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김정범 음악감독
‘허삼관’ 김정범 음악감독
‘허삼관’ 김정범 음악감독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 ‘허삼관’을 보다보면 한편의 동화와 마주한 듯한 느낌에 종종 젖는다. 곳곳에서 기습하는 서정적인 정서들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한 미술세트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푸디토리움 김정범 음악감독에 의해 빚어진 음악들도 이 영화에 따뜻한 온기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김정범이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기 전, 그러니까 푸딩으로 활동하던 시기부터 그의 팬이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나이에 그의 음악에 취해 살았었는데, ‘허삼관’ 음악을 들으며 당시의 떨리는 기운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뭐랄까.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슬픔의 유통 기한을 알고 있는 사람’의 음악 같달까.

엉덩이의 힘, 즉 노력의 시간을 믿는 하정우처럼 김정범 역시 자신을 한없이 밀어붙이는 타입의 사람 같다는 느낌을 인터뷰 내내받았다. 하정우와 김정범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허삼관’ 음악의 밑그림을 그려나갔고,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며 허삼관 마을에 선율을 채워나갔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허삼관’의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Q. 하정우와의 인연의 시작은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였다.
김정범:
사석에서 본 적은 있지만 “우리가 앞으로 같이 해보자” 이런 건 없었다. ‘멋진 하루’ 이후 나는 공부를 위해 뉴욕으로 가고, 하정우 감독은 배우 커리어를 쌓고,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귀국을 해서 부산에 정착했는데, 어느 날 영화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577 프로젝트’ 음악감독을 찾고 있는데, 하정우 감독이 나를 떠올렸다고 하더라. 그렇게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Q. 개인 앨범을 발매하는 것과 영화음악을 만들어서 극장에서 결과물을 보는 것은 많이 다를 텐데, ‘허삼관’은 어땠나.
김정범:
사실 ‘허삼관’만 두고 이야기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하정우 감독과는 ‘577 프로젝트’ ‘롤러코스터’ 등 음악 작업을 쭉 함께 해 왔다. ‘577 프로젝트’에서부터 이야기 했던 것들이 제대로 구현된 게 ‘허삼관’ 같은 느낌이랄까. 감독님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나에겐 세 영화의 완결판 혹은 새로운 시작 같은 느낌이다.


Q. 하정우 감독이 특별히 포인트로 강조한 게 있지 않을까 싶다.
김정범:
‘허삼관’ 음악의 경우 포인트가 정말 많다. 거의 전 장면이 포인트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타임 코드에 정확히 들어맞게 만들어진 음악들이다. 가령 날아가는 주인공의 주먹, 걸음걸이 등 모든 장면에 음악이 칼처럼 탁탁탁 맞아 떨어진다. 그냥 흘려보낸 씬이 없다.

Q. 문득, 음악에만 집중해서 영화를 다시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범:
자세히 들어보면 굉장히 수학공식 같을 거다. ‘미키마우싱(동작과 음악을 일치시켜 정확히 맞추는 기법)’이라는 전문용어가 있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가 좋아하는 무수히 많은 서양 영화들은 음악을 송처럼 흘려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종의 테크닉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이번엔 진짜 영화음악다운 음악을 하는 게 개인적인 목표였다. 사람들은 그냥 볼지 몰라도 뜯어보면 테크닉이 보이는 음악들, 그런 걸 하고 싶었다.

Q. 본인이 하고 싶은 것과 요청받는 음악 사이 간극은 어떻게 맞추려고 하나.
김정범:
영화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랬을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포인트는 음악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최상의 퀄리티로 나와야 한다는 거다. 우리가 들은 적 없는 우주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든 뭐든 간에, 그것들을 누가 들어도 ‘와, 되게 멋있다’라고만 해주면 나는 만족한다.

Q. 한국 체코 미국 브라질 프랑스 이탈리아 총 6개국에서 현지 최고의 뮤지션들과 레코딩을 진행했다. 초반부터 이렇게 글로벌한 계획이었나, 작업을 하다 보니 커진 경우였나.
김정범:
6개국을 미리 정하고 들어간 건 아니지만 최고 아티스트들과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은 사니리오들어가기 전부터 했다. 그러니까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뮤지션들 국적이 6개국 이었던 거다. 개중에는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노아’와 마이클 만의 ‘퍼블릭 에네미’ 등에서 활약한 마크 베힐레(Mark Baechle)도 있다. 메인테마를 녹음한 체코 프라하 녹음실은 영화 ‘대부’ OST가 진행된 곳이다.

