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에서 이어짐) 빅베이비드라이버의 음악여정 중 6년의 공백기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그녀 개인에겐 가장 힘겨운 시기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장과 발전을 이룬 뮤지션으로 거듭났기에 음악에 대한 불확실한 개념을 정립시킨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대학원을 수료했던 당시,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다. 2002년 10월 한인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취업을 했다. 중국 ‘항저우’ 인근의 전 세계의 소비 자제의 도소매시장이 밀집해 있는 엄청난 무역 중심도시 ‘이우’로 파견근무를 떠났다.
중국 현지에서 수출을 할 물품을 선택해 공장에 오더를 넣고 검수와 감수 작업을 거쳐 국내와 베네수엘라로 보내는 바이어 역할을 했다. “1년 정도 중국 사람과 상대했는데 언어문제로 힘들었습니다. 샘플을 보고 구입여부를 결정해 공장에 오더를 넣는 작업과정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죠. 특히 중국 제품은 10중에 9개는 불량품이라 반품시키고 쪼아야 하는 일상이 너무 힘들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2003년 가을에 퇴사를 하고 귀국했다.
두 달 정도 집에서 쉬던 중, 집에 있던 ‘콜트 어스100’, ‘빅베이비’ 기타를 치며 자작곡 만들기에 빠졌다. 아톰북 1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대부분 이때 만든 노래들이다. 다시 라이브클럽 빵을 찾아가 아톰북을 재결성할 생각으로 배인수와 정호정에게 연락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일로 바빠 흐지부지 되었다. 그때부터 혼자서 무대에 오르거나 음악친구 한 두 명과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앉으면 바로 노래를 만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빅베이비드라이버’란 예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가끔 ‘독드라이버’라고 쓰기도 했습니다.(웃음)” 음악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선드라이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2004년 밴드 네눈박이나무밑쑤시기 멤버들이 그녀를 인디레이블 비트볼에 소개해 앨범 녹음을 했다. 밴드 코코어의 기타 황명수가 프로듀싱을 맡아 진행하다 엎어버렸다. “아톰북이나 빅베이비드라이버로 음반을 내려고 했었죠. 표면적으로는 하기 싫어서였지만 프로듀서와 진행과 피드백에 관한 소통이 전혀 되질 않았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일을 쳐내고 노래에만 집중해야했는데 제가 사람들과 관계의 테크닉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북아현동 집 부근에 작업실을 차려 디 애스(THE ASS) 1집 ‘On The Porch’ 제작을 도와주었다. 이후 장난스럽게 인디레이블 ‘핑퐁사운드’를 창설해 ‘아마추어 증폭기’ 1집을 제작하며 제작자로의 변신은 도전과 좌절이라는 극과 극을 경험시켰다. 선드라이 레코드가 2004년에 처음 시작한 한국콘텐츠진흥원 인디밴드 음반제작지원 프로젝트로 지원금을 받아냈다. 음악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솔로가수 레이디 피쉬 2집에 프로듀서로 참여해 음반제작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했다. “아톰북 활동을 그만두면서 음악은 내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남의 음악을 제작하는 작업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작은 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나 음반 홍보 등 사업적으로 너무 미숙했습니다. 실수로 CD를 구워놓고 보니 마스터가 잘 못된 적도 있었죠. 처음엔 100만원이었던 빚이 점점 커져 1,000만원이 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땐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저 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저를 믿고 음반을 제작했던 밴드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레이블 활동과 병행해 2005년 결성 초기의 밴드 오르겔탄츠의 베이스로 2007년까지 참여했지만 너무 많았던 행사가 힘들어 음반제작 전에 나왔다. 사업으로 인한 파산은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던 그녀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난 데미지를 안겼다. “월급과 중국에서 모아놓은 돈까지 다 날리면서 딴 세상을 봤습니다. 사회가 너무 냉혹하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아빠에게 이실직고해 해결해주었는데 이후 마음의 빛과 실패 감을 극복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완전 폐인이 되었을 때 이렇게 살다가는 철부지 어린애로 죽겠구나 싶더군요. 집에서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지금 살고 있는 망원동으로 독립해서 나왔습니다.” 2007년 봄에 한 출판사에 취직해 2013년 봄까지 다녔다. “그때까지 내 돈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생활에 대한 현실감이 없어 내 손으로 먹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땐 뭘 할까하는 생각조차도 사치스럽게 느꼈습니다.” 2008년 음악 쪽은 상황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디레이블 일렉트릭 뮤즈 김민규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참 고마운 분이에요. 2002년 데뷔했을 때 클럽 빵에서부터 제 음악에 호감을 표했고 공연기획을 하면 불러주었을 정도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만들어 놓은 음반들을 도와 달라고 가져갔습니다.” 2008년 1월, 혼자 홈레코딩 작업으로 노래들을 녹음해 일렉트릭 뮤즈를 통해 아톰북 1집‘Warm Hello from the Sun’을 발표했지만 공연과 홍보조차 제대로 하질 못했다. “못된 뮤지션이었죠. 