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냄새 풀풀 풍기는 사극 한 편에 주말이 뜨겁다. 지난 1월 4일 첫 전파를 탄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 매회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일요일의 절대 강자 KBS2 ‘개그콘서트’보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자극적인 소재와 막장 스토리가 판치는 주말극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정도전’의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기획 단계부터 ‘대하드라마’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온 터라 “중·장년층 시청자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될 것”이라던 우려도 반환점에 다다른 시점에는 자취를 감췄다. 평균 연령이 50세가 넘는 중견 배우들이 그려내는 선 굵은 이야기에 대중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텐아시아에서는 어느덧 반환점을 돌아선 ‘정도전’을 기념해 ‘사극 최적화 배우’들의 남다른 인연을 작품을 통해 파헤쳐봤다. 1인 평균 6.5편의 사극에 출연한 ‘정도전’ 속 배우들, 8인의 배우들은 어떤 작품에서이던 한 번쯤은 만나지 않았을까. ‘사극 최적화 배우’들의 꼬리물기, 그 첫 주자는 박영규다.
누가 이인임에게서 미달이 아빠를 떠올리는가? ‘정도전’에서 박영규는 이인임 그 자체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의 사극 출연은 MBC ‘다모’, KBS2 ‘해신’에 이어 ‘정도전’이 세 번째라는 것. 이는 그동안 코믹 연기에 가려 그가 가지고 있는 연기의 내공이 그만큼 빛나지 못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그가 연기한 이인임은 매회 주옥같은 대사를 쏟아냈다.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한 것도 없지요”, “정치엔 선물이라는 게 없네.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주는 뇌물만 있을 뿐”, “정치하는 사람에겐 딱 두 가지 부류가 있을 뿐이네 하나는 적 다른 하나는 도구”와 같은 이인임의 대사는 현실 정치를 떠올리게 하며 ‘정도전’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로 자리매김했다.
#정호근 : “이보게 늙은이, 극락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이 고려가 나에게 최고의 극락이야! 극락 중의 극락이었단 말이지!”
박영규와 정호근은 MBC 드라마 ‘다모’와 KBS2 ‘해신’에 함께 출연했다. 그 인연 때문일까. 정호근은 ‘정도전’에서 이인임(박영규)의 최측근, 막무가내 행동대장 임견미로 분했다.
정호근은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임견미를 악하고 교활한 인물로 잘 그려냈다. 이성계를 촌뜨기라며 비아냥거림을 일삼고 수시로 이성계를 숙청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 사리사욕도 넘쳐나 매점매석을 지나치게 하다 이인임에게 걸리기도 했다. 게다가 머리가 나빠 “권세를 누리는 사람은 한 사람만 잘 다스리면 된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인임의 충고도 이해하지 못한다.
정호근은 사극에 잔뼈가 굵은 배우다. 그만큼 어떻게 캐릭터를 표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정도전’에서 목이 잘리며 퇴장하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 대해 “‘너무 존재감이 없는 것 같다. 퇴장할 때는 강한 인상을 남기자’고 생각해서 드라마에서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참수형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이 얼마나 사극에 대해 잘 아는 남자인가!
정호근은 ‘정도전’에선 박영규를 모셨고 2011년 방송된 드라마 KBS1 ‘광개토 대왕’에서는 임호를 모셨다. 임호와 정호근은 각각 ‘광개토 대왕’에서 후연의 태자 모용보와 그의 책사 풍발을 연기했다. 당시 그들은 극 중 단연 돋보이는 ‘남남케미’를 선보임과 동시에 담덕(이태곤)을 매번 곤경에 빠트리는 악역 연기를 펼쳤다.