‘허삼관’ OST 자켓
‘허삼관’ OST 자켓
‘허삼관’ OST 자켓

Q. 뭐랄까. 영화 보는 내내 웅장한 외국음악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김정범:
그렇게 느꼈다면, 다행이다.(웃음) 그런 게 있었다. 이 작업을 할 때 물론 하정우 감독의 작품도 중요하지만, 내 개인적인 이유도 찾아야 했다. 그랬을 때 그 중 하나가 뭐였냐면, 내가 현재 성신여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날 학생들에게 “영화음악가 하면 어떤 사람들이 생각나?”라고 물었더니 다들 엔니오 모리꼬네, 한스 짐머, 히사이시 조를 얘기하더라. 그때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왜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영화음악 감독들을 지금의 아이들도 똑같이 얘기하지? 그동안 영화음악가들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화음악의 요소들을 ‘허삼관’에서 다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구성도 기존 영화들과는 다르게 하려했다.

Q. 기존 영화와 다르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김정범:
기존의 감정적인 현악 위주의 음악에서 벗어나 클라리넷 바순 하프 등 악기 각각의 본연의 다양한 색채와 배합에 신경을 썼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도 많은 사람들은 클라리넷의 선율을 주로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다양한 악기가 섞여서 좋은 배합의 소리를 내는 거다. 그런 것처럼 진짜 클래식 음악처럼 하면 좋을 거란 생각을 했다.

Q. 방금 엔니오 모리꼬네, 한스 짐머, 히사이시 조를 언급했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거장이 나오기 힘든 시대라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영화 OST 시장도 많이 죽었다. 현 가요시장과 맞물려 음악이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여서 그런 게 아니가 싶은데.
김정범: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거장은 계속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음악에 대한 정보가 너무 차단돼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를 뿐이라고 본다. 제한된 것들만 보고 있는 거지.

Q. 정보가 차단돼 있다는 얘기는 의외다. 유튜브나 SNS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많은 시대 아닌가.
김정범:
가령 이런 거다. 국내 최고의 도서관이라 불리는 곳에 가보자.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라이브러리가 많다고 느낄 수 있는데, 사실 거기에 심어놓은 라이브러리도 제한된 거다. 그게 다는 아니라는 거다. 사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국내 음악시장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내가 지금 SBS 파워FM ‘애프터클럽’에서 디제이를 하고 있는데, 소개해 주고 싶은 곡들 대부분이 국내에 없다. 그게 이상한 음악이어서 없는 게 아니다. 차트에서 1등도 하고 그 지역에서는 나름 트렌디한 음악으로 인기를 끈 곡인데도 국내에 없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Q. 과거에는 어땠다고 보나.
김정범:
나도 어릴 때 해적판을 많이 구입했지만, 앨범이 없으면 없는 거였지 정보가 차단 됐다는 느낌은 없었다. LP를 구매할 수 있는 곳들이 많았고, 압구정 일대에 해적판 수입상들도 있었고, 원하는 앨범을 해외에서 따로 구해주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음악을 그렇게 안 듣는다. 대형 음악 공유사이트에서 스트리밍으로 키면 바로 들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Q. 결국 수동적으로 변한 음악 수용 방식을 말하는 건가.
김정범:
맞다. 그런 소비에 익숙해 진 거다.

Q. 거장은 계속 나오고 있다고 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음악 장인은 누구인가.
김정범:
존 브라이언. 가장 좋아하는 영화음악 감독이다. 특히 그가 만든 ‘이터널 션샤인’ 음악은 최고라고 생각한다.

Q. 영화음악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정범:
푸딩 활동을 하다가 보스턴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갔다. 그때 지금 함께 일하는 회사 이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사님이 “‘여자, 정혜’라는 영화 예고편에 푸딩의 ‘Maldive’가 삽입될 거고, ‘내가 살았던 집’이라는 TV 문학관에 푸딩 전체음악을 쓰일 것이며, ‘러브토크’라는 영화에 음악감독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누가 요청을 했냐고 물었더니, 이윤기 감독이라고 했다. 그땐 이윤기 감독님도 데뷔 초반이라 사실 잘 몰랐다. 그러다가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올 때 즈음 ‘여자, 정혜’에 푸딩 음악이 쓰였고, 한국에 도착한 날 푸딩 음악이 삽입된 ‘TV 문학관’이 상영됐고, 바로 다음 날 이윤기 감독님을 만났다. 그렇게 영화와 인연이 시작됐다.

Q. 지금 부산에 살고 있다고. 그런데 성신여대 전임교수이고.…
김정범:
총장님도 인터뷰 때 비슷한 질문을 하셨다. ‘언제까지 부산에 있을 겁니까’ 라고.(웃음) 내가 전임교수가 될 때는 반은 걱정 반은 궁금해 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부산이 좋다. 일주일에 몇 번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고 있다.