그때 찍은 CD 1000장은 지금쯤에야 다 나간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한 것은 음악이 제 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질리지는 않았기에 다시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 불안정해 취미 정도에 머물렀죠. 그래서 최근까지 제가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도 스스로 애매했습니다. 공연도 하기 싫고 누가 너 음악 듣는 것 달가워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이 ‘왜 음악을 하냐?’고 진지하게 물었을 때 대답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part5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빅베이비드라이버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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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현동 집 부근에 작업실을 차려 디 애스(THE ASS) 1집 ‘On The Porch’ 제작을 도와주었다. 이후 장난스럽게 인디레이블 ‘핑퐁사운드’를 창설해 ‘아마추어 증폭기’ 1집을 제작하며 제작자로의 변신은 도전과 좌절이라는 극과 극을 경험시켰다. 선드라이 레코드가 2004년에 처음 시작한 한국콘텐츠진흥원 인디밴드 음반제작지원 프로젝트로 지원금을 받아냈다. 음악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녀는 솔로가수 레이디 피쉬 2집에 프로듀서로 참여해 음반제작에 관한 모든 것을 경험했다. “아톰북 활동을 그만두면서 음악은 내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남의 음악을 제작하는 작업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핑퐁사운드 제작자 시절 자화상 악보 등 사진모음
2004년 3월, 거의 모든 제작 작업을 홀로 진행해 제작된 레이디 피쉬 CD 1,000장을 보수를 대신해 받아 유통시켰다. 이후 2년 동안 밴드 톡식바이어스플루에르아이비, 트위들 덤, 스타리아이드 같은 다양한 장르 음악을 연속해 제작했다. “그냥 재미있게 음악을 해보려 한 건데 사업이 되어 버린 거죠. 음반들은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 반응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음악 하는 사람들이 저를 회사로 생각하고 뭔가를 기대를 하는지라 경제적으로 완전 망해 버렸습니다.” 2005년 말, 산더미처럼 쌓인 빚을 감당할 수 없어 파산을 했다.“제작은 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나 음반 홍보 등 사업적으로 너무 미숙했습니다. 실수로 CD를 구워놓고 보니 마스터가 잘 못된 적도 있었죠. 처음엔 100만원이었던 빚이 점점 커져 1,000만원이 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땐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저 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저를 믿고 음반을 제작했던 밴드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레이블 활동과 병행해 2005년 결성 초기의 밴드 오르겔탄츠의 베이스로 2007년까지 참여했지만 너무 많았던 행사가 힘들어 음반제작 전에 나왔다. 사업으로 인한 파산은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던 그녀에게 경제적으로 엄청난 데미지를 안겼다. “월급과 중국에서 모아놓은 돈까지 다 날리면서 딴 세상을 봤습니다. 사회가 너무 냉혹하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아빠에게 이실직고해 해결해주었는데 이후 마음의 빛과 실패 감을 극복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완전 폐인이 되었을 때 이렇게 살다가는 철부지 어린애로 죽겠구나 싶더군요. 집에서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지금 살고 있는 망원동으로 독립해서 나왔습니다.” 2007년 봄에 한 출판사에 취직해 2013년 봄까지 다녔다. “그때까지 내 돈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생활에 대한 현실감이 없어 내 손으로 먹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땐 뭘 할까하는 생각조차도 사치스럽게 느꼈습니다.” 2008년 음악 쪽은 상황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디레이블 일렉트릭 뮤즈 김민규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참 고마운 분이에요. 2002년 데뷔했을 때 클럽 빵에서부터 제 음악에 호감을 표했고 공연기획을 하면 불러주었을 정도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만들어 놓은 음반들을 도와 달라고 가져갔습니다.” 2008년 1월, 혼자 홈레코딩 작업으로 노래들을 녹음해 일렉트릭 뮤즈를 통해 아톰북 1집‘Warm Hello from the Sun’을 발표했지만 공연과 홍보조차 제대로 하질 못했다. “못된 뮤지션이었죠. 그때 찍은 CD 1000장은 지금쯤에야 다 나간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한 것은 음악이 제 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질리지는 않았기에 다시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 불안정해 취미 정도에 머물렀죠. 그래서 최근까지 제가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인지도 스스로 애매했습니다. 공연도 하기 싫고 누가 너 음악 듣는 것 달가워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이 ‘왜 음악을 하냐?’고 진지하게 물었을 때 대답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part5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빅베이비드라이버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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