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었다. 배우 임호가 ‘왕’이 아닌 ‘충신’을 연기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KBS2 ‘장희빈’, MBC ‘허준’, ‘대장금’ 등 작품에서 인상적인 왕 연기로 ‘왕 전문 배우’라는 수식을 얻었던 임호는 KBS1 ‘정도전’을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연기력에 대한 찬사도 쏟아졌다. 극 중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로 분한 그는 정몽주를 전장을 누비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그린 데 이어, 인간적인 감성까지 담아냈다. 변화의 폭이 큰 인물을 이토록 눈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낸 건 데뷔 22년 차를 맞은 그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분장을 지우고 멀끔한 모습으로 마주한 그의 눈빛에서는 연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묻어났다. 장렬했던 선지교(善地橋) 위 사투와 함께 ‘정도전’에서 하차한 그는 “배우로서 제2막을 열어갈 새 동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천천히 배우로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던 ‘배우 임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Q. 하차 이후 이렇게 인터뷰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몸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는데.
임호: 작년에 MBC ‘스타 다이빙 쇼 스플래시’ 출연 이후 망막 박리가 왔다. ‘정도전’ 촬영 때문에 계속 수술을 미루다가 하차와 동시에 수술했다. 근데 이게 회복 기간이 꽤 걸리더라. 열흘 이상을 씻을 수가 없었으니 인터뷰가 불가할 수밖에, 하하하.

Q. 이인임으로 분한 박영규도 있긴 하지만, 당신도 ‘정도전’의 최고 수혜자 중 한 명이 아닌가 싶다.
임호: 인정한다. 걱정을 많이 했었다. 정몽주가 이인임 이후에 조명받는 역할이었으니까. 워낙 이인임의 인상이 강하게 남지 않았나. 다행히 이성계가 극의 중심으로 오면서부터 정몽주도 함께 기류를 탔다. 다 유동근 선배의 덕이다.

Q. 사실 당신이 사극에서 ‘왕’이 아닌 다른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간 쌓아온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 당신이나 제작진 입장에서도 수를 띄운 게 아닌가.
임호: 배역이 정해지기 전에 시놉시스와 기획을 읽는 데 느낌이 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몽주 역을 하고 싶더라.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왠지 내가 하면 잘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지 않나. 문제는 정몽주가 정도전보다 다섯 살이 많다는 것이었다. 제작진도 이 부분을 놓고 고심하기에 내가 이야기했다, “현대물이면 모르겠는데 사극이니까 (분장하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또 개인적으로는 외양적인 부분보다도 정몽주의 인품, 지력 등 다른 부분의 표현에 집중하면 충분히 공감대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Q. 촬영에 들어가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듯하다. ‘정도전’에는 소위 ‘사극 장인’이라 부르는 분들이 대거 출연하시지 않나.
임호: 그게 오히려 나의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계기가 됐다. 나만 잘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연기하면서 선배님들의 덕을 크게 봤다. 임팩트 있는 장면에서 끌어주고 밀어주시니 나도 연기가 달라질 수밖에. 특히 유동근 선배와 호흡을 맞추는 신이 많다 보니 함께하며 연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됐다.



Q. 어떤 조언이 있었나.
임호: 2~3주가량을 유동근 선배와 단둘이 리허설, 녹화를 같이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선배가 한마디 하시더라, “너무 뻗어 나가려고만 하지 말고 다양하게 해봐”라고. 원래 자세히 알려주는 스타일이 아니라 선문답 식으로 화두만 던져주시는 스타일이다, 하하. 근데 그게 내게 대단히 큰 도움이 됐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뒤따랐나.
임호: 이전에는 너무 분석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니까 자연스러움이 사라졌었다. 마치 야구 투수에게는 커브, 포크볼,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종이 있는데도 나는 직구만 주야장천 던진 격이다. 감정 전달 없이 이야기만 전달하고 있었던 느낌이랄까. 뭔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는 준비과정부터 차이가 생겼다. 대본의 행간을 읽게 된 거지. 특히 대선배님들과 함께하는 대본리딩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분들의 혼이 실린 연기를 보며 겉으로 드러난 배역 이면의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Q. 정말 그렇다. ‘정도전’ 속 인물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정몽주는 흔히 우리가 역사적으로 배워 기억하고 있던 학자의 느낌은 아니었다. 어떤 부분의 표현에 집중했나.
임호: 사료상에도 존재하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정몽주가 굉장한 외교술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명나라 주원장을 비롯해 일본과의 관계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고. 또 전장에 직접 직함을 받고 나가 싸우는 등 뛰어난 실천가이기도 했다. 정몽주라는 인물을 책상만 지키는 인물로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대쪽 같은 정신은 살리되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고루 무장이 잘 된, 그런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Q. 그런 정몽주가 이성계의 상승세를 타고 극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정도전’ 속 정몽주의 전환점이 될 만한 시점은 언제였을까.
임호: 이성계에게 “왜 백성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려고 하는가”라고 따져 물을 때다. 이후에는 그때 터트린 사상의 깊이와 감정의 폭을 그대로 유지해나가는 데 집중했다. 사실 이 모든 게 출연 비중이 작았던 초반부에도 착실히 정몽주의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정현민 작가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 보통 하나의 큰 줄기가 있으면 주변 인물들은 힘을 잃기 마련인데, ‘정도전’에서는 모든 인물이 생명력을 받은 듯 살아 움직였다.