Q. 장거리 이동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부산에 있는 건가. 혹시 공간이라는 것이 당신의 음악 작업에 중요한 요소인가.
김정범:
맞다. 푸디토리움부터 뉴욕에서 음악작업을 했는데, 그러면서 공간이라는 게 나에게 아주 중요하게 됐다. 나는 사실 ‘영감을 받는다’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했었다. 영감을 느끼며 살았던 적이 없었거든. 푸딩으로 활동할 때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혼자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때는 컴퓨터로 찍어낸 듯한 정확한 음악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열고 타인의 것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푸디토리움 앨범부터였다. 그때, 다양한 것들에 눈을 뜨면서 영감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속한 공간에 나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느꼈다. 귀국하면서 그 공간을 찾았는데, 나에겐 부산 해운대였던 거다.

Q. 당신을 자극하는 것은 바다인가.
김정범:
바다는 나에게 절대적이에요. 뉴욕도 그렇고 보스톤도 그렇고 바다와 접해있다. 바다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런 도시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최근 이효리 같은 분들이 제주도에 내려가 살면서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많이들 관대해졌다. 예전에는 지방으로 간다고 하면 음악을 포기하고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진짜 음악’을 잘 하려고 간 거였는데. 그때 회사에도 그렇게 말했었다. “제가 음악을 포기한다면, 그땐 서울에서 살 겁니다”라고.

Q. 감독 하정우의 음악에 대한 이해도는 어떤 것 같나.
김정범:
음악을 진짜 좋아한다. 촬영장에서 씬들이 넘어갈 때마다 음악을 트셨다.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아 보인다. 이해도보다 더 중요한 게 좋아하는 거거든. 음악을 진짜 좋아하기 때문에 또 많이 알 수밖에 없는 거고. 그리고 하 감독은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음악 뿐 아니라 그림도 그리지 않나. 그의 행보를 보면 단순한 배우이기 이전에 크리에이터라는 생각이 든다.

Q. 가까이에서 지켜 본 배우로서의 하정우, 그리고 감독으로서의 하정우는 다른가.
김정범:
솔직히 말하면 그 분은 더 이상… 더 이상 나에겐 감독으로도 배우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난 3개월 동안 가장 많이 접한 목소리가 하정우 감독 목소리다. 한 사람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공포감이란…그것도 남자의…(일동 웃음) 그 분도 영화 대사를 모두 다 외우고 있지만, 나 역시 다 외우고 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함께 얘기를 했고,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액션으로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대사 고쳤네?’ ‘한 호흡 빨리 했네?’ ‘시나리오 5번 잘라냈네?’ 그런 식으로 영화를 보게 되다보니, 나는 모니터 할 때도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걸 또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날 아는 거다.
김정범
김정범
Q. 계속 함께 작업하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웃음)
김정범:
하하하. 내가 배우로서의 하정우에게 가장 크게 빠졌던 영화는 ‘용서 받지 못한 자’(감독 윤종빈) 때다. 왜 그 작품을 기억하냐면, 2005년에 ‘러브토크’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갔는데 당시 ‘러브토크’ 앞에 ‘용서 받지 못한 자’ 포스터가 도배돼 있었다. ‘(이 영화)뭐지?’ 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 영화도 너무 좋았다. 이후엔 아는 사이가 되면서 배우라기보다는 친밀한 친구 같은 느낌이 크다.

Q. 그나저나, 푸딩은 해체됐다고 봐야할까. 지금은 1인밴드 푸디토리움으로만 활동 중인데.
김정범:
해체는 유명한 분들이 하는 거고.(일동 웃음) 나는 그냥 안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Q. 한창 감수성 예민할 때, 푸딩 1집 ‘If I Could Meet Again’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푸디토리움 1집 ‘재회’ 영상을 보고 다시 당신의 음악에 매료됐다. ‘멋진 하루’ OST 역시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끼는 앨범이고. 항상 궁금했다. 그런 감수성은 어디에서 오는지.
김정범:
일단, 감사하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다. (스톰프뮤직 동료에게) 그렇지 않나. (“감성적이진 않지만 섬세한 건 있다”는 동료의 언급에) 아, 섬세할 수는 있겠다.

Q. 당신이 생각하는 섬세한 것과 감성적인 것의 차이는?
김정범:
섬세함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짚으며)여기 때가 끼었네?’ 하는 것이고, 감성적인 것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 눈물이 ‘툭’ 떨어지는 그런 거?(웃음) 그런데 나는 그러지는 않거든. 다만 음악을 일기처럼 생각하는 게 있다. 개인적으로 겪은 부대꼈던 감정들이 음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게 아닌가 싶다.

Q. 푸디토리움 3집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언제 만날 수 있는 건가.
김정범:
일단 이윤기 감독님의 ‘남과 여’(전도연 공유 주연)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지금 촬영이 중반 정도 넘어간 걸로 아는데, 2월에 영화 촬영이 끝난다. 그때부터 영화음악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될 것 같다. 푸디토리움은 ‘남과 여’가 끝나고 들어갈 예정이다.

with 하정우② 이태리에서 돌아온 민무제, ‘언리미티드’(인터뷰)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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