임호는 1995년 SBS ‘장희빈’의 숙종을 시작으로 ‘정도전’의 정몽주까지 총 9편의 사극에 출연한 베테랑 연기자다. MBC ‘대왕의 길’에서 사도세자, ‘대장금’에서 중종, ‘선덕여왕’에서 진지왕 등 왕 역할을 자주 맡아 부드러운 인상이 강하다. 그 때문에 그가 대중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몽주를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우려도 있었고, 본인 스스로 “잘 알려진 ‘정몽주’를 연기하는 마음이 무겁다”고 밝힌 바 있다.
임호는 기울어가는 고려에서 희망을 찾는 젊은 관료 정몽주를 연기하며, 함께 있으나 다른 이상을 그리고 있는 정도전(조재현)과 아슬아슬한 ‘남남케미’를 재연하고 있다. 임호는 지난 ‘정도전’ 기자간담회에서 “내 마음을 울렸던 대본의 느낌이 시청자들에게 가 닿도록 연기하겠다”며 각오를 전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정도전’ 27회에서 위화도 회군을 선택한 이성계에게 “동서고금의 모든 반란이 그렇게 정당화되었습니다. 불가피한 결단이었다는 그 한마디로”라고 비난해 고려를 포기할 수 없는 정몽주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의 연기에서 묵직한 울림이 느껴지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안재모 : “인명재천(人命在天)이니 뭐니 하는 말은 결국 위선이오. 사람 목숨은 결국 사람 손에 달려 있는 것, 아니 그렇소?”
사극의 재미 중 하나는 다른 배우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 안재모와 임호는 각각 SBS ‘연개소문’과 KBS1 ‘대조영’에서 연남생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즉, ‘정도전’을 통해 두 명의 연남생은 선죽교 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안재모는 ‘정도전’에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젊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총 7편의 사극에 출연한 무시 할 수 없는 사극 내공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처음 출연했던 사극 KBS1 ‘용의 눈물’에서는 극 중 충녕대군(세종) 역을 맡아 태종 이방원 역의 유동근을 아버지로 모셨으니 처음부터 사극 연기 선생님을 제대로 만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이한 점은 16년 전, 유동근이 맡았던 이방원 역할을 ‘정도전’에서는 안재모가 맡았다는 것.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안재모는 ‘정도전’ 기자간담회에서 “과거 작품들을 통해 이방원의 캐릭터가 많이 노출되었기에 연기하는 데 부담이 크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정도전’에서의 이방원은 안재모만이 연기할 수 있는 이방원이라는 평이 나오고 있다. 정도전과 각을 세우는 듯하며 그에게 정치를 배워가고 있지만, 이따금 정도전을 바라보는 이방원의 표정에는 ‘역사’가 만들어내는 의미심장함이 담긴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다.
#이광기 : “걱정 마십시오. 소생 하륜입니다.”
이광기는 1998년 방송한 KBS1 ‘왕과 비’에서 세조의 세자, 의경세자(도원대군) 역을 맡았다. 그가 연기한 의경세자는 이른 나이에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자기 아들과 손자는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이 성종, 손자가 연산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 한 가지,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안재모라는 것.
이광기는 생각보다 사극 출연 경력이 많지 않다. 또 나이도 안재모 다음으로 어리다. 지금까지 방송된 ‘정도전’을 봐도 그가 맡은 하륜은 이인임의 조카사위라는 배경 외에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하륜은 역사상 조선 태종 때까지 조정에 있는 인물이다. 즉, ‘정도전’에서 하륜의 비중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극 중 인물 중 정도전, 이방원, 하륜을 성장형 캐릭터로 꼽으며 “이방원과 하륜의 성장에 주목해 달라”고 말했다. 이광기가 지금까지 이인임 곁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정도전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처세의 달인 하륜을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하륜의 성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광기는 2000년 KBS1 ‘태조 왕건’에서 견훤(서인석)을 유폐하고 후백제의 2대 왕에 오르는 신검을 연기하더니, ‘정도전’에서는 고려의 충직한 장수 최영(서인석)을 찾아가 사직하라 권고해 약 450년 차이의 기묘한 평행이론(?)을 완성했다.