Q. 인물들 간의 입체적인 관계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게 정몽주, 이성계, 정도전의 삼각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시청자들은 그 부분은 ‘남남 케미’라고 부르기도 하더라, 하하.
임호: ‘정도전’ 속 인물의 변주는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시작됐다. ‘정몽주’라는 한 사람이 인간 ‘정도전’, ‘이성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중요했다. 정몽주의 경우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한 쪽은 존경이고, 다른 한 쪽은 존중. 정도전의 사상과 의지는 부정하지 않지만, 대의에 대한 생각은 달랐던 거다. 지금의 왕조를 수성하면서도 국가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게 정몽주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Q. 선지교에서 최후를 맞기 직전 이성계의 마지막 눈물신은 세 사람의 복합적인 관계가 애절하고도 힘 있게 담겼다.
임호: 눈물 참느라 혼났다, 하하.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마음속으로는 많이 울었지만, 내가 거기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건 이성계의 눈물에 담긴 진심을 배반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정몽주는 신념을 지키는 사람으로 남았기에 존중받을 수 있었다.

Q. 만약 당신이 정몽주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나.
임호: 나를 딛고 역성혁명을 하라고 말했을 거다. 역성혁명이 나의 대의가 아니기에 도와줄 수는 없지만, 정몽주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내가 정몽주였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히 그런 상징적인 존재로 남는 길을 택했을 것 같다.

Q. 이방원과 서찰을 주고받는 장면도 이슈가 됐다. 모두가 ‘하여가’와 ‘단심가’가 그런 식으로 극에 등장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임호: 당시 문과까지 급제한 사람들이 면전에서 그렇게 시조를 읊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만의 품격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뉘앙스를 살짝 정 작가에게 귀띔했을 뿐이데,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장면이 나왔다. 아마 정 작가도 비슷한 식의 표현을 생각하면서 망설이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Q. 선지교 위에서 맞은 최후는 어땠는가. 작품에 대한 애착이 컸던 만큼 마지막 장면에 임하는 각오가 남달랐겠다.
임호: 어느 누가 자기가 죽는 신을 찍으면서 기분이 좋을 수 있었겠는가, 하하하. 나는 일부러 그런 티를 안 내려고 현장에서 밝은 분위기로 있었는데, 조재현 선배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통은 자기 신이 아니어도 곁에 와서 이야기도 주고받고 했던 조재현 선배가 그날은 멀찍이 떨어져서 낚시 의자 하나 놓고 앉아 감정을 잡고 있더라. 정말 물리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죽는구나 싶었다.

Q. 당신도 어느덧 10편 이상의 사극에 출연했다. 특히 한때는 조금 시들해졌다 싶었던 사극이 ‘정도전’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임호: 아마 시기적인 요인도 있을 거다. ‘정도전’은 대하사극을 그리워하는 분들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또 단순히 역사의 재연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놓고 역사를 재해석한 것도 크게 어필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물이 고뇌가 있고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니까. 그게 인간의 희로애락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인간의 삶이 언제나 양지(陽地)일 수는 없다는 게 ‘정도전’의 또 다른 메시지일 것이다.



Q. ‘정도전’과 함께 ‘왕 전문 배우’라는 수식도 사라졌다, 하하. 기분이 어떤가.
임호: 이제는 그 정도 수식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하하. 나의 필모그래피에서 공전의 히트를 한 작품들이 모두 사극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근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왕 역할은 많이 했어도 항상 ‘왕 전문 배우’였던 내가 ‘정도전’ 이후 직책이 아닌 역할의 이름으로 시청자분들에게 각인됐다. 여러모로 감개가 무량하다.

Q. 굳어진 이미지를 깼다는 건 배우에게 큰 호기인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임호: 정말 악역을 하고 싶다. 좀 더 인간적인 고뇌와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 정몽주를 연기하며 무조건적인 변신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변신하더라도 보시는 분들이 놀라지 않을 정도의 범위에서 차차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다. 배우로서는 연기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대중과 나눌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따라서 앞으로는 다양한 장르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뮤지컬에도 도전할 것이고, 영화에서 작은 배역이라도 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배우 임호’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중요한 일이지 않겠나.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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