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 그래도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기분은 좋을 것 같다. (이범수는 현재 출연 중인 드라마 ‘트라이앵글’ 밤샘 촬영을 하고 인터뷰에 응했다)
‘악역 전성시대’라 할 만큼 매력적인 악역이 쏟아지고 있다.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고, 주인공과 대립하는 것을 넘어 악역만의 매력과 색깔이 더해지고 있다. ‘신의 한 수’ 이범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작은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냉혈한 살수를 아주 매력적으로 만들어 냈다. 영화 보는 도중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뱉을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 정도다. 이범수는 정우성과 반대의 지점에서 ‘신의 한 수’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매력적인 살수가 탄생한 건 이범수가 쏟은 노력의 결과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문신도 압도적인 악역을 위한 그의 아이디어다. “정말 나쁜 놈 같았다”는 말에 “기분 좋다”며 환한 웃음이다.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였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절대 악역을 만들기 위한 이범수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범수 : 맞다. 시나리오 보고 작품 선택을 하고, 많은 과정을 거쳐 ‘짠’하고 나오게 된다. 영화를 봤을 때 시나리오에서 받은 느낌 이상의 영화를 매번 만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받을 당시 생각했던 느낌 이상으로 영화를 봐서 내심 안도했다. 그만큼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기대도 된다.
Q. 영화 전체적인 느낌 말고, 본인의 역할만 놓고 봤을 때 어땠나.
이범수 : 맘에 들었다. 왜냐면 촬영하면서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중 하나가 ‘악역 같아야 한다’는 거였다. 나쁜 놈 같지가 않으면, 설령 연기를 잘했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거다. 또 살수는 긴장감을 조성해야 하고, 늘 긴장감이 있어야 했다.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은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맘에 들었다는 말을 하는 거다.
Q. 근데 정말 의도대로 나쁜 놈 같아 보였다.
이범수 : 기분 좋다. (웃음) ‘짝패’에서 악역을 했었는데 그것과 똑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나. 그때도 열심히 해서 사랑도 받았는데, 어쨌든 또 다른 악역으로 참신하게 다가가야 했다. 그 지점을 극복하고, 근사하게 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감독님과 많이 상의하고, 현장에서 집중해 ‘짝패’와는 다른 악역이 나온 것 같아 이 역시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Q. 정말 악역은 오랜만인데, 사실 악역을 제안받는 경우 자체가 드물 것 같다. 악역 제안이 왔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하다.
이범수 : 시기상 궁합이 잘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했던 작업들을 보면 착하거나 다소 노멀했다. 그때 자극적인 캐릭터를 제안 받은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모처럼 새로운 악역을 연기할 만한 공간이 있겠구나 싶었다. 배우는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작품이나 캐릭터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Q. 그동안 해온 역할도 있고, 외모적으로도 선한 느낌이 크다. 그렇다면, 악한 연기를 할 때 자신만의 노하우나 비결이 있나.
이범수 : 글쎄. 매뉴얼처럼 정해져 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게 아니니까 똑 부러지게 말하긴 어렵다. 내 얼굴 안에 선한 면도 있고, 날카로운 면도 있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무섭고 강인한 얼굴이면 살수 역할에 접근하기 편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가 있다 보니 계속 집중하고, 몰입해야만 했다. 잘못하면 엉뚱하게 나갈 수 있으니까.
Q. 보통 악역을 선택하는 배우들이 ‘이유 있는 악역’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살수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악 자체로 존재한다. 연기하는 입장에선 뭔가 차이점이 있나.
이범수 : 다르다면 다를 수 있고, 같으면 같을 수 있다. 접근하기에 편했던 게 ‘신의 한 수’는 오락 영화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드라마가 아니므로 더 편하게, 과감하게 할 수 있었다. 또 보시는 분들 또한 융통성 있게 받아줄 거란 생각이 있었다. 좀 더 부연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살수만큼은 그냥 알 수 없는 놈으로 가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놈일수록 관객들이 좋아할 것 같았고, 극의 흐름이 재밌을 것 같았다. 자칫 잘못 설명하면 행보가 읽히고, 수가 보인다고 할까. 선택의 몫인데 그런 면에서 이번 작품은 그렇게 하고자 했다.
