니라 진짜 속을 연기해 주면 좋겠다. Q. 거꾸로 얘기하면, 당신이 이번 작품에 임한 자세인가.
정우: 맞다. 최대한 나의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Q. 상업영화로는 이번 작품이 사실상의 첫 주연이다. 상업영화라는 틀 안에서 압박감은 없나.
정우: 하루하루 진짜 기도하는 마음이다. ‘응사’ 이후 너무나 많은 대본과 시나리오가 물밀듯 밀려왔는데, 그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겁나는 게 있었다. 뭣 모를 때는 ‘나 100억, 200억 짜리 영화 다 할 수 있어’ 이랬다. 그런데 그건 어린 시기의 치기였고. 현실을 직시하니 내가 만약 감독의 입장이라면, 내가 만약 투자자의 입장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Q. 안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응사’ 이후 당신을 캐스팅 하려는 신경전이 치열했다. 갑작스럽게 모든 사람이 나를 주목하는 느낌은 과연 어땠을까.
정우: 구름 위를 붕붕 떠다니는 기분을 안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위기들이 조성이 됐다. 정신을 바짝 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Q. 짧지 않은 무명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나?
정우: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였다. 가끔씩 내 필모를 살펴본다. 보면서 어떤 선택들을 하며 걸어가고 있나 점검하는데,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다행히 무명 시절부터 강한 연기, 건들 건들거리는 연기 등 정말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 왔다. 덕분에 이젠 어떤 역할이 오더라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응사’ 이후 ‘쎄시봉’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복고인 것도, 음악이 또 하나의 주인공인 것도 비슷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어린 나이에 대중의 큰 관심을 얻어 스타가 됐다면,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진 못했을 거다.
Q. ‘바람’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바로 군대에 갔고, 군대를 다녀온 이후 김기덕 감독 작품을 선택했다.
정우: 내실을 쌓고 싶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응사’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드라마 인기를 타고 ‘원톱’ 주연도 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그게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설령 그렇게 됐다고 한들, 그게 과연 내 힘으로 진짜 된 것일까…아닌 것 같다. 그런 물음들을 나에게 묻고 묻고 또 물었다. 신중하게 작품에 접근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봤다. Q. 연기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진중한 자세다.
정우: 그런 면이 확실히 있다. 연기를 그냥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보니 업계에서는 또 까다롭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응사’ 함께 했던 동생들은 1년 간 여러 작품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한 작품이다. 최근 선배님들이 작품을 많이 하는 추세이다 보니, 텀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도 있을 게다. 하지만 아직 나는 여러 작품을 오갈 레벨은 안 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진정성 있게 다가가려면,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스타일이다. 시간이 지나서 지금의 내 생각이 관객 분들에게 전달이 된다면, 그땐 깊은 신뢰가 쌓이지 않을까 싶다. 배우로서의 신뢰를 쌓아나가는 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숙제 같다.
Q. 당신, 81년이다. 81년생이면 LP 세대는 아니다. LP보다는 CD와 MP3 세대인데, 혹시 CD를 모으지는 않았나.
정우: 맞다. 나는 LP보다는 CD세대에 가깝다. 그런데 아버지가 서점을 운영하면서 LP판들을 판매 하셨다. 그러다보니 팝송과 포크 음악에 친숙한 느낌이 있다.
Q. 오, 어릴 때부터 책과 음악을 굉장히 많이 접했겠다.
정우: 굉장히 많이 날랐죠.(일동 웃음) 1층에서 옥상으로. 그때의 친근함이 아직 남아있다.
Q. 그나저나 당신, 순간순간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미안하지만, 살짝 띨한? 개구쟁이 같은?(웃음) 지금도 나오고 있다.
정우: 으하하하하. 집에서는 “(표정)관리 좀 하면서 웃어라. 느낌은 알겠다만, 너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웃는 거 아니냐”고 질타하신다. 비주얼적으로 망가지는 게 보기 그러신가 보다. 하하하하. 그런데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시선에 대한 의식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다. 앞에 이성 친구가 있든 카메라가 있든 자유로운 편이라 그런 표정이 나오는 것 같다.
Q. 누군가의 추억이 되는 역할들을 많이 했다. 반대로 정우가 추억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보기를 주겠다. 1 첫사랑, 2 첫 키스, 3 첫 고백… 미안하다. 로맨틱 영화라 보기들이 다 이렇다.
정우: 하하하. 그런데 나는 ‘처음’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첫 편지, 첫 대본, 첫 데이트,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을 쌓아 두는 스타일이 아니다. 생일도 잘 챙기지 않고. Q. 첫사랑도?
정우: 사실 첫사랑에 대한 개념도 나는 잘 모르겠다.
Q. 그럼 당신은 어떤 추억에 젖나.
정우: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들은 있기는 하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들. 가령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기억한다. 서울예대(전, 서울예전) 입학이 10대 시절 나의 꿈이었던 터라, 합격 전화를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처음 비행기를 탄 날, 처음 바다를 본 날, 처음 자전거를 탄 곳 등 세세한 것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Q. 선별적 기억력이 좋은 거네. 좋은 거다. 정신건강에 특히. 서울예대 99학번인가.
정우: 아, 서울예대는 00학번이다. 서일대 연극과를 다니다가 시험을 쳐서 다시 갔다. 나는 뭐든 한 번에 된 건 없다. 다 한번씩 ‘삑사리’가 났다. 그런데 그것도, 나쁘지 않다.
Q. 배우마다 작품을 하면서 쌓아가는 스타일이 있고, 비워가는 스타일이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정우: 아,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가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비우며 가는 중이다. 때가 되면, 많은 소중한 것들이 쌓여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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