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세월호 실종자 가족 100여명이 도로로 나섰다. 목적지는 청와대였다. 하지만 행진은 1㎞ 조금 못 가 가로막혔다. 발목을 잡은 것은 서울까지의 먼 거리도, 서럽게 내리는 비도 아니었다. 경찰(을 내세운 정부)이었다. 경찰은 진도대교 인근에서 도로를 봉쇄했다. ‘안전사고’ 우려가 이유라 했다. 하지만 그 ‘안전’이란 것이 박근혜 정부의 ‘안전’을 의미한 것인지, 실종자 가족들의 ‘안전’을 뜻하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실종자 가족들이 도로 위에 나선 것은 무능한 정부로부터 자기 자식의, 부모의, 동생의, ‘안전’을 지키고 싶어서라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다.

세월호 특별편성영화 왜 광해였나

이견이 있나. 세월호 참사는 국가적 재난이다. 나라 전체가 슬픔에 빠졌다. 각 방송사들도 애도에 동참했다. 예능과 드라마들이 줄줄이 결방을 결정했다. 뉴스특보가 이어졌다. 지난 20일, KBS2는 ‘개그콘서트’를 대신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를 편성했다. 그 많은 작품 중에 ‘광해’를 선택한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의미심장한 편성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광해’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붕당정치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광해의 대역을 하게 된 ‘광해 닮은꼴’ 하선(이병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1,2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스토리가 좋았다. 연출이 훌륭했다. 이병헌의 1인 2역 연기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1,200만 관객을 설명하진 못한다. 또 다른 이유는 영화가 현실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줬기 때문이다. 자기 이득 챙기기에 바쁜 정치인들에게 하선이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가스활명수를 먹은 듯 속이 뻥 뚫렸다. 하지만 그 쾌감이 이토록 절절한 아픔으로 다가올 줄, 그때는 차마 몰랐다. 세월호 사건 이후, 정치권이 보여주고 있는 행보를 보면 외치고 싶어진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김문수 자작시, 서남수 황제라면, 송영철 기념촬영, 정몽준 아들 미개인 발언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자, 차기 대권을 노리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자신의 트위터에 ‘밤’ ‘진도의 눈물’ ‘가족’ ‘캄캄바다’ 등 자작시 네 편을 띄웠다. 운율까지 고려한 시였다. 스스로는 자신의 문학성으로 유족을 위로했다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네티즌들로부터 “지금이 운율이나 맞출 때냐”는 뭇매를 맞았다. ‘풍류시인 김문수에게 보내는 답시’라는 한 네티즌의 글은 그의 행동이 얼마나 상황에 부적절했는가를 짐작케 한다.(아래 참고)

(좌) 김문수 시 (와) 네티즌이 김문수에게 보내는 답시

교육부의 수장이라는 분은 ‘황제행차’와 ‘라면 먹방’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16일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의전용 의자에 앉아 라면을 먹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식음을 전폐한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서 먹는 라면은 어떤 맛이었을지, 진심 묻고 싶다. 이틀 후 찾은 안산 단원고 빈소에서도 ‘교육부장관 클라스’는 남달랐다. 수행원이 유족들에게 “교육부 장관이십니다”라고 귓속말을 건넸다. 유족의 입에서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가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권의식이 빚은 대한민국 정치인의 웃픈 자화상이다.

서남수 ‘황제라면’ (채널 A 방송화면 캡쳐)

6·4 지방선거에 출마한 일부 후보들은 희생자 추모를 빙자, 홍보성 문자메시지를 유권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날리기도 했다. “애도한다. 선거운동을 중단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잊지 않았다. “XX 후보 아무개” 통일성도 없고, 의도도 불손하고, 보기 민망한, 스팸보다 못한 홍보문자다. 이어지는 유한식 새누리당 세종시장 후보의 폭탄주 술자리 논란, 한기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색깔론’ 발언 논란, 실종자 가족을 ‘전문 선동꾼’으로 몰았다가 역풍을 맞은 권은희 의원의 페이스북 논란. 논란이 논란을 낳고, 그렇게 탄생한 또 다른 논란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송영철 안행부 국장 해임(위, YTN 방송화면 캡쳐) 정몽준 사과(방송화면)

논란의 클라이맥스는 송영철 안행부 국장이 장식했다. 팽목항을 방문한 송영철 국장은 실종자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이나 찍자”고 했다가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3시간 만에 그는 직위를 박탈당했다. 비판은 식지 않았다. 사표까지 제출했다. 비극을 업무로 착각한 자의 안타까운 말로였다. 정몽준 아들의 ‘미개인 발언’은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정몽준 아들의 나이 올해 스물(로 알려진다). 세월호와 함께 차가운 바다에 갇힌 단원고 아이들의 나이 열여덟. 이건 블랙코미디일까.

영화 괴물속 진짜 괴물은 국가라는 이름의 무능한 괴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또 한편의 영화를 편성한다면, 단연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추천하고 싶다. 2006년 개봉한 이 작품을 지금 다시 본다면, 이렇게 되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구나’라고. ‘괴물’ 속 진짜 괴물은 국가라는 이름의 무능한 괴물이었다. 한강에 괴물이 출몰하자 정부는 우왕좌왕한다. 상황 파악을 못한다. 대책 마련도 못한다. 막연한 추측을 앞세워 시민을 격리시키고 방역은 해 댈 뿐이다. 그 안에서 “우리 딸이 살아있으니 구해달라”는 강두(송강호)의 호소는 번번이 외면당한다. 긴급 상황에서 불판에 고기를 구워먹고 있는 영화 속 정치인들의 모습이, 나라가 상중인 상황에서 폭탄주 파티나 벌이는 지금의 정치인들과 다른 게 뭘까. 블랙코미디로 봤었는데, 지금 보니 다큐다. ‘괴물’ 이후 10여년. 이 나라는 분명 변했다. 하지만 발전하진 않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다시 ‘광해’로 돌아가 보자. “(노비로 팔린 어머니와 동생의) 생사만이라도 알아도 여한이 없겠다”며 눈물 흘리던 궁녀 사월이(심은경)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그런 사월이를 바라보며 “왕 노릇이 끝나기 전에 네 어미를 꼭 만나게 해 주겠다”고 눈물 훔치던 광해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청와대 행진을 벌인 실종자 가족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이 ‘따뜻한 말 한마디’였는지도 모른다. 믿고 따를만한 리더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지난 18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침몰한 것은 세월호만이 아닌 것 같다. 세월호와 함께 이 나라도 침몰 중이다.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괴물’, ‘광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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