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석
서인석
그야말로 ‘사극 장인’이 따로 없다. 지난 1975년 KBS 드라마 ‘산비둘기’로 데뷔한 배우 서인석. 십 수년간 ‘삼국기’, ‘한명회’, ‘서궁’, ‘태조 왕건’, ‘근초고왕’ 등 무려 9편의 사극에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한 그가 KBS1 ‘정도전’(극본 정현민, 연출 강병택, 이재훈)에 최영 장군 역으로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를 넘어선 모종의 신뢰감마저 느껴졌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최영의 패배와 함께 4개월여 만에 하차를 앞둔 그의 표정에서는 아쉬움보다도 진한 ‘노장의 기백’이 묻어났다.

서인석은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항상 배우로서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고 말한다. 어느덧 30년이 넘는 시간을 배우로서 살아온 그이지만, 연기에 대한 갈망과 열정은 여느 젊은 배우 못지않았다. ‘정도전’과 함께한 4개월을, 더 나아가 배우로서 살아온 시간을 회상하는 그의 눈빛에는 젊은 배우들은 쉬이 담을 수 없는 연륜과 진중함이 담겨있었다.

Q. 직접 문경부터 차를 몰고 오셔서 놀랐다. 촬영에 운전까지 병행하면 힘드시지 않나.
서인석: 뭐 달리 방법이 있나. 이 나이쯤 되면 소속사 제의도 안 들어온다, 허허.

Q. 마지막 출연분 촬영을 마쳤다고 들었다. 지난 3개월간 ‘고려의 명장’ 최영으로 살았던 소감이 궁금하다.
서인석: 처음부터 약 30회분까지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극이야 워낙 많이 출연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고통스러웠다. 많이 알려진 인물을 그려내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더라.

Q. 확실히 그렇다. 최영 장군에 대한 노래까지 있을 정도니까. 인물 표현에서 어떤 부분에 집중했나.
서인석: 이미 여러 사극에서 강한 인물들을 맡아 왔다는 게 나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였다. 어떻게 톤을 잡고 기존의 캐릭터가 남긴 이미지를 지워나갈 것인가, 주어진 대본 속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나가야 했다. 연기보다는 캐릭터 자체를 느끼는 데 집중했다. 지나치게 ‘쇼’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은 빼고 정직하고 진지하게, 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심어나가려고 노력했다.

Q.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역사를 재구성한 사극임에도 이토록 몰입도 있는 이야기가 탄생한 데는 주연 배우들의 열연이 컸다. 특히 최영과 이성계는 인간적인 감성이 많이 더해진 느낌이다.
서인석: 내가 집중했던 것도 그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최영 장군에게 인간적인 감성을 불어넣고 싶었다. KBS1 ‘용의 눈물’(1996)과 같은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정도전’이 차별화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말하자면 이성계와 최영은 애증의 관계인 거다. 수십 년간 전장을 함께 누빈 두 사람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이 돼버렸지만, 이들의 관계 속에는 증오 이상의 무엇이 담겨야 했다. 증오만으로 인물을 그리다 보면 인간적인 매력이 떨어져 버린다.

유동근(왼쪽)과 서인석, 두 거목의 대결은 ‘정도전’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유동근(왼쪽)과 서인석, 두 거목의 대결은 ‘정도전’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유동근(왼쪽)과 서인석, 두 거목의 대결은 ‘정도전’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Q. 위화도회군 이후 최후의 접전도 인상적이었다. 대립각을 세운 인물들의 당위성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자 시청률도 급상승했다.
서인석: 물론 ‘정도전’이 전국 시청률 17%(닐슨 코리아 기준)대를 돌파한 건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라고 본다. 다만 아무리 방송이 시청률을 전제로 한다지만, 너무 시청률에 연연하는 것도 좋지 않다. 특히 사극은 더 그렇고.

Q. 앞서 ‘정도전’ 제작발표회 때부터 ‘사극의 가치’를 역설했다. 퓨전·판타지 사극이 범람하는 요즘 추세에 ‘정도전’과 같은 정통 사극의 선전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서인석: 퓨전·판타지 사극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건 드라마의 패턴이 아닌가. 퓨전·판타지 사극도 한때 홈드라마가 인기가 있다가, 또 한때는 멜로드라마가 주류로 부상하고 이런 흐름의 일부이다. 앞서 내가 이야기했던 ‘사극의 가치’란 흥미와 재미 외에도 사극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말한 거다. 선조들의 삶을 반추하고 그 성과와 시행착오를 통해 후세에게 미래를 준비하는 어떠한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정도전’이 사극의 새 방향성을 제시한 것 같다는 평도 많다. 작품이 단순히 역사에 그치지 않고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과거의 사극과 달리 젊은 세대에게도 크게 어필했다.
서인석: 시청자도 새로운 걸 보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계속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나. ‘정도전’은 정통 사극임에도 현대적 어휘나 좀 더 쉬운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게 인기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허허.

