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는 재치 있는 달변가였고, 솔직담백한 쾌남이었다. 컴백까지 굴곡도 우려도 많았다. 어쩌면 데뷔 최대 위기였다. 20일 오후 서울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그랜드볼륨에서 열린 정규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 발매기념 첫 기자회견에서 서태지는 컴백하기까지 힘들었던 심정, 앨범 제작 과정,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신비주의는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먼저 ‘해피투게더’를 통해 컴백한 것에 서태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전부터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토크쇼를 했고, 이번에는 유재석과 함께 하면서 화제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9집은 전보다 더 대중적인 음악이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어서 활동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서태지의 말처럼 새 앨범은 전보다 대중적인 편이다. “제 성격이 변화를 좋아해요. 이번에는 가족들과 같이 지내면서 내 마음 속에 여유가 더 생겼고, 행복감을 많이 느꼈죠. 9집은 제 딸 삑뽁이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죠 그게 지금 내가 잘하고, 관심 있는 음악이기도 해요.”
신곡 ‘소격동’ ‘크리스말로윈’은 음원차트에서 후배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8집 때에도 음원성적은 저조했다. 그래서 이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아이유 덕분에 ‘소격동’이 1등을 했고 ‘크리스말로윈’도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며 “음악을 성적으로 구분하는 것보다 개개인이 듣고 취향대로 판단했으면 좋겠다. 난 학교 다닐 때부터 성적이 안 좋아서 등급나누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자퇴를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서태지는 새 앨범이 음악으로 평가받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음반 나오고 갑론을박 토론하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전 그런 게 정말 좋아요. ‘이 노래는 정말 병신 같아’ ‘이건 천재적인데’ 이렇게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고 좋은 거죠. 그게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양현석 대표가 수장으로 있는 YG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들과 음원 공개가 겹치면서 둘의 사이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돌았다. “공교롭게 겹친다”는 질문에 서태지는 “공교롭게라고 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상한 기사가 났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하루에도 많은 가수들의 음악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YG, 양군, 우리 양군이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라고 말했다.
앞선 콘서트에서 서태지는 신곡 ‘나인티스 아이콘’을 부르기 전에 자신을 한물 간, 별 볼일 없는 가수라고 말해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노래를 소개하는 멘트이지만, 제 진심이 담긴 멘트이기도 해요. 저는 음반 만들 때마다 좌절을 하는 스타일이에요. 7집을 만들 때에도 좌절을 많이 해서 ‘제로’ ‘로보트’와 같은 곡에서 그런 심정을 고해성사하듯이 말하기도 했고요. 나이가 들면서 90년대처럼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물론 이번 음반은 제 마음에 들어서 나오게 된 것이지만요. 이제는 저도 주변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대신에 더 소중한 추억이 있으니까….
서태지는 발빠르게 해외 트렌드를 받아들여 ‘대중음악계의 문익점, 수입업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일정 부분 맞는다고 생각해요.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요. 시대적으로 90년대 초에 한국에 장르가 다양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해외 장르를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익점의 마음이 있었죠. ‘최초의 수입업자’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작업은 7집까지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8집부터는 그런 작업에서 손을 내려놨어요. 8집은 영향 받은 팀이 거의 없이 제 안에서 해결하려 했죠. 9집도 마찬가지고요. 1집부터 레퍼런스들이 많았는데, 이번엔 없어요.”
신보에서는 일렉트로니카의 하위 장르인 트랩, 덥스텝의 영향이 느껴진다. 이에 대해 서태지는 “내 음악을 유심히 들은 이들은 내가 리믹스 작업 등을 통해 전자음악을 계속 해온 것을 알 것이다. 내가 전자음악을 가장 좋아했던 시기는 ‘환상 속의 그대’의 테크노 리믹스 버전을 작업할 때였다. 그래서 내 스튜디오 이름도 ‘테크노티’”라고 말했다. 이어 “새 음반은 서태지와 아이들 작법처럼 건반으로 곡을 만들었다. 그래서 신디사이저가 중요한 사운드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나위 이전부터 록을 했기 때문에 나의 록에 대한 심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태지가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근 인터넷에 떠도는 표절 의혹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서태지는 “표절은 굉장히 오래 된 이야기다. ‘난 알아요’ 때부터 밀리 바넬리 표절했다는 이야기 있었다. 답부터 말하면 당연히 표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해명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표절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려면 하루종일 말해도 모자라다. 언젠가는 그런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음악을 많이 들어보고 판단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서태지는 새 앨범의 모티브를 본인의 딸이라고 밝혔다. “이번 앨범은 제 딸이 들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소격동’은 제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크리스말로윈’에서는 적나라하게 세상은 녹록지 않으니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나인티스 아이콘’은 아버지가 예전에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고요. 스토리텔링 속에 한 소녀가 있는데 그게 제 딸이에요. 음반재킷도 딸의 7살 정도의 모습을 담은 겁니다. ‘성탄절의 기적’은 태교음악으로 만들었어요.”
서태지는 지금 자신이 더 이상 문화대통령이 아니라고 했다. “문화대통령는 분명히 지금의 수식어는 아니에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거죠. 과분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족쇄와 같이 느껴졌어요. 지금도 문화대통령이라면 장기집권 아닌가요? 누군가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난 선배로서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편하게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이어 서태지는 “서태지의 시대는 90년대로 끝났다”라고 말했다. “사실이에요. 2000년대에 솔로로 컴백했지만 대중적이 음악을 하지 않고 마니악한 걸 했죠. 제 음악이 어려워져서 안 듣기 시작한 것이 ‘울트라맨이야’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서태지와 아이들 팬에게 마음속으로 미안했어요. 하지만 ‘나인티스 아이콘’ 노래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전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음악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요.”
서태지는 여전히 이슈의 중심에 서있다. 하지만 본인은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아무러면 어떠냐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악플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쿨’한 반응을 보였다.
“오래된 안티 팬들이 있죠. 음반만 내면 팬과 안티 팬의 콜라보레이션이 일어나요. 굉장히 재밌죠. 9집을 내기까지 아주 심오한 과정이 있었잖아요.(웃음) 제가 떡밥을 많이 던졌잖아요. 진수성찬을 차린거죠. 중요한 것은 음악이고 나머지는 가십이라고 생각해요. 지나가면 잊힐 일들이죠. 그런 관심 때문에 제 음악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본다면 그런 콜라보레이션은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변지은 인턴기자 qus1228@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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