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에서 하소용을 연기한 민무제
‘허삼관’에서 하소용을 연기한 민무제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이 선택이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강한 예감’이 드는 순간. 그리고 그때의 선택은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 않든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민무제에겐 그런 순간이 벌써 두 번이나 있었다. 한번은 12년 전, 동기들과 세계를 떠돌던 중 홀로 이탈리아에 남기로 결심했을 때. 그리고 또 한 번은 1년 전 중앙대학교 1년 후배 하정우, 아닌 감독 하정우에게 ‘허삼관’ 오디션을 보러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다. 전자의 선택으로 낯선 땅에서 배우가 아닌 사업가로 12년을 살던 민무제는 1년 전의 선택으로 다시 무대 앞에 섰다. 배우 민무제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한다.

Q. ‘허삼관’ 무대인사에서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다.
민무제:
무대인사가 단조롭다며 하정우 감독님과 PD님이 “무제 씨, 한국 말 못하는 콘셉트로 가보자” 했다. 그래서 “(어눌하게)저는…하소용 역을 맡은 민무제…라고 합니다. 이태리 말로 해도 되죠? 세뇨리 세뇨리~ 보나쎄라~” 막 그랬다.(웃음) 마지막 날 무대인사 때는 다들 힘들어하길래 턴을 보여줬다. 턴만 42바퀴 정도 돌았나?

Q. 턴도 돌 줄 아나.
민무제:
원래 무용단에 있었다. 특기로 연극영화과를 가려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재즈댄스를 배웠다. 대학 다니면서 2년 정도 무용단 생활도 했다. ‘전미래 재즈무용단’이라고 신사동에 있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강사도 했었는데 그때가 1996년도, 스무 살 무렵이었다. 사모님들이 벤츠 몰고 나와서 “이 선생(그의 본명은 이경운이다)~ 차 한 잔 해” 하곤 했는데, 그땐 너무 어려서 기겁을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Q.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그 이야기는 잠시 뒤에 더 듣기로 하고, ‘허삼관’ 이야기를 해 보자.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돈과 매력으로 여자들을 단숨에 휘어잡는 하소용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사실 전형적인 미남이 캐스팅될 줄 알았는데…반전이다.(웃음)
민무제:
맞다. 원작만 보면 꽃미남 스타일인데.(웃음) 사실 나는 이런 영화인 줄 몰랐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하정우 감독님에게 전화가 왔다. “2월 6일까지 오디션이 하나 있는데 6일을 넘어가면 볼 수가 없다. 형이 꼭 봤으면 좋겠다”고. 그때 마침 배우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터라, “그럼, 들어가겠다” 하고 한국으로 왔다. 오자마자 영화사 가서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그게 하소용 역이었다. 4시간 동안 앉아서 두 번 정도 읽었다. 처음 읽고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큰 배역인데?’했고, 두 번째 읽고는 ‘내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Q. 기회라는 느낌이 딱 온 건가.
민무제: 시나오를 보면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 제작사에서 “일주일 후에 오디션을 보자”고 했는데 “그냥 오늘 보면 안 되나요?” 하곤 바로 오디션을 봤다. 사실 떨어진 줄 알았다. 오디션 끝나고 술을 한 잔 하는데, 하 감독님이 “축하드린다”고 하더라.

민무제, 감정 표현이 굉장히 다채롭다
민무제, 감정 표현이 굉장히 다채롭다
Q. 일사천리다! 하정우 감독이 왜 하소용 역을 당신에게 맡겼다고 생각하나.
민무제:
글쎄. 꽃미남은 아니지만 강렬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소용이 자수성가한 느낌이 있지 않나. 나 역시 일찍 독립 한 후 이태리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런 부분들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Q. 다시 돌아온 한국 생활은 어떤가.
민무제:
작년 2월 6일 날 귀국했으니 아직 1년이 안 됐다. 사실 얼마 전에야 적응이 됐다. 오자마자 캐스팅이 되고, 바로 연습하다가 촬영에 들어갔다. 그리고 10월 15일에 영화 촬영이 끝났으니 정신이 없었다.

Q. 하정우 감독이 원하는 하소용이 있었을 테고 당신이 해석한 하소용이 있었을 텐데, 하소용은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나.
민무제: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에는 악역이라고 생각했다. 매몰차게 표현 해야겠구나 했는데, 감독님이 그러지 말고 우유부단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악역이지만 악역 같지 않게 연기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중에 영상을 보고 나서야 왜 그렇게 요구했는지 이해가 됐다. 시나리오 분석이 감독님보다 떨어졌던 거다.

