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아
(part2에서 이어옴) 학교 교실공사로 인해 몇 달 동안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에서 수업을 했다. 피아노 잘 치는 아이로 유명했던 정밀아는 수업시간에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가끔 영어선생님이 저를 교실 앞으로 불러내 친구들의 신청곡을 받아 피아노를 치게 했었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추억입니다.”(정밀아) 고1 2학기부터 미대 입시학원에 다녔던 정밀아는 고2때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오빠를 통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알게 되었다. 잡지에 나온 학교소개를 보고 마음에 들어 남들이 석고상을 그릴 때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고3 가을에 입시를 보고 1998년 한예종 조형예술과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올라와 학교 앞 이문동에서 여대생들만 묵는 하숙집을 잡았다. “바로 옆 건물엔 남학생 하숙집이 있어 괜히 줄넘기하러 옥상에 올라가 접선하기도 했죠.(웃음)”(정밀아) 대학생활은 문화충격의 연속이었다. 촌 동네에서는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프랑카드가 걸렸을 정도로 똘똘한 아이로 통했지만 대학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희 학교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입학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아 노력을 2배로 했어요. 그들은 이미 너무 예술적인지라 좌절할 여유도 없어 한동안 서울생활에 적응하기 바빴습니다. 어느 날, 같은 과 주경희 언니가 학교에 처음으로 음악동아리들 만드니 들어오라고 하더군요.”(정밀아)
대학 1학년 때 10월 어느 날. 피아노가 있는 본관 303호 방으로 갔다. “학교에서 악기연주가 가능한 아이들은 다 모였던 것 같아요. 거기에서 영화과 작은미미를 만났습니다.”(정밀아) 동아리에서 만난 작은미미와 영상디자인과 출신으로 지금은 CF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유대얼, 건축과 이호선 등과 음악동아리 ‘AMA’의 핵심멤버로 어울렸다. 동아리 방이 없어 불편해 피아노를 엘리베이터로 2층 총장실 앞으로 옮겨 시위 성 공연을 했다. 음악소리를 듣고 조용하던 복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학교에서 동아리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정밀아) 동아리 활동은 힘든 학교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동아리 활동에 몰입했던 정밀아는 연기하는 아이들과의 콜라보레이션 작업과 정동극장, 학교축제 무대에 오르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대학교 4학년 때 작업실에서
어느 날, 담당 교수가 “내 방에 있는 라이트박스로 슬라이드사진 작업을 퇴근 전까지 끝내 놔라”고 했다. 동아리 연습에 가기위해 몰래 빠져나온 정밀아는 밤새 놀아버리는 사고를 쳤다. “다음날 무지 혼나고 밤 새 작업을 했죠. 그리고 4학년 때였나. 인사동에 사루비아다방이라는 전시장이 개관해 영화과 조교 한받과 함께 공연했어요. 그 인연으로 굴소년단을 만나 홍대에서 가끔 공연을 같이하면서 아마추어증폭기의 초기 곡들도 많이 들었습니다. 또 윤보선대통령 생가에서 열렸던 엄청 화려한 후원회 행사에 나갔는데 저희 동아리 다음 순서가 한상원밴드였어요. 얼마나 긴장하고 떨었던지 어떻게 연주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고급 부페를 신나게 먹고 왔던 기억은 또렷하게 납니다.(웃음)”(정밀아)
음악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CD를 마음껏 구입해 다양한 음악을 접했다. “여전히 가요를 엄청 들었지만. 제 귀에 좋게 들리는 건 다 들었어요. 캐롤킹. 자미로콰이. 스웨이드. 벨벳언더그라운드. 케이크, 티스퀘어. 조지밴슨. 데이브그루신. 리얼그룹. 장고레인하트. 스테판그라펠리. BBking. 키스자렛. 팻멧쓰니. 자크루시에. 듀크조단. 클로드볼링. 스탄겟츠. 존콜트레인, 그 외 여러 재즈 앨범 등등”(정밀아) 이후 미디음악, 영화음악 수업도 찾아 들었다. “무료 라이브 무대를 엄청나게 찾아다녔고 학교 오케스트라 공연도 자주 보러갔어요. 참 부지런하게 넘치는 호기심을 직접 채웠던 시기였습니다.”(정밀아)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에 호기심을 느껴 학과 매체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기초적인 흑백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법, 대형카메라 스튜디오 촬영법, 캠코더 촬영기법을 배웠다.디지털로 대변환이 이뤄지던 시기에 필름 카메라 작업을 배우기 시작한 정밀아는 지금도 캐논 G-3 OL 필름카메라와 2007년에 구입한 똑딱이 디카 펜탁스 OPTIO M30을 병행해서 사용한다. 2학년을 마친 2000년 휴학을 했다. “3학년부터는 전공강도가 높아지는 지라 한 템포 쉬어가려는 마음이었죠. 그때 충무로에 있는 음반가게 ‘신촌뮤직’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작은미미가 같이 일하자고 불러 3달 정도 일했습니다.”(정밀아)
물체주머니 시절
2001년 복학을 하니 오케스트라 멤버였던 남학생들이 모두 군대를 가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정밀아는 같은 과 1년 후배 김혜린이 보컬, 보름 배운 통기타 실력으로 작은미미가 기타를 맡고 키보드, 장구까지 연주한 3인조 걸밴드 <물체주머니>를 결성했다. 멤버 3명 모두 창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보컬 김혜린이 부를 수 없는 노래는 곡을 만든 사람이 불렀다. 키보드 정밀아는 자신의 첫 창작곡 ‘코코넛’을 딱 한 번 불렀다. “휴학했을 때, 인도네시아 삼촌댁에 여행가서 맛본 코코넛의 느낌을 담은 곡인데 가사에 혀 바닥이 등장하고 좀 야합니다.(웃음) 당시 노래나 뭔가를 하는 것은 창작 작업이라 생각했어요. 음악도 미술작업을 했던 진지한 태도가 그대로 이어지는 창작활동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정밀아)
졸업 작품준비하면서 막연하게 미술가로 살아갈 생각을 했다. 그때 집안형편이 또 어려워져 현실적인 경제적 문제와 부닥쳤다. 주변 아이들은 죄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는데 엄두도 내질 못해 너무나 부러웠다. 대학을 졸업한 정밀아는 물체주머니 멤버들과 홍대 앞에서 연극배우 추상미가 운영했던 ‘떼아뜨루 추’와 프린지 페스티발 무대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미술도 미술이지만 음악이란 매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표출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뭐하나 시원하게 보이는 것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무중력 상태 혹은 뭔가 꽉 차 있는데 뭐 하나 터트릴 수 없어 답답한 기분이었죠.”(정밀아)
음악을 하고 있지만 동아리 수준인지라 자신이 만든 자신의 음악, 그림이 없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대학졸업 후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정했고 무엇을 어떻게 창작해야 되는지도 몰랐던 혼란기였습니다. 내면적으로 결핍상태였고 외부적으로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한꺼번에 밀려오니 멘붕이 오더군요.”(정밀아) 무기력하고 혼란스런 상태에서 참가했던 클럽 빵의 오디션은 결국 밴드해체를 불러왔다. “빵 오디션을 보고난 후, 뭔가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고 막막한 그런 답답함이 결국 폭발해버려 밴드를 해체했던 것 같아요.”(정밀아)(part4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사진제공. 정밀아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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