서인석은 믿고 보는 사극배우다. 서인석은 사극을 즐겨 보는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얼굴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991년 MBC ‘동의보감’의 허준 역을 시작으로 ‘삼국기’의 김유신, ‘태조 왕건’의 견훤, ‘연개소문’ 당 태종 등 ‘정도전’을 포함해 총 10편의 사극에서 굵직한 배역들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중 2000년 그가 ‘태조 왕건’에서 보여준 견훤은 아직도 입에 오르는 전설의 캐릭터.
견훤은 전설의 캐릭터인 동시에 그의 발목을 잡는 캐릭터였다. 그가 견훤 이후 어떤 역을 맡든 견훤의 이미지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누가 뭐래도 서인석은 최영 장군이다. ‘정도전’ 15회에서 정도전이 그에게 “뼛속까지 고려인”이라고 평한 것처럼, 서인석의 눈빛, 숨소리, 움직임 하나하나가 고려의 충직한 장군 최영을 연기하고 있다.
서인석과 유동근은 ‘정도전’ 이전에 KBS2 ‘삼국기’에서 각각 김유신과 계백으로, SBS ‘연개소문’에서는 당 태종과 연개소문으로 분해 대결을 펼친 바 있다. 서로 한 번씩 승패를 주고받으며 상대전적(?) 1대 1을 이뤘던 이들에게 ‘정도전’은 세 번째 대결의 장이 되었다. 당연히 이성계가 승리했고, 유동근이 상대 전적 2대 1로 서인석을 앞서게 됐다.
유동근의 연기력은 사극과 현대극을 가리지 않고 빛을 발한다. 하지만 대중들은 유동근하면 가장 먼저 사극에서의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그에게 최초로 연기대상을 안겨줬던 KBS1 ‘용의 눈물’에서의 태종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심장을 울리는 발성은 특히 분노 연기를 할 때 빛을 발한다.
유동근이 ‘정도전’에서 북부 방언을 사용하며 개경이 수도였던 고려 시대 변방장수 이성계의 캐릭터를 완성했다. 또 흔들리는 고려 말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며 눈물 흘리는 덕장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정치를 알게 될 내가 무섭다”고 말하는 등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장수를 표현한다. 이처럼 대중들이 알고 있던 이성계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이성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작가의 힘, 그리고 유동근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동근은 1992년 방영된 KBS2 드라마 ‘삼국기’에서 무너져가는 백제를 지키고자 했던 계백 장군을 연기했다. 그리고 19년 뒤, 그가 연기한 계백이 주인공인 MBC 드라마 ‘계백’에서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을 연기한 이가 조재현이다.
조재현이 가지고 있는 사극 경력은 고종 역을 맡았던 1995년 KBS1 ‘찬란한 여명’과 의자왕 역을 맡았던 2011년 MBC ‘계백’이 전부다. 영화로 시야를 넓혀 봐도 1995년 ‘영원한 제국’과 2003년 ‘청풍명월’ 두 편이 전부. 이처럼 조재현의 사극 경력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배우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정도전’에서 정도전을 맡은 조재현은 방송 초반 이인임과 이성계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내공이 있는 배우다.
‘정도전’ 기자간담회에서 조재현은 “KBS에서 작품성을 무시하고 시청률만 좇았다면 나는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정통사극을 향한 남다른 애착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정도전은 관록이 넘치는 정치인 정도전이 아니다. 역성혁명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가슴에 조용히 품고 대업을 천천히 준비해나가는 젊은 능구렁이 정치인 정도전이다. 특히 22회에서 다뤄진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간 걸림돌이었던 이인임을 내려다보며 ‘정도전’ 속 정도전의 캐릭터를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조재현 표’ 정도전의 진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글. 윤준필 인턴기자 gaeul87@tenasia.co.kr
사진. 최예진 인턴기자 2ofus@tenasia.co.kr, KBS1 ‘정도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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