Q. 처음 맛보는 영화 현장은 어땠나?
민무제:
내 촬영 분량은 12회 차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처음에는 사실 힘들었다. 영화라는 매체를 처음 접했고,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들도 있을 터이고… ‘쟤는 뭐야?’ 낙하산 같이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이겨내는 게 관건이었다.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냐 아니냐가가 중요했던 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편해졌다. ‘아, 영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 희노애락이 이렇게 만들어 지는구나’를 느꼈다.

Q. 12년 만의 연기, 그것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영화라는 매체에 들어간다는 게 일견 모험이기도 했다.
민무제:
나에겐 기회였다. 모험은 오히려 감독님이 하신 게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는 이상하다는 얘기가 없어서 다행이다.

Q.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민무제:
중1때 교회 연극을 통해 연기의 재미에 빠졌고,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96학번으로 중앙대학교 연극과에 들어갔고. 그런데 1,2학년 때는 주인공을 할 수가 없다. 그땐 또 (김)상경이 형님, (김)석훈이 형 등 실력 있는 분들이 많아서 3학년이 돼야 주인공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1,2학년 때는 학교 밖으로 눈을 돌렸다. ‘신시컴퍼니’ 뮤지컬 작품들에 충연했는데 ‘로마의 휴일’이 내 첫 작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태리와 인연은 인연이었구나 싶다.

성격파 배우의 탄생을 예고하는 듯한, 포~즈!
성격파 배우의 탄생을 예고하는 듯한, 포~즈!
Q. ‘신시컴퍼니?’ 당신, 굉장한 실력파였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진다. 또 어떤 작품을 했나.
민무제:
세종문화에서 열린 ‘시카고’ 초연 공연, ‘렌트’, ‘아이러브 뮤지컬’ 등에 출연했다. 그런데 코러스(주인공 뒤에서 춤과 배경을 만드는 역할)만 하다 보니 대사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그리고 그때는 (남)경주 형으로 시작되는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이 뮤지컬 무대를 장악할 때였다. (전)수경이 누나, (최)정원이 누나, (주)원성 선배도 그때 다 신시 멤버였다. 중앙대는 나 혼자였다.

Q. 아, 학벌.(웃음) 그런데 중앙대도 예술분야에서는 파워가 강하지 않나.민
무제:
영화와 드라마가 강했지 뮤지컬은 아니었다. 그때 매일 두 시간 전에 나가서 ‘마대’질을 했는데 내가 좀 늙게 생기지 않았다. 정원이 누나가 어느 날 슬쩍 오더니 “나이도 많은 분이 왜 마대질을 하고 계세요” 그랬다.(일동 웃음) “누나 제가 여기 막내에요” “어머, 그래요?” 그러면서 친해졌다.

Q. 만약 뮤지컬을 계속 했다면, 중앙대 후배들을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
민무제:
그랬을까.(웃음) 지금 (후배) 홍광호가 뮤지컬에서 잘 돼서 기분이 좋다. 내가 연극 ‘카르멘’을 할 때, 현빈과 광호가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현빈, 홍광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 01학번 동기다.)

Q. 아, 하정우와 주인공 돈 호세를 더블로 연기했던 그 ‘카르멘!’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왜 갑자기 이탈리아로 간 건가.
민무제:
졸업 공연 후 동기 세 명, ‘한예종’ 출신 두 명, 총 다섯 명이서 ‘아리 코리아’라는 팀을 꾸려 세계 일주를 했다. 세계를 돌며 길거리 공연하고, 사물놀이 보여주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등에 참여했다. 여행자금은 잡지 ‘쎄시’의 후원을 받았다. 박카스 지면 광고 출연으로 500만원도 받았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행비가 고갈됐다. 부모님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가족들이 경제적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 혼자 욕심을 내는 건 아니다 싶어서 스위스 야간전철을 타고 내려오면서 이태리에 남기로 결정했다. 마침 당시 우리를 먹여주고 재워주던 형이 있었는데, 그 형님이 같이 뭘 좀 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팀원들은 아프리카로 떠나고, 나는 이태리 로마에 남아 돈을 벌었다.

