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에서 이어짐) 미미시스터즈는 음악과 팀 운영에 있어 리더를 두기보단 서로의 의견을 조율해 합의점을 이끌어내고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하는 협업 시스템으로 꾸려간다. 친화력과 기획력이 출중한 큰미미는 서울 강북구 쌍문동에서 계몽사에서 근무하다 실내건축 일을 했던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매일같이 책을 읽어달라고 졸라댔던 그녀는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해 주위의 걱정을 샀을 정도.



목소리가 근사했던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책을 읽어주며 녹음해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 영향 때문일까?! 그녀는 4살부터 책을 줄줄 읽기 시작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육필로 작성한 2만여 장의 원고지를 집 한구석에 쌓아두었던 아버지는 그녀의 창작열을 자극시켰다. 6살 때부터 일기 200원, 수필 300원, 동화 500원이라는 파격적인 고료를 제시했던 것. 엄정행의 가곡과 폴 앵카,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올드 팝과 이태리 칸초네를 즐겨들었던 아버지와 함께 자연스럽게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또한 가곡집, 성가집을 펴놓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던 큰미미는 천상의 목소리 같았던 수녀님의 노래에 반해 매일같이 성당에 나갔다. “늦잠을 자 새벽미사에 참석 못한 날은 엉엉 울었을 정도로 수녀님이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에 반해 수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을 정도였습니다.”(큰미미)



서울 우이동 백운초등학교 5학년 때, 평화방송 백일장에 참가해 자작시 ‘어머니’로 차상을 수상했다. 부상으로 CD 플레이어를 받아 처음으로 이상은의 ‘더딘하루’, ‘사운드오브뮤직 O.S.T’ 음반을 구입했다. 당시 동네 언니의 다락방에 놀러가 라디오를 함께 들었다. 당시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애청자였던 그녀는 015B, 낯선사람들, 고찬용, 조규찬, 김현철, 빛과 소금 등 단골 게스트들과 수다 떠는 기분으로 카세트에 자신의 멘트와 선곡한 음악을 녹음했다. “다양한 프로그램 구성안을 상상하는 혼자놀이에 빠져들면서 열혈 라디오 키드가 되었죠. 게스트에 대한 캐릭터 탐구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큰미미)



도봉동으로 이사해 창동중에 진학해서도 또래랑 노는 것을 유치하게 생각했다. 오락부장을 맡으면서 감춰진 끼를 폭발했다. 조규찬이 진행했던 kbs 라디오 애청자 노래경연에 출연해 이문세, 고은희의 ‘이별이야기’를 불렀던 것은 특별한 캐릭터로 살아야겠다는 조숙했던 생각 때문. “저는 중학교 때 다 컸던 것 같아요, 책도 읽을 만큼 읽어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고 싶고 주목받고 싶어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었습니다.”(큰미미) 또한 군에 간 20살 성당 총각선생과 위문편지를 나누며 처음으로 연애감정을 경험했다. “기본이 7장-10장인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대부분 당시에 듣던 라디오와 음악 이야기였어요. ‘어떤 날’ 노래를 강추하는 그 분의 영향을 받아, 외우도록 들었습니다.”(큰미미)



중계동 상명여고로 진학해 ‘사물놀이반’에 들어가 꽹과리, 징을 치면서 리듬 악기의 매력에 빠졌다. 학교 축제와 더불어 타 남학교 학생들과도 공연을 했지만 여전히 또래 남학생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8세 때 성당 학생회 부회장이 되어 크리스마스 문화제 대본을 쓰고 구성 기획을 담당했다. 군에서 제대한 첫사랑과 성당 친구들과 함께 폐가가 되어가는 평택 외가의 과수원 마당에 누워 별을 보고 기타를 치며 밤새 노래를 했다. “첫사랑의 기타와 노래는 제 마음을 울렸죠. 근데 안타깝게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웃음)”(큰미미)



졸업반이 되자 모든 수업이 총각 선생님으로 교체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좋아했던 작문선생님이 추천해준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문화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후, 연극잡지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연극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큰미미) 그래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에 진학했다. “최종 면접에서, 친 할머니의 눈물 나는 인생수기를 희곡으로 쓰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더니 합격시켜주더군요.”(큰미미)


극작과에 다녔던 큰미미는 영상원 시나리오과에 다녔던 작은미미를 학교 앞 막창 집에서 처음 만났다. 학과 사람들과 따로 술을 마시다 우연하게 합석을 했던 것. 20살 꽃띠였던 두 사람은 과 동기들이 모두 30대가 넘어 소외감을 느끼던 차에 나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단숨에 친해졌다. 골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오타쿠 작가 이미지가 싫었던 큰미미는 학교 밖으로 나돌았다. 그때 만난 공연 팀과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인디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크라잉넛 멤버과 친해져 매일같이 밤새 술을 마시면서 홍대 앞을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암 선고를 받으시고,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 너무 슬펐지만 이후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았습니다.”(큰미미)



7년 동안 독립예술제 스태프로 일하면서 많은 장르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했다. 카우치 사건으로 홍대 인디씬이 떠들썩했을 때, 언론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인디 뮤지션들을 싸잡아 매도당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어느 락커의 바지 속 고백’이라는 창작 펑크락 뮤지컬을 집필했던 이유다. 운 좋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대학로 무대에 올렸다. 음악감독을 맡은 킹스턴 루디스카의 최철욱이 작곡을 담당하고, 큰미미가 작사 작업을 했다. 매주 토요일 뮤지컬이 끝난 후, 락타이거스, 킹스턴 루디스카 등 밴드를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큰미미는 인디음악에 깊숙하게 빠져들어 갔다.(PART3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큰미미
의상협찬. MANGO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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