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와 상관없이 기대감도 필요하고, 극장에서 볼 영화인가도 중요하다.”

정재영은 ‘역린’의 흥행을 이같이 바라봤다. 제작 초기서부터 초미의 관심을 쏠렸던 ‘역린’은 개봉 앞두고 혹평이 쏟아졌다. 영화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흥행에 대한 걱정은 당연했다. 정재영은 최근 ‘열한시’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그리고 ‘역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역린’이 그 마지막이었으니 타는 속이 오죽했을까. 지금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역린’을 바라보는 정재영의 속내가 궁금했다.

Q. 평가와는 별개로 흥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재영 :
평가와 상관없이 기대감도 필요하고, 극장에서 볼 영화인가도 중요하다. 이야기 자체가 상업적이어야 하는 것도 있다. 가령 ‘방황하는 칼날’은 흥행 되겠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건 아니었다. 이야기가 좋았던 경우다.

Q.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재영 :
이야기가 재밌었고, 대사 등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메시지도 좋았고. 다만 시나리오에서도 약간 길다 싶었다. 그걸 빼놓고는 정말 잘 쓴 소설 같았다.

Q. ‘역린’은 정유역변이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정재영이 연기한 상책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허구의 인물이다. 어디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나.
정재영 :
딱히 어디에 중점을 두진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런 인물이다’라고 느껴지는 것에 충실했다. 그리고 여기에 내 색깔이 묻어나서 정재영스러운 상책이 나오게 된 거다. 사실 ‘역린’뿐만 아니라 ‘방황하는 칼날’, ‘플랜맨’ 등도 특별히 어디에 중점을 두고 연기를 해야겠다는 건 없다. 전체적으로 중점을 둬야 한다. 작은 것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하하. 인생 자체가 그렇듯,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이 좋았다고 해서 그 신에 중점을 두는 게 아니라 작은 신이 모여서 그렇게 되는 거다. 갑자기 좋아질 수는 없다.

Q. 상책은 어릴 때 궁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싸움을 연마하거나 몸을 만들기 힘들었을 텐데.
정재영 :
상책도 정조와 똑같이 몸을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갓난아이 때 들어온 게 아니라 이미 ‘짱’이었을 때다. 오랫동안 내시로 있다 보니 약해진 게 아닐까. 하하. 또 한정된 시간 안에 여러 사연을 보여줘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상책 이야기가 많지 않다. 하지만 영화를 통틀어서 제일 싸움을 잘하는, 혼자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영화 ‘역린’ 스틸 이미지.

Q. 상책의 내면은 어떻게 해석했나.
정재영 :
시나리오에 있는 것만으로 해석한다. 착한 심성인데 자란 환경이 살수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어려서부터 싸움 잘했고, 살수 집단 안에서도 대장이었던 아이다. 또 끝까지 살아남은 몇몇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리고 시나리오상에서는 살막에 친동생이랑 같이 왔는데 죽게 된다. 그리고 친동생과 똑같은 아이가 온 거다. 그게 을수다. 그래서 그를 살리고 싶어서 동생 대신 거세를 하고 궁에 먼저 들어가는 거다. 그러다 정조의 영향을 받게 된다.

Q. ‘역린’은 현빈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본 현빈은 어떤 배우던가.
정재영 :
정말 정조스럽다. 하하. 철이 빨리 들었다고 해야 하나. (조)정석이보다 두 살 어린데 오히려 형 같다. 얼굴은 딱 그 나이로 보이는데 어른다운 느낌이 있다. 흥분 잘 안 하는 성격이고, 침착하다. 내가 그 나이 땐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20대 후반에 해병대를 지원해서 갔다는 것만으로 남자들은 어떤 느낌일지 알 거다.

Q. 너무 바른 생활 사나이 같은 면모가 있는 듯 싶은데.
정재영 :
타고난 기질인 것 같다. 일부러 바꿀 필요는 없다. 현빈은 남이 생각하지 않는 걸 생각해서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아이다. 해병대도 전략적이거나, 이미지 때문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연기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무대 인사하는 데도 정말 좋아하더라.