Q. 그게 12년이 될 줄 알았나.
민무제:
길어야 5년? 5년 정도를 생각했다. 그때 사용하기 시작한 이름이 민무제다. 그 형님이 지워준 이름인데,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리미티드(unlimited)’다, 뭔가 국한이 없다’는 의미로 지어주셨다.
민무제
민무제
Q. 5년이 될 줄 알았는데 12년이 된 건,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생활이 나쁘지 않았거나,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거나.
민무제: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미친 사람처럼 돈만 벌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하고 싶을까봐 TV도 안 봤다. 처음 시작한 게 가이드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젊고 빠릿빠릿해서 많이들 찾아줬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여행이 호황기였다. 나쁘지 않았다. ‘돈이 되는 구나’ 했다. 그러다가 형님하고 쇼핑센터를 열었는데 그게 또 굉장히 잘 됐다. 이태리 고속도로에서 올리브기름, 발사믹 식초, 와인, 화장품 등을 팔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7-8년이 지났고, 집안 빚도 어느 정도 청산이 됐다. 그런데 사람이 주식처럼 상한가만 칠 수는 없지 않나. 오르락내리락 매너리즘도 빠졌다. 그리고 빚 청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는데 막상 남은 게 하나도 없다보니 뭔가 힘이 빠졌던 것 같다. 물론 가족을 위해 돈이 쓰이긴 했지만 뭔가 멍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Q. 연기에 대한 생각이 기습했구나.
민무제:
맞다. ‘내가 연기를 안 하고도 평생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내가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과연 이 모든 걸 버리고 돌아갈 수 있을까’ 내 자신에게 묻고 물었다. 그런데 그때의 난 이미 돈의 노예가 됐는지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로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다가 3년 전쯤에 한국에 잠시 나왔다. 그때 하정우 감독을 만나 술을 마시게 됐는데, “다음 날, 뱃부영화제에 윤종빈 감독님과 가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나야 자리만 있으면 당연히 가고 싶지. 그렇게 하정우 메이크업 자격으로 영화제에 동행했다.(일동 웃음) 정우는 메이크업 안 해도 괜찮다며 민낯으로 영화제를 돌아다니고.

Q. 연기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는데, 영화제를 갔으니 오죽했겠나 싶다.
민무제:
좋았다. 밤에 술을 마시다가 정우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다시 배우를 할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랬더니 숨도 안 쉬고 말하더라. “형은 열심히 사셨기 때문에 마음가는대로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 뭐가 됐든 형이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태리로 돌아간 후 사업체 정리가 안 돼서 망설이고 있는데, 아까 말한 그 전화가 온 거다. 2월 6일까지 오디션을 보러 들어오라는.

Q. 그때 그 전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민무제:
아마 돌아오지 않았을 거다. 이태리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 계속 그 일에 발목 잡혀 있었거든. 하지만 그 일에 매여서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새로운 걸 창출하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왔다. 그리고 왔더니, 지금 이런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거다.

Q. 살다보면 ‘이때다’ 싶은 순간이 오는 것 같다.
민무제:
맞다. 그 전화가 두 번째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이태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가 첫 번째 전환점이었고.
민무제
민무제
Q 첫 번째 전환점을 뒤돌아보면 어떤가.
민무제:
후회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부모님에게 서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그 때 뭔가를 해 드릴 수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걸 못했다면 평생 마음이 아팠을 거다.

Q. 그나저나 외모가 이국적이다. 환경 탓은 아닐 테고.(웃음)
민무제:
하하하. 원래 이렇게 생겼다. 이태리에서 살다 왔다고 하니까 더욱 그렇게들 보시는 것 같다.

Q. 거울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민무제:
왜 이렇게 얼굴이 길지?(일동 폭소)

Q. 하정우가 이런 말을 했다. “민무제는 향후 5년 안에 충무로에서 대성할 배우”라고.
민무제:
아우, 민망하다~. 하하. 그런데 하 감독님이 이 바닥에서는 한참 선배고, 나는 병아리 아닌가. 내 안에 있는 불꽃을 봐 주셨으니, 너무 감사하다.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Q. 12년만의 도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배우가 되겠다고 칼을 뽑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민무제:
‘이태리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만약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는 베니스영화제 초청을 받아서 오겠다!’ 그런 마음이었다.

Q. 오, 멋지다.
민무제:
민망하긴 한데,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약해 지니까.(웃음)

with 하정우① 푸디토리움 김정범 “‘허삼관’ 음악, ‘577·롤코’의 완결판 느낌이다”(인터뷰)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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