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식은 자신을 수식하는 ‘사연’의 정체가 무엇이냐 물으면서도 수긍하는 듯 했다길모퉁이를 지나게 되면 ‘약속된 여정’이 시작된다. 아직 걸어가 보지 않은 길 위에서는 익숙한 상황과 만날지도 모르고,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연기의 시작이란 어쩌면 이런 ‘약속된 여정’을 미리 상상해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경험하지 못한 인생 속 뱉어낼 숨, 피어나는 감정, 드러나는 표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런 상상력에서 시작될 것이니 말이다. 배우란 사람들은 그렇게 미처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인생을 섬세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이다.
배우 강의식은 자신의 표정에서 사람들이 그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느낀다는 말에 의아해했다. “저를 보고 ‘사연 있어 보인다’라고들 하시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대체.”라며 헛헛하게 웃는 이 배우의 표정에서조차 사연이 느껴진다.
그 자신도 모르게 표정에 스며있는 ‘사연’ 덕택에(?), TV 속 강의식의 배역은 짙은 그림자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데뷔작 tvN 드라마 ‘몬스타’의 규동에 이어 최근작 KBS2 단막극 ‘칠흑’에서도 학교폭력의 희생자를 연기했다. 정작 실제 학창시절에는 반장만 도맡아했다며 웃는 그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학교폭력 속 예민한 상처를 표현하기 위해 섬세한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지만, 이미 표정에 스며있는 사연 역시도 든든한 몫을 해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연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배우 강의식과 마주 앉았다.
그렇지만 알고보면 그에게도 천진하고 개구진 표정은 있다
Q. 최근 혼자 여행을 갔다고 들었다. 갑자기 훌쩍 떠난 이유는.강의식 : 짧았지만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갔다. 일 외에 내가 관심을 두는 영역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늘 일에만 꽂혀있다 보니 주변에서도 권해서 훌쩍 떠나게 됐다. 승마나 운동, 뭐 여러 활동을 한다고 해도 다 연기 훈련의 일환이었고, 그래서 일이 어긋나면 삶 전체가 뒤틀리는 그런 느낌이 들었던 시기에 떠난 여행이었다.
Q. 그렇게 의도적으로라도 머리를 식혀야할 정도로 연기에 열렬히 꽂혀있다는 말이네. 대체 연기가 왜 좋은가.
강의식 : 그 질문 정말 스스로에게 많이 해보았다. 문득 문득 샤워하다 떠오르면 한참 생각한 적도 있다. 대입 시기에도 참 많이 질문했던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홍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다 다시 연기를 전공하기 위해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된 거니까 고민하던 시기 ‘왜 연기가 하고 싶어’라는 질문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아직 어떻게 그 답을 규정할지 모르겠다.
Q. 뭐, 모른 채 그저 좋으니까 해도 될 텐데.
강의식 : 워낙 규정짓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잘못했다 하더라도 명확한 인과관계를 알게 된다면 쿨해지는 그런 성격이다.
Q. 그렇다면 혹시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 후회한 적은 없나.
강의식 :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조차 않고 마냥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직업이고, 동시에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직업이며 누군가와 경쟁해야만 하는 일 인터라, 내 의도와 달리 상처를 받는 일들이 생기고 만다. 그러면서 힘든 적은 있었다. 한동안 ‘왜 이쪽 일은 늘 이렇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안 좋은 습관이었지. 다른 쪽에서 일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디를 가나 다 똑같은데 말이다.
Q. 힘든 점도 당연히 있을 테지만, 주변에서 ‘연기 잘 하는 배우’라고 익히 말하니 본인의 재능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강의식 : 그런데 정말,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놓고 동료배우와 한참 이야기한 적도 있을 정도다. 과연 어떤 연기가 잘 하는 연기일까를 놓고 말이다.