Q. 방금 말처럼 절대 악처럼 보인다.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설명이 없다.
이범수 : 고민했던 걸 말하자면, 살수의 사연을 자칫 잘못 담으면 통속적일 수 있겠다는 우려가 일었다. 살수가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더 나아가 전체적으로 알 수 없는 불길한 놈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의도에 어울리게 잘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Q. 절대 악으로 비치기 위해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다고 했는데, 그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지 않았나. 영화 찍는 동안에는 그 배역의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나.
이범수 : 정답은 없다. 배우 각자 스타일이다. 과거 학교에서 배울 때, 내가 어떤 역할을 맡으면, 일상생활에서도 그 인물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살아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웃음) 거지 역할을 맡으면 3~4개월 거지로 살아가야 하고, 살인범 역할이면 3~4개월 살인범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면 어떻게 일상생활하겠나 싶다.
Q. 감정적으로는 어떤가. 심각해지거나 우울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범수 : 그것도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좀 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연기할 때 그 역할에 흠뻑 젖어있다면, 일상에서 흠뻑 젖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면 생활인으로 너무나 균형을 잃을 것 같다. 물론 언제든지 (역할에) 젖을 수 있는 촉촉함은 유지해야 한다. 배우들은 현장에서 순간적인 집중력과 폭발력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스타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에너지는 일상에서 소모할 수도 없다. 또 일상에서의 이범수가 있고, 카메라 앞에서의 이범수가 있는 거니까. 늘 젖어 있던 때가 생각난다. 학창시절엔 많이 젖어 있었다. (웃음)
Q. 온몸 문신이 본인 아이디어라고 들었다. 분명히 압도적이다. 징그럽기도 하고, 깜짝 놀랐다. 다소 뜬금없지만, 몸매 자체로는 강한 느낌을 주기 어려워서 문신을 선택한 건가.
이범수 : 그렇다고만 볼 수 없다. (웃음) 살수란 인물은 옷을 입든 벗든, 나쁜 사람으로 보이길 간절히 노력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온기가 없었으면 했다. 갈등도, 망설임도 없고,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도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문신이 이질감과 혐오감을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문신을 하더라도 동네 양아치처럼 하는 게 아니라. 상처, 화상 등도 생각했는데 효과가 크지 않을 것 같았다.
Q. 온몸에 문신을 그리는 것도 일이고, 지우는 것도 일이었겠다.
이범수 : 맞다. 20시간 넘게 하는데…. 눕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문신이 그려진 살색 ‘쫄티’를 입을까도 생각했다. (웃음). 세 분이 문신 분장을 해주셨는데, 실제 두 분은 타투 예술가였다.
Q. 어떤 것들이 그려져 있는 건가.
이범수 : 일본 야쿠자 느낌의 문신이다. ‘미’(美)적인 문신보다 일본 야쿠자에서 볼 수 있는 문신이 더 살벌하고, 냉기가 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쪽 디자인을 택했다.
Q. 캐릭터. 살수 빼고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범수 : 그에 대한 답변을 달리하면, 안성기 선배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주님이 차에서 죽을 때 모습을 보는데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눈 뜬 채로 맹인 연기를 한다는 거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기회만 주어지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다.
Q. 살수의 조직은 조폭 집단이다. 그런데 내기 바둑만으로 조직 운영이 가능할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내기 바둑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이범수 : 판돈이 크지 않을까. (웃음). 내기 바둑 시장이 얼마나 크게 형성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은 크다고 들었다. 여하튼 내기 바둑이라는 게 사기도박이니까 당연히 검은 집단이 관여할만하고, 수억 또는 수십억이 오가는 도박이라면 더욱 구미에 당길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접근했던 거다.
Q. 언론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액션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재밌는 답변을 준비했다고 했는데, 그 답변이 무엇인가.
이범수 : 나한테는 신선한 답변이란 뜻이다. 살수의 성격과 삶이 태석과 전혀 다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부딪힌다는 게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태석과 살수가 같은 정통파라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흥미가 있겠지만, 태석이 정통파인데 살수가 변칙파라면 달라서 오는 흥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태석이 힘이 세다면, 살수는 무척 빠른 칼잡이다. 힘이 센 사람과 빠른 사람의 대결이기에 더 흥미로울 수 있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을 예로 들면, 두 나라가 싸우는데 한쪽에선 거대한 사람이, 다른 한쪽에선 브래드 피트가 나온다. 누가 봐도 거대한 사람이 이길 것 같은데 브래드 피트가 예상을 깨고 빠른 몸놀림으로 달려가서 순식간에 처리하지 않나. 그런 영감을 얻은 거다.
