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에서 계속) 밴드 크랜필드의 음악중심인 리드보컬 이성혁은 1984년 4월 22일 대구광역시 달성구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차장을 운영했던 부모님은 집에서 반대했던 결혼을 한지라 대구는 그들 가족에게 일종의 도피처였다. 놀랍게도 그의 기억 속에는 대구에서 어머니 등에 업혀 있다 택시 문에 손이 끼어 다친 2살 때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어린 시절 장난꾸러기였던 그는 사고가 많았다. 한번은 어머니가 운영했던 포장마차에서 칼로 패트 병을 찌르는 장난을 치다 왼팔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5살 때 부산으로 이주해 성장한 그는 그림을 잘 그리고 공부도 곧잘 했다. 부산 모라초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영재로 통했던 그는 학예회, 운동회 등 각종 학교행사에 대표로 나섰던 밝고 명랑한 성격의 아이였다. 1학년 때 누나가 길보드 리어카에서 사온 해적판 카세트를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과 이현우의 ‘꿈’은 그가 처음 접한 대중가요였지만 감흥이 크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외국 팝송을 들었다. “음악을 찾아듣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집에 마이크가 하나 있어 누나가 라디오를 틀고 녹음을 했는데 신기했습니다. 집에 아버지가 없을 때면 전축에 붙어있는 마이크로 혼자 DJ처럼 직접 노래를 소개하고 불러 녹음하는 재미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이성혁) 그가 집 보다는 학교생활을 더 좋아했던 것은 지금껏 공포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아버지의 존재 때문.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그의 아버지는 근 10년 동안 사업부진으로 낙심해 알코올중독에 빠졌었다.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렸던 그의 성격은 어둡게 변해갔다. 그 때문에 중3때까지 이성혁은 정상적으로 성장을 하지 못해 발육이 더딘 작고 왜소한 초등학생 같았다. 재송중 2학년 때 심각한 동생의 상태를 보다 못한 누나의 신고로 아버지는 아동학대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한번 때리기 시작하면 아버지의 폭력이 기절할 때까지 이어져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정도였습니다. 출감 후 아버지는 찾아오셨지만 무서워서 저희 가족은 도망 다니기에 바빴죠. 그런 아버지를 피해 저희 가족은 늘 도망을 다녔기에 저는 학년마다 학교가 달랐습니다. 아마 20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을 겁니다.”(이성혁)
법원으로부터 가족접근금지명령을 받은 그의 아버지는 고향 제주도로 내려갔지만 다시 술독에 빠져 결국 2010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이성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제주도에 가 본적이 없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공연 제의가 들어와도 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공포심 때문이다. “돌아가신 것도 반년 뒤에 알게 되었기에 아버지와는 화해를 못하고 영영 이별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극복해야겠지만 아직 제주도라는 땅에 발을 딛기에는 숨부터 막혀오기에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어려운 일입니다.”(이성혁)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지금도 극복하기 힘든 삶의 거대한 장벽이다.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는 궁핍해졌지만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행복감을 느꼈다. 아버지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는 항상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남아 있는 위축된 생활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림 그리기는 그에게 자기 치유의 과정이었다.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남녀공학인 웅상고에 입학했다.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일본 에니메이션과 만화에 빠져든 그는 유년기를 지배했던 공포와 불안의 악몽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밝고 활달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조용하고 부끄럼 많은 소년으로 변한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싫어했었다.
반전의 계기가 발생했다. 고1 수련회 때 같은 반 친구들에 떠밀려 학급대항 장기자랑에 나갔다. 당시 화제였던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가사를 급히 외워 무대에 올랐다. 노래는 엉망진창이었지만 객석으로 내려가 열정적으로 춤을 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단숨에 ‘울트라맨’이란 별명을 얻으며 학교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그때 왜 친구들이 저를 지목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때 객석에 300명 정도 있었는데 제가 어떻게 객석에 내려가서 그런 선동 질을 할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미스테리입니다.(웃음)”(이성혁)
한 번 맛 본 무대의 짜릿함은 여운이 강력했다. 고2가 되면서 그는 20만원을 주고 구한 싸구려 콜트 일렉트릭 기타를 둘러메고 또다시 대강당 축제 무대에 올랐다. 기타를 칠 줄 몰랐던 그는 엇박자를 연발하며 엉망진창으로 노래를 하며 객석으로 뛰어내리는 퍼포먼스를 재현했지만 의외로 결과는 참담했다. 1학년 때와는 달리 아이들의 반응이 썰렁했던 것. “바보같이 기타를 사면 그냥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연습을 했지만 기타 줄을 튜닝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그냥 1학년 때 저를 흥분시킨 열광적인 반응만 생각하면서 엉망으로 공연을 한 후,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한심해 강당 뒤로 나와 엉엉 울었습니다. 오기가 생겨 그때부터 혼자 기타연습을 열심히 했지만 실력이 붙질 않더군요. 솔직히 기타코드라는 것도 기타를 산 후 1년이 지나서야 알았을 정도니까요.(웃음)”(이성혁)
이후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던 친구 김장환에게 기타 코드를 배웠다. 졸업반이 되면서 급하게 같은 반 친구들과 5인조 밴드를 결성해 제법 그럴 듯하게 공연을 치렀다. 음악을 하면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미술학원에 다니며 착실하게 입시준비를 했다. 경성대 디자인과에 진학해 지금의 멤버들인 베이스 정광수와 드럼 지수현을 만났다.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광수를 처음 만난 후 급속도록 친해졌습니다. 선배, 동기들이 저희 둘을 고등학교 동창으로 착각했을 정도였죠.”(이성혁) 정광수를 꼬셔 2인조 밴드 공중분해를 결성했다. 이성혁은 기타를 치고 정광수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 학과에서 제법 유명해졌다.
당시 음악과 그림에 관심이 지대했던 이성혁과는 달리 정광수는 영화광이었다. 지수현은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학과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캐논변주곡의 가야금 등 버전별 음악을 정광수에게 들려주며 설명했다. 옆자리에 있던 지수현이 관심을 보이며 CD를 빌려달라고 했다. “성혁이는 cd가 많았는데 하나씩 빌려서 들으면서 밴드 음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지수현) 정광수의 영향으로 이성혁은 잠시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분야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세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part3으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이성혁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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