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동근에게 터닝포인트를 논하는 것은 무색할 정도로 그는 매 작품에서 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배우다. 그렇지만 서른 다섯 해 그의 긴 연기 인생에서도 KBS2 대하드라마 ‘정도전’은 매우 특별한 작품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유동근의 ‘정도전’은 그를 오랜 시간 지켜봐온 시청자들에게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작품이다. 지극히 작은 배역을 맡더라도 깊은 풍미의 연기를 선보여온 그였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그런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의 가족극 속 인자한 아버지 상을 비롯해, 때로는 멜로, 또 코믹극, 최근에는 판타지 사극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했던 그이지만, 역시 정통 사극 속 유동근이야말로 유동근의 실체에 더 근접한 듯한 느낌을 전한다. 그런 그에게 ‘용의 눈물’ 이후 15년이 넘어 과거의 이방원이 이성계가 되어 돌아온 모습은 묘하게 감동적이며 또 상징적이다. 그 역시도 “세월이 흘러 내가 이성계 역을 맡게 되니 정말 그 당시에 김무생 선배님이 하셨던 그 연기가 주마등처럼 많이 스쳐지나갔다”고 말한 바 있다.
‘용의 눈물’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총 159부작이란 대장정 동안 변함없는 국민적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조선건국사를 이 드라마를 통해 배운 이들도 많을만큼, 사극 중의 사극, 일종의 역사교과서 역할까지 했던 그런 작품이다. 그만큼 조선건국사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있기도 하고, ‘용의 눈물’을 뛰어넘을 조선건국 소재의 사극이 또 나올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불식시킬 정도로 ‘정도전’이 조선건국사에 접근하는 방식은 흐른 세월만큼 더 풍부해져있다. 덕분에 인물들의 표정 역시도 더욱 풍부해진 질감을 자랑한다. 이성계 역시 강한 카리스마와 냉정한 성정의 조선 군주로서의 잘 알려진 모습을 표현하기에 앞서, 고려말 변방의 장수가 건국 왕으로 성장하는 드라마와 그 과정에서의 치밀한 정치적 서사에 더 방점을 두며 신선함을 안긴다.
‘용의 눈물’ 속 이방원과 ‘정도전’의 이성계는 속내를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잔잔한 표정과 매 순간 뿜어내는 강력한 카리스마라는 점에서는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용의 눈물’에 비해 ‘정도전’은 정치권 내 인물들의 욕망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보여줄 것 역시 더 많아진 느낌이다. 이성계 역시도 워낙에 유명한 함경도 사투리가 전달하는 리얼리티는 말할 것도 없으며 다방면에서의 촘촘하고도 섬세한 시도가 그 인물을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본 느낌을 부여한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등장하는 정통 사극이라는 점에서 유동근을 비롯한 배우들은 사명감을 이야기하는데, ‘용의 눈물’ 속 태종 이방원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시청자들에게도 돌아온 유동근이 연기하는 이성계를 바라보는 것은 다소간의 비장함을 안기기도 한다.
유동근은 그렇게 굵직한 사극 속 서사에서 자신만의 독보적 존재를 확립한 배우며, 그렇게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된 배우다. 그런 배우 유동근의 조선건국사를 15년 만에 마주한 것이 어찌 감동스럽지 아니할까.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KBS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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