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에서 계속) 파블로프의 리더이자 베이시스트 박준철은 서울 동대문구 이화여대 병원에서 1987년 12월 10일 태어났다. 경찰공무원인 아버지와 개인 사업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집안은 예술과는 100촌도 넘는다. 가끔 친척들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른 것이 음악에 대한 그의 첫 기억. 그의 관심은 따로 있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었던 그는 정신없이 놀다가도 오후 6시가 되면 피구왕 통키, 축구왕 슛돌이 같은 TV 만화영화를 보기위해 어김없이 귀가했던 만화 광이었다.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서 성장한 그는 7살 때 노원구 하계동의 미성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 전 주인이 버리고 간 인켈 오디오로 음악을 들어볼 기회가 얻었다. 당시 이모가 선물한 카세트테이프로 김건모, 신승훈의 노래를 들었던 그는 라디오에서 밴드음악인 지니의 ‘뭐야 이건’을 들었다. 2살 터울의 형 박규철은 음악 메신저였다. 1998년 연촌초등학교 5학년 때, 형을 통해 크라잉넛, 자우림, 델리스파이스, 롤러코스터 등 국내밴드음악을 알게 되었고 그 중 ‘조선펑크’라고 불렸던 노브레인의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박준철 7살때 형과 함께

어릴 때부터 그림과 찰흙으로 뭔가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미술을 배우기 위해 특수학교인 예원학교로 진학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형에게 워크맨을 물려받아 주로 AFKN에서 나오는 음악을 공 테이프에 녹음했습니다. 당시 저녁 8-10시 경에는 클래식 록이 10시 이후에는 최근에 유행하는 록음악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박준철) 당시 학교 친구들 사이에는 크라잉넛과 자우림의 인기가 대단했다. “특히 ‘밤이 깊었네’가 수록된 크라잉넛 3집은 모든 친구들이 CD를 돌려가며 들었어요. 그 음반 때문에 친구 이웅희와 고등학교 가면 밴드부를 해자고 약속했죠. 먼저 기타를 배운 웅희를 따라 방학 때 종로에 있는 실용음악 학원에서 베이스를 배웠습니다.”(박준철)

검정고시를 패스해 서울예고에 진학한 두 친구는 약속대로 밴드부에 들어갔다. “당시 서울예고 음악과는 ‘대중음악을 연주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밴드부는 모두 미술과 학생들이었죠. 그래서 다른 학교보다 열기가 미지근했고 연주를 전혀 못해도 신입회원 오디션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밴드부에서 만난 류준이 Mr.Big의 ‘Green-Tinted Sixties Mind’ 같은 어려운 곡을 연주해 깜짝 놀랐습니다. 중학교부터 밴드부를 해온 조동원, 이웅희, 류준, 조동원과 함께 오디션 첫날부터 여러 곡들을 합주했는데 선배들이 서울예고 밴드부 사상 처음이라 하더군요.”(박준철)

박준철, 류준, 조동원 서울예고시절 밴드부 타락 시절

현재 파블로프의 리드보컬인 오도함은 정식 밴드부원은 아니었다. 헐렁했던 연주자 오디션과는 달리 강당에서 선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보컬 오디션은 진지했다. 당시 유일한 남자 보컬 지원자 오도함은 자우림의 ‘헤이헤이헤이’를 가사 없이 ‘Hey’만 반복해 5분을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빵 터졌어요. 노래도 엄청 못했기에 당연 오디션에서 탈락했죠.(웃음) 덕분에 저희 학년 밴드부는 여자보컬 두 명이 선발되었는데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아 반주하는 저희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박준철)


박준철, 류준, 오도함은 고 1때 같은 반이었다. 당시 교실 구석에서 음악을 들었던 오도함은 목소리가 우렁찼다. 선배들 몰래 오도함에게 보컬을 맡겨 자주 합주를 했다. 당시 서울예고 밴드부 ‘타락’은 음악과의 타악기 실을 함께 사용했다. 드럼 외에도 마림바, 팀파니 등 고가의 클래식 악기가 있어 관리원들은 밴드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타악기 실을 사용할 수 있는 토요일 밴드부 활동 날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마음껏 합주를 했다. “평일에 음악과 학생이 연습한 후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 점심시간 마다 문이 잠겨있는지 확인했어요. 열려 있는 날은 점심시간 내내 합주를 하다 5교시 수업시간을 종종 빼먹기도 했습니다.(웃음)”(박준철) 당시 음악적 욕심이 없어 곡을 만들 생각도 어떤 음악을 해야겠다는 방향도 없었던 이들에게 밴드부 활동은 가장 즐거운 놀이였다.


밴드부 공식보컬이 아니었던 오도함은 학교 축제무대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고3이 되기 전 신촌에 있는 클럽을 빌려 공연을 했다. 공연 타이틀은 Monday Morning Radio. 모든 레퍼토리는 카피 곡이었지만 Jet, Radiohead 등 다양한 장르음악을 연주했다. “첫 공연 후, 자연스럽게 대학에 가면 같이 밴드를 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당시 메탈에 빠져있던 웅희는 빠졌지만 지금도 친한 친구사이입니다. 만약 비주얼이 월등한 그 친구가 음악을 같이 했다면 파블로프의 비주얼 담당 멤버가 되었을 겁니다.”(박준철) 어릴 때부터 화가의 꿈을 가졌던 박준철은 음악을 오래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곡도 하지만 저는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의 멤버들이 아니었으면 인디밴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박준철)

고등학교 졸업 후 밴드 이름을 파블로프를 정했다. 유일하게 재수를 한 박준철로 인해 밴드 활동은 1년이 늦어졌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진학한 2006년 겨울, 관객이 10명 남짓했던 클럽 드럭의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공연을 보러갔다. “공연 후에 종현형에게 ‘우리도 곧 밴드 시작할 겁니다.’라고 말했었는데 같은 소속사가 될 줄도 몰랐습니다.“(박준철) (part3으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박준철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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