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정도전’ 포스터
남자 냄새 풀풀 풍기는 사극 한 편에 주말이 뜨겁다. 지난 1월 4일 첫 전파를 탄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 매회 자체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일요일의 절대 강자 KBS2 ‘개그콘서트’보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파란을 일으켰다.자극적인 소재와 막장 스토리가 판치는 주말극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정도전’의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기획 단계부터 ‘대하드라마’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온 터라 “중·장년층 시청자에게만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가 될 것”이라던 우려도 반환점에 다다른 시점에는 자취를 감췄다. 평균 연령이 50세가 넘는 중견 배우들이 그려내는 선 굵은 이야기에 대중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도전’은 역사왜곡 없이 흡입력 있는 전개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 픽션·판타지 사극 범람에도 ‘정통 역사 드라마’ 소구층은 여전한 때 픽션·판타지 사극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지상파, 케이블채널 할 것 없이 모두가 젊은 스타를 내세운 픽션 사극을 내세웠고 결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과거 안방극장을 수놓았던 정통 역사 드라마의 수는 줄어들었다.
작품의 인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여전히 정통 역사 드라마에 대한 소구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MBC ‘기황후’와 같은 작품도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몰이 중이지만, ‘정도전’이 인기를 얻는 것과는 조금 모양새가 다르다. 또 ‘기황후’가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수차례 몸살을 앓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기황후’와 ‘정도전’이 인기를 얻고 있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의 최대 장점은 ‘정통 역사 드라마’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정도전’ 제작발표회에서 강병택 PD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에야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는 것은 당연하다”며 “중요한 것은 어디에 목표를 둘 것인가 하는 거다. 역사를 이용해 상업적 성공을 이루기보다는 재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충실한 고증을 통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주제의식을 표현해보고 싶다”는 말로 작품의 기획 취지를 명확히 했다.
이는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와 별도로 삽입된 ‘다큐 엔딩’(각 회 말미에 삽입된 다큐 영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정도전’의 한 관계자는 텐아시아와의 전화에서 “다큐 엔딩은 극본을 집필한 정현민 작가의 아이디어”라며 “정통 사극을 표방하는 ‘정도전’이 ‘드라마’라는 매체를 통해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재밌게 전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장치이다”고 설명했다.
1인 평균 6.5편의 사극에 출연한 ‘정도전’ 출연 배우들. 박영규, 서인석, 선동혁, 안재모, 조재현, 정호근, 임호, 유동근(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 극적 전개의 공백 메우는 중견 배우들의 열연이미 기록된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정도전’은 여타 사극과 비교할 때 자극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정도전’도 초반부에 양지(강예솔)와 정도전(조재현)의 이야기를 삽입하며 어느 정도의 픽션이 가미됐지만, 사실 이 정도는 여타 드라마와 비교한다면 애교에 가깝다.
‘정도전’이 드라마 구성을 위해 자극적인 이야기를 삽입하지 않고도 흡입력 있게 극을 풀어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극에 최적화되어 있다시피 한 중견 배우들의 공이 컸다. 서인석, 유동근, 박영규, 조재현, 정호근, 김진태 등 다수 사극에서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쳤던 배우들은 ‘정도전’에서 각기 다른 욕망을 좇는 인물로 분해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캐릭터를 그려내고 있다.
또 ‘정도전’을 집필한 정현민 작가는 제작발표회에서 “기존의 틀에 박힌 사극에서 벗어나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이 그간 상대적으로 덜 조명됐던 정도전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자연스레 각 인물에 ‘역사 재해석’이 들어갔다는 점도 극에 대한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이에 따라 배우들이 ‘메뉴얼’에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 자신만의 색채로 그려나가는 과정도 ‘정도전’만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로 자리매김했다.
박영규는 ‘정도전’에서 이인임의 차진 대사에 힘입어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 살아있는 듯한 ‘차진 대사’, 현실 정치에 대한 날 선 비난 제대로 담겼다매회 뛰어난 영상미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정도전’은 날 선 메시지를 앞세우며 현실과의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단순히 드라마가 ‘역사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치부를 찌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은 ‘정도전’의 인기 요인 중 하나이다.
특히 가장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부분은 이인임 역을 맡은 ‘배우 박영규’의 재발견. 그의 연기 변신의 중심에는 ‘이인임’이라는 인물을 매력적으로 되살려낸 ‘차진 대사’가 있다. “내가 하루를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게 두렵다.”, “의혹은 궁금할 때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당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등의 대사들은 각 인물에 선악 구도를 넘어서는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의 부조리함을 떠올리게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이런 ‘정도전’의 대사는 KBS 방송작가로 데뷔하기 전 국회 보좌관으로 10여 년간 경력을 쌓아온 정현민 작가의 독특한 이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색적이다 싶을 국회 보좌관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 속에도 오롯이 담겨있다. 지난 2010년 KBS1 ‘자유인 이회영’으로 데뷔한 정 작가는 같은 해 KBS2 ‘프레지던트’로 대통령 당선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며 사실감 있는 묘사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2014년, ‘정도전’으로 다시 대중을 만난 정 작가의 극본 속에는 시대를 꿰뚫는 살아 있는 대사들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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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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