Q. 글쎄, 규정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은 있다. 연기란 타고나는 것인가, 훈련이 중요한 것인가. 스스로가 내린 답은.
강의식 : 타고나는 부분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선한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 반전은 확실하다
Q. 최근에는 과장된, 과잉된 연기보다 연기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짙은데, 몸을 쓴다거나 기능적인 면은 확실히 훈련도 필요한 부분일 테고.강의식 : 입시 준비할 때 연기 병기처럼 했다. 지나치게 뜨거웠지, 하하. 그러다 매체로 넘어오면서 그런 과잉된 연기의 톤을 벗기가 힘들더라. 카메라에 담아내기에 너무 뜨거운 연기였던 거다. ‘몬스타’ 전에는 카메라를 놓고 액팅 코치님과 톤 조절을 연습했다. 또 당시 감독님이 규동이라는 인물에게 요구하는 연기가 조곤조곤 공허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기에 뜨거운 연기가 될 수 없기도 했다. 그렇게 (에너지의) 사이즈를 조절하는 법은 훈련을 통해 배웠다. 아, 그런데 정말 나의 연기는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
Q. 그래도 어느 순간, 만족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예를 들어, 작품을 마치고 나면 이제야 자신이 붙은 느낌, 그래서 얼른 다음 작품으로 달려가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마구 마구 들 때.
강의식 : 지금이 딱 그렇다. 빨리 더 하고 싶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면 또 내 연기에 만족 못할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 기분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다.
Q. 참, 강의식이라는 배우 ‘사연 있어 보인다’는 말 많이 듣지 않나.
강의식 : ‘몬스타’ 김원석 감독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정말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대체 사연 있어 보인다는 느낌이 뭘까, 하하.
Q. 그래서 학교폭력 희생자를 두 번이나 연기하게 됐는데 재미있는 것은 학창시절에는 리더십이 있는 학생이었다고.
강의식 : 반장도 많이 했고 전교회장도 했다. 늘 동글동글, 사연이 없어도 너무 없어 불만인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돼버렸다.
그리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의외의 표정!
Q. 어쩌면, 생각이 많은 성격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고. 혹시 평소에는 주로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강의식 : 글을 쓰기도 하고, 가끔 시도 쓴다. 시라고 하면 창피하긴 한데 비오는 날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나오는 모습만 봐도 세상에는 참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우산을 피려고 하는데 잘 안 펴진다거나 또 멀쩡한 우산이 생각보다 별로 없다거나. 그런 것들을 보며 시를 쓰기도 한다. 요즘은 특공무술을 배우고 있고.
Q. 그러면 진짜 생각이 많아질 텐데, 요즘 하는 고민들을 엿듣고 싶다.
강의식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부쩍 사람의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모범이 되는 군인이셨고, 좋은 가장이셨고 남편이셨으며 아버지셨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도 채 안되어 아들인 내게조차 희미해져가게 되니 사람의 삶이란 왜 이렇게 허무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렇다면 내가 배우라는 위치에서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은 것들을 많이 남기고 가는 삶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행복하게 살다 죽는 개인적인 삶이 나은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사람의 인생이란 집에 돌아갈 때까지 다녀오는 소풍 같은 것’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소풍을 와서 신나게 놀다 가야지,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고 망설이면 이미 집에 돌아갈 시간이 찾아온다는 뜻의 말이었는데 참 와 닿더라. 망설이고 걸리는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정작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던 당시의 인생에서 용기와 자극이 되는 말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주저하게 되는 순간에 이 글을 봐야지 하고 메모도 했다.
Q. 앞으로는 더욱 도전적인 배우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높아진다. 비록 배우란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선택을 받는 직업이더라도, 그것과 별개로 연기에서 꼭 해보고 싶은 도전은 무엇인가.
강의식 : 독립영화도 해보고 싶다. 참, 예전에 김원석 감독님과 앉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한국 배우들 중에는 직접 독립 영화 같은 저예산 영화들을 찍는 등의 도전을 하는 배우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시면서 꼭 너는 그렇게 되어보라고 하셨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꼭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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