Q. 이재규 감독의 데뷔작이다.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등 드라마 연출자로 명성을 쌓은 감독이란 점에서 여느 데뷔작과는 다르다. 분명 그런 점에서 뭔가 다른 장점과 단점이 있을 것 같다.
정재영 : 나 역시 드라마 피디 출신 감독하곤 처음 해보는 거라 막연히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아무래도 드라마는 정신없이 빨리빨리 찍으니까 그러지 않을까 했는데 막상 촬영하는 걸 보니 아티스트 같았다. 한 장면 한 장면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찍더라. 그 부분은 정반대의 느낌을 받았다. 혹시라도 드라마 피디 출신이라 어떻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싶어 준비를 더 많이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또 성적 자체가 차분하다. 특히 그림이나 미장센은 처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것들이 보기엔 쉽지만, 찍을 땐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것들이다. 개봉 전 혹평 때문에 그런 것들이 가려져 안타깝다. 그것도 유명세였던 것 같다. 그냥 드라마도 아니고, 앞서가는 드라마를 하셨던 분이어서 얼마나 기대를 했겠나. 그냥 신인 감독이었다면, 미장센 등 이런 부분에선 깜짝 놀랄만한 신인이란 평가를 받았을 것 같다.


Q. 혹평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개봉 전 평단과 언론의 혹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드라마 피디 출신이란 것 때문에 드라마 문법이네 어쩌네 하는 혹평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정재영 :
드라마 문법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템포감을 이야기하는 건지, 몰입되고 있는데 흐름이 끊긴다는 건지. 문법으로만 따지면 영화적 문법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가 장황하다면, 오히려 ‘역린’은 생략이 많다. 순수하게 내 생각은 이 영화를 정조 위주로 숨 막히는 24시간을 생각했는데 예상하지 않았던 흐름으로 가니까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것 같다. ‘팬심’과 같은 거다. 가령 내 팬이 볼 때 ‘정재영, 왜 안 나오지’ 하는 것과 같은 거다. 내 팬은 내 위주로 볼 테니까. 예상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 또는 스피디하게 갈 줄 알았는데 굉장히 차근차근 가기 때문에 지루했다 등의 혹평이면 이해되는데 드라마적 문법은 그 말 자체가 어려웠다.

Q. 많이 서운했겠다.
정재영 :
기자간담회도 하고, 인터뷰도 했으면 그런 혹평들이 조금은 묻혔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안 좋은 평이 많다고 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게 됐다. 평소엔 그렇게 찾기 힘든 리뷰가 이번엔 눈에 확 띄더라. 하하. 이런저런 홍보를 못 해서 다른 기사가 없었던 것도 이유지만. 어쨌든 감독님이 가장 큰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드라마 할 땐 작품적으로도, 시청률에서도 칭찬을 받아왔던 감독이지 않나. 큰 기대를 했던 사람이 많은 만큼 실망도 큰 것 같다. 기대라는 건 또 다른 착각을 만드는 것 같다. 그 기대가 잘못된 스포일러 같기도 한 거다.

Q. 일반 관객의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궁금했겠다.
정재영 :
개봉 이틀 전인가 극장에서 영화를 봤는데 그렇게까지 단점만 뽑을 영화는 아니다. 마지막 메시지는 상당히 좋았다.

Q. 맞다. 여러 혹평으로 ‘역린’이 말하는 메시지가 약간 묻힌 느낌이다.
정재영 :
그렇다. 조금 아쉽긴 하다. 그래도 무대 인사를 돌 때 일반 관객들이 중용 23장을 얘기하곤 한다. 그건 본 사람만 아는 거니까.

Q. 올해는 ‘역린’이 마지막일 될 것 같다.
정재영 :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항상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다. 잔머리 굴려봤자 소용없다. 작품이 마음에 들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러면 나쁜 평가도 부끄럽지 않다. 항상 롤러코스터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해가려는 게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 생각을 가질수록 힘들다. 직업에 상관없이 나이가 들면 철이 드는 것 같다. 결론은 순간순간 열심히 하는 거다. 그러면 내세울 순 없어도 창피하진 않다는 거다. 20대 땐 최고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지나보면 ‘최고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게 와 닿는다. 최선을 다 안 했는데 칭찬받으면 잔머리만 는다. 하하.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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