서인석은 ‘태조왕건’, ‘근초고왕’, ‘무인시대’ 등 작품에서 활약을 펼치며 대표적인 사극 배우로 자리 잡았다(위부터 시계방향)
서인석은 ‘태조왕건’, ‘근초고왕’, ‘무인시대’ 등 작품에서 활약을 펼치며 대표적인 사극 배우로 자리 잡았다(위부터 시계방향)
서인석은 ‘태조왕건’, ‘근초고왕’, ‘무인시대’ 등 작품에서 활약을 펼치며 대표적인 사극 배우로 자리 잡았다(위부터 시계방향)

Q. ‘삼국기’, ‘한명회’, ‘서궁’, ‘태조 왕건’, ‘근초고왕’ 등 ‘정도전’까지 포함해 무려 10편의 사극에 출연했다. 당신의 수식하는 말 중에는 ‘사극 최적화 배우’라는 말도 있다.
서인석: 정말 많은 시간대를 살아봤다.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제는 나도 헛갈릴 지경이다. 매 작품을 준비하며 그 시대를 새로 공부한다. 또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삶을 작품을 통해서 살아볼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사극에 자주 출연한 이유인 것 같다.

Q. ‘정도전’도 그런 이유로 출연을 결심했나.
서인석: 물론이다. 내가 최영 장군이 된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허허.

Q. 당신도 1980년대에는 TV가이드 ‘결혼하고 싶은 배우’에서 1위로 선정된 남자였다. 사극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서인석: 아쉽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30대에는 그나마 총각이라 여러 배역을 맡는 게 가능한데, 40대에는 배역의 폭이 줄고 50대가 되면 늙은 역할도 맡기 애매하다. 이제 그때부터 사극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다. 근데 이 정도로 사극에 자주 출연하면 배우도 매너리즘에 빠지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도 현대극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극은 아예 이인임 같은 악역이라면 모를까, 웬만큼 해볼 만한 역할은 다 해본 것 같다.

Q. 배우로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서인석: 이제는 늙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몸도 예전과 다르고 거울 보면 얼굴도 많이 상해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늙어가는 거다. 예전에는 나이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TV나 영화도 안 본 시기가 있었다. 비슷한 나잇대의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 나오는 걸 보면서 괴로워했던 적도 있다. 배우라는 직업이 일을 해도 스트레스, 안 해도 스트레스다. 허허. 근데 어느 시점이 지나니까 굳이 그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Q. 그런 시기를 어떻게 넘겼나.
서인석: 젊을 때는 술이었지 뭐, 허허. 나이가 드니까 그것도 쉽지 않더라. 그래서 요즘에는 친구들 만나고 같이 운동하고 다니고 그런다. 아직도 가끔 골프장에서 공을 치다가도 ‘내가 연기 안 하고 여기서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문뜩문뜩 들 때도 있지만, 운동하는 몇 시간 동안은 그런 생각을 안 하니까. 이게 나름 직업병이라 완전히 잊는 건 어렵다. 그렇게 조금씩 견뎌나 가는 거다.

Q. 그런 측면에서 강단(서인석은 수년 째 한서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에 서는 경험도 의미가 적지 않겠다.
서인석: 상대를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많다. 나는 정신교육을 많이 하는 편이다. ‘배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 ‘연기는 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다’ 같은 이야기를 해준다. 스타가 아닌 직업 정신을 갖춘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목표다.

지난해 서인석은 연극 ‘메카로 가는 길’의 마리우스 역을 통해 1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메카로 가는 길’의 예수정, 서인석, 원영애(왼쪽부터)
지난해 서인석은 연극 ‘메카로 가는 길’의 마리우스 역을 통해 1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메카로 가는 길’의 예수정, 서인석, 원영애(왼쪽부터)
지난해 서인석은 연극 ‘메카로 가는 길’의 마리우스 역을 통해 1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메카로 가는 길’의 예수정, 서인석, 원영애(왼쪽부터)

Q. 작품 활동부터 제자 육성까지 정말 쉴 틈이 없겠다. 작년에는 연극 ‘메카로 가는 길’로 무대에도 올랐다. 또 연극 무대에 오를 계획이 있나.
서인석: 당연하다, 내 모체가 연극이니까. 방송 작품은 내가 만든 걸 파는 거라면, 연극은 창조하는 과정이다. 배우라면 죽을 때까지 연기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 이런 훈련 과정 없이 바로 방송에 뛰어드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방송은 연습이 없지 않나. 연극은 한 작품을 마치고 나면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현장에서 관객과 직접 소통하다 보면 자신의 실력도 단번에 알게 된다. 여러모로 연극은 포기할 수 없는 거다.

Q. 정말 열정이 대단하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당신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서인석: 체력이다. 젊은 배우들처럼 몸을 가꾸는 건 아니지만, 호흡이나 건강을 위해 틈틈이 운동하고 있다. 배우는 정년이 따로 없지만, 스스로 정년을 만든다. 병들고 힘들면 연기도 할 수 없다. 결국은 자기 체력은 자기가 관리해야만 연기 세계에 계속 젖어있을 수 있는 거다.

Q. ‘정도전’을 통해 젊은 팬들도 많이 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서인석: ‘정도전’ 방송 내내 늘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 최영 같으냐’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아 정말 그렇다’고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오면 배우로서 정말 큰 보람을 느꼈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렇듯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나는 존재감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늘 배우로서 어떻게 해야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 마음 그대로 연기해나가겠다. 쭉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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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제공.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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