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4에서 이어짐) 이별을 통고받았던 미미시스터즈는 장기하와 얼굴들 2집에서 코러스를 더 잘해보려는 욕심으로 보컬레슨을 받고 있었다. “다음 날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보컬레슨을 받으러 가는데 때마침 눈이 비와 섞여서 펑펑 내리더군요. 너무 서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큰미미) 수원여대에서 신중현에게 음악을 배운 첫 보컬트레이너 나정신은 “내가 이력서를 쓰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미미가 아닌 미미시스터즈의 보컬트레이너라고 쓸 거다”라고 그녀들을 다독거려 주었다.
보컬 트레이너의 그 말에 완전하게 위로가 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적잖이 감동했다. “그때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저희들은 1집을 낼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전에는 음악을 그저 취미로 했던 것이 사실이고 독집을 내더라도 장기하와 얼굴들의 유닛처럼 생각했는데 오기가 생겨 좀 더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게 되었습니다.”(큰미미) “저는 그날 보컬 레슨을 접고 홍대 정문 앞에 와일드 와사비라는 회전초밥 집에서 하루 종일 울면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30년 쯤 뒤에 여성 월간지 같은 곳에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작은미미)
이별의 순간은 슬프고 서러웠겠지만 장기하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장기하와 얼굴들 1집 때와 같은 코믹 콘셉트로 활동을 지속했다면 장기하는 물론이고 미미시스터즈에게도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밴드 음악에 집중한 장기하는 2집에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비로소 음악적으로 인정받았고 자의는 아니었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독립한 미미시스터즈는 단순한 퍼포머와 가수를 뛰어넘어 노래를 창작하는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지 않았는가!
퍼포머는 뮤지션의 악세사리 같다는 느낌에 굴욕감을 느낀 미미시스터즈는 자신들만의 음악을 해야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무엇보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 끔찍하더군요.”(큰미미) 그때 로다운30 윤병주가 1집 타이틀이 된 ‘대답해주오’를 써주었다. 서울전자음악단 신윤철은 바니걸스의 데뷔곡 ‘우주여행’을 리메이크 해주었다. 크라잉넛 한경록도 함께 투어 다닐 때 장기하와 같이 부르라고 만들어준 ‘미미’가 있었다. 마치 결별을 예언하는 것처럼 후렴구에 ‘미미 괜찮니 비에 젖은 풍뎅이처럼 내일 모레면 모든 게 잘 될지도 몰라’라는 대목이 있었다. 붕가붕가 곰사장에게 자신들의 독집 제작을 제안했다.
미미시스터즈 1집 시절 홍대클럽 공연 2011년
“솔직히 음반이 잘 안될 수도 있는데 왜 제작을 하려는지 물었어요. 그때 곰사장님이 ‘사람이 살면서 한번 쯤 그냥 이유 없이 해야 되는 일이 있는 거다‘라고 말했죠. 감동받았습니다.”(큰미미) 선뜻 1집 제작제안을 수락한 곰사장은 미미시스터즈 1집에 예산을 1500만원이나 썼다. “너희가 쓰는 글 자체가 음반의 콘텐츠라 해서 성장기에 대한 글도 써서 화려한 패키지로 갔습니다.”(작은미미) 같은 레이블에 있던 장기하도 2집을 준비하고 있어 조바심이 났다. “탈퇴사실을 반 년 후에 밝혔기에 장기하와 얼굴들보다 음반을 빨리 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에 쫓기듯 말이죠. 회사도 짤린 것보다 독립했다는 걸 이 음반으로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해줘 뭉클했습니다. 그래서 곰사장님에게 지금도 마음 깊이 고맙고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큰미미)미미시스터즈는 더 많은 뮤지션들과의 친분을 쌓으며 많은 음악을 듣게 되었다. “하세가와에게 일제 에피폰 기타를 사고, 한국의 60-70년대 가요를 소개 받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윤병주 오빠의 펌프질로 아이팟 클래식을 샀는데 160기가 가득 음악을 채워주시더군요. 스무살 때부터 그 때 그 때 만나는 오빠들의 영향으로 다양한 음악을 듣긴 했지만, 저희 1집 준비 때는 정말 어마어마했었습니다.”(작은미미)
좌절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본격적으로 미미시스터즈 1집 준비에 들어갔다. 큰미미는 보컬레슨과 더불어 루키밴드 후추스의 보컬 김정웅(당시 오부라더스 기타)에게 블루스 기타를 배우면서 간단한 로큰롤 멜로디와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비온 뒤 어느 날, 집 옥상에서 미미시스터즈는 하세가와 요헤이와 맥주를 마시며 본 ‘탐탐 클럽’과 ‘B-52’의 최근 라이브 영상을 보고 60대의 나이에도 건재한 언니들에게 충격을 받았다. “우리도 반드시 할머니 밴드가 되어서 글래스톤 베리에 가자는 다짐을 했습니다.”(큰미미)
2011년 1집 ‘미안하지만…이건 전설이 될 거야’를 발표했다. 몇몇 남자들과 썸과 연애를 반복하며 음악의 소재를 얻어 1970년대 가요의 충실한 재현에 무게를 둔 앨범이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첫 앨범에서 그녀들의 기획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음악을 지배한 것은 프로듀싱을 맡은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와 피처링으로 참여한 김창완, 로다운 30, 크라잉넛, 서울전자음악단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었다. 패션지와 화보촬영, 인터뷰도 많이 했고 기사도 많이 났지만 미미시스터즈의 독립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미미는 음반에 참여한 선배들과 지속적인 활동이 불가능해 ‘미남미녀’라는 세션 개념의 밴드를 운영했다. “라이브에 대한 자신감도 없고 1집에서 운영은 주도적으로 했지만 음악은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지요. 초짜들이 한 밴드도 힘든데 네 밴드랑 진행할 정도로 용감해서인지 많이들 도와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오빠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어 홀로서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작은미미)(파트6로 계속)
미미시스터즈 펜타포트록페스티발 공연 중 선글라스 벗는퍼포먼스 2014년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사진제공. 미미시스터즈, 의상협찬=MANGO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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