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컬 트레이너의 그 말에 완전하게 위로가 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적잖이 감동했다. “그때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저희들은 1집을 낼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전에는 음악을 그저 취미로 했던 것이 사실이고 독집을 내더라도 장기하와 얼굴들의 유닛처럼 생각했는데 오기가 생겨 좀 더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게 되었습니다.”(큰미미) “저는 그날 보컬 레슨을 접고 홍대 정문 앞에 와일드 와사비라는 회전초밥 집에서 하루 종일 울면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30년 쯤 뒤에 여성 월간지 같은 곳에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작은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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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머는 뮤지션의 악세사리 같다는 느낌에 굴욕감을 느낀 미미시스터즈는 자신들만의 음악을 해야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무엇보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 끔찍하더군요.”(큰미미) 그때 로다운30 윤병주가 1집 타이틀이 된 ‘대답해주오’를 써주었다. 서울전자음악단 신윤철은 바니걸스의 데뷔곡 ‘우주여행’을 리메이크 해주었다. 크라잉넛 한경록도 함께 투어 다닐 때 장기하와 같이 부르라고 만들어준 ‘미미’가 있었다. 마치 결별을 예언하는 것처럼 후렴구에 ‘미미 괜찮니 비에 젖은 풍뎅이처럼 내일 모레면 모든 게 잘 될지도 몰라’라는 대목이 있었다. 붕가붕가 곰사장에게 자신들의 독집 제작을 제안했다.
미미시스터즈 1집 시절 홍대클럽 공연 2011년
“솔직히 음반이 잘 안될 수도 있는데 왜 제작을 하려는지 물었어요. 그때 곰사장님이 ‘사람이 살면서 한번 쯤 그냥 이유 없이 해야 되는 일이 있는 거다‘라고 말했죠. 감동받았습니다.”(큰미미) 선뜻 1집 제작제안을 수락한 곰사장은 미미시스터즈 1집에 예산을 1500만원이나 썼다. “너희가 쓰는 글 자체가 음반의 콘텐츠라 해서 성장기에 대한 글도 써서 화려한 패키지로 갔습니다.”(작은미미) 같은 레이블에 있던 장기하도 2집을 준비하고 있어 조바심이 났다. “탈퇴사실을 반 년 후에 밝혔기에 장기하와 얼굴들보다 음반을 빨리 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뭔가에 쫓기듯 말이죠. 회사도 짤린 것보다 독립했다는 걸 이 음반으로 알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해줘 뭉클했습니다. 그래서 곰사장님에게 지금도 마음 깊이 고맙고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큰미미)ADVERTISEMENT
좌절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본격적으로 미미시스터즈 1집 준비에 들어갔다. 큰미미는 보컬레슨과 더불어 루키밴드 후추스의 보컬 김정웅(당시 오부라더스 기타)에게 블루스 기타를 배우면서 간단한 로큰롤 멜로디와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비온 뒤 어느 날, 집 옥상에서 미미시스터즈는 하세가와 요헤이와 맥주를 마시며 본 ‘탐탐 클럽’과 ‘B-52’의 최근 라이브 영상을 보고 60대의 나이에도 건재한 언니들에게 충격을 받았다. “우리도 반드시 할머니 밴드가 되어서 글래스톤 베리에 가자는 다짐을 했습니다.”(큰미미)
2011년 1집 ‘미안하지만…이건 전설이 될 거야’를 발표했다. 몇몇 남자들과 썸과 연애를 반복하며 음악의 소재를 얻어 1970년대 가요의 충실한 재현에 무게를 둔 앨범이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첫 앨범에서 그녀들의 기획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음악을 지배한 것은 프로듀싱을 맡은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와 피처링으로 참여한 김창완, 로다운 30, 크라잉넛, 서울전자음악단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었다. 패션지와 화보촬영, 인터뷰도 많이 했고 기사도 많이 났지만 미미시스터즈의 독립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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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시스터즈 펜타포트록페스티발 공연 중 선글라스 벗는퍼포먼스 2014년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사진제공. 미미시스터즈, 의상협찬=MANGO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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