Q. 정우성과는 세 번째 호흡이더라. 그리고 ‘태양은 없다’에서도 한 번 맞붙는 걸로 기억난다. 그러고 보니 이시영과도 ‘홍길동의 후예’에서 호흡을 맞췄다.
이범수 : 반갑다. 서로가 성장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만나 카메라 앞에서 앙상블을 하는 거니까 보람되고 기뻤다. 당사자들끼리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각자 발전된 모습으로 만나 뭔가 만들어보자고 임하니까 기쁘다는 이야기를 우성 씨와 주고받았다. 각자 열심히 잘 살아온 것 같다.
Q. 만약 속편이 나오면, 더는 출연은 없는 것 아닌가. 영화의 엔딩은 분명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말이다.
이범수 : ‘부산에 가자’면서 끝난다. 2탄이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없다고 했다. 궁금증을 주기 위한 재미있는 장치였던 거다. 만약 반응이 좋으면 2탄 어떻게 할 것이냐 물어봤더니 2탄을 찍게 되면, 과거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Q. 근데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는 것 같은데.
이범수 : 그러니까. 집사람도 ‘참 신기하다’고 한다. 뭔가 하나가 들어오면, 과거의 뭔가 하나가 빠져나가야 하는데 빠지는 것 없이 계속 쌓이기만 하니까. 집사람은 그런 나를 좋아하긴 하더라. 한 번 집중하면 잘 빠지는 스타일이다. 3~4년 전 일인데, 당시 기회가 닿아서 미술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6인의 작가가 함께한 전시회인데 총 5점을 출품하기로 했다. 3점은 평소 그렸던 거고, 2점은 새로 그려야 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기한은 점점 다가오고. 집사람이 깜짝 놀랐던 일화인데 저녁때 그림을 시작했는데 18시간 동안 그림 그리는 방에 계속 있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그만큼 빠져 있었던 거다. 그때도 아마 작품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미루고 미뤘던 거지 않았을까.
Q. 미술 작품의 결과물은 어땠나.
이범수 : 2점 팔았다. 그리고 처녀작은 잘 안 판다고 하더라. 청첩장도 직접 그린 거다. 모범사례 청첩장으로 업계 레전드가 돼 있다. (웃음)
Q. 뭔가 이범수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웃음 코드가 있는데 최근엔 그런 모습을 도통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나 ‘오 브라더스’, ‘킹콩이 들다’ 같은 것들은 흥행을 떠나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더라. 사실 이범수 작품 중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는 것들이다. 그게 이범수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이범수 : 의식하는 건 아니다. 착하고 정의로운 걸 하다 보니 연기에 대해 좀 양이 안 찼나 보다. 그런 터에 살수를 만났으니 확 와 닿을 수 있었다. 코믹도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 그렇게 웃기면서 존재감도 있고, 감동도 준다. 이런저런 캐릭터, 장르 다 좋다. 연기 자체가 재밌는 작업이니까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다.
Q. 최근 성적이 신통치 않다. 영화도, 드라마도. 조금 아쉬울 수 있겠다.
이범수 : 아쉽다. 하나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복합적일 것이다. 배우는 연기력을 십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야생마는 달리고 싶어 하는 게 본능이듯. 그런데 근래 했던 작품의 캐릭터적인 면, 배우로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활동 공간적인 면에서 좁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갑갑함을 느꼈을 것이고, 종횡무진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원했을 것이다. 그런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살수를 만나서 모처럼 마음껏 주어진 공간에서 연기했다고 생각하는 거다.
Q. 그런 의미에서 ‘신의 한 수’ 흥행을 좀 더 기대하고 있겠다.
이범수 : 늘 흥행을 해왔다 하더라도 기대를 한다. 우리가 잘해야겠지만, 상대가 또 못해야 하니까. (웃음)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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