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를 고고하게 거닐던 한 마리 학이 야구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지난 2012년 데뷔한 케이블채널 XTM 정순주 아나운서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야구계에 입문했다. 서울선화예술학교를 졸업한 소녀는 ‘한국 무용수’를 꿈꾸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했지만, 뒤늦게 찾아온 ‘무대 본능’은 그녀를 야구장으로 이끌었다.

십 년 이상을 한국 무용수로 살아왔던 경험은 이제야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한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 번, 수천 번씩 연습을 반복해왔던 그녀의 경험은 이해의 기반이 되어 선수들과 모종의 동질감을 형성했다. 야구 기술이나 수치를 언급하기보다 “그 선수 야구 배트는 왜 가져 왔어요?” 하는 식의 감성적인 인터뷰가 가능한 이유다.

자신을 ‘야구 전문 아나운서’이면서도 ‘체육인’이라고 규정 내려온 지 어느덧 3년 차. “매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야구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그녀는 ‘그라운드의 대모’가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게 최고의 인터뷰가 아닐까요?”라고 되묻는 정순주 아나운서,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Q. 어느덧 2014 프로야구 시즌 개막이 한 달 반 앞으로 다가왔다. 작년에 시즌을 마친 뒤 어떻게 지냈는가.
정순주: 들어오는 일을 하면서 소소하게 보냈다. (웃음) 아무래도 XTM이 스포츠 전문 채널이 아니다 보니 시즌 전에는 각자 스케줄 따라 움직이는 편이다.

Q. 올해로 아나운서 3년 차다.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도 남다르겠다.
정순주: 조금은 의연해진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스포츠 아나운서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이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인터뷰를 준비했는데 화장법이나 치마 길이로만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면 아쉬움도 컸다. 한 번은 ‘인조인간 같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니까. (웃음) 지금은 그것도 나를 알릴 수 있는 발판이 된다면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다.



Q. 선수들과 인터뷰하는 1분가량의 시간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고 들었다.
정순주: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경기가 보통 6시, 6시 30분쯤 시작하는 날에는 2시까지 경기장을 찾는다. 지난 경기 때 부상을 당한 선수나, 억울했던 선수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주고 본 경기 이후 인터뷰 때 그 부분을 녹여내려고 노력한다.

Q. 그래서인지 당신의 인터뷰는 특유의 감성이 담겨 있는 듯하다.
정순주: 예민한 질문을 던질 수 있으려면 선수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경기 전, 후에 선수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게 중요하다. 한 번은 앞선 경기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타자가 경기 전에 상대 팀 선수의 연습용 배트를 들고 가서 연습하더라. 그 선수가 수훈 선수가 됐을 때 그런 부분을 언급하면 의외로 재밌는 답변이 돌아온다. 또 재작년에는 팀 관계자로부터 “부산 롯데 선수들이 성적이 안 좋아서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바닷가 야간 훈련을 강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기 후에 수훈 선수에게 그 부분을 언급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뒷이야기를 털어놓더라. (웃음) 물론 롯데 팬들이 더 좋아했다.

Q. ‘승리’의 이면에 담긴 선수들의 땀과 노력은 야구에 대한 지식도 물론이고 ‘스포츠’ 자체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포착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순주: 한 때 한국무용을 했던 경험이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 큰 도움이 됐다. 나도 한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수백, 수천 번 연습을 해봤기에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심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 부분이 선수들과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Q. 한국무용을 하다가 아나운서가 됐다는 사실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원래 무용수를 꿈꿨나.
정순주: 선화 예술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나왔다. 원래 몸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걸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십 년 이상을 훈련에 매달려왔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뒤에는 교육에 뜻을 두고 몇 년간 예술 교육업에 종사했다.



Q. 비교적 늦은 나이에 새로운 분야로 뛰어드는데 두려움은 없었나.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아나운서’라는 직업으로 끌어당겼나.
정순주: 대학원 재학 시절 연단에 섰을 때 남다른 희열이 느껴졌다. 근데 어느 날 우연히 본 TV 속에서 SBS 박선영 아나운서의 모습을 봤다. 처음에는 막연한 동경 정도였는데 이게 현실적인 문제와 겹치니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지?’ 하는 회의감이 왔다. 그래서 무작정 아나운서 학원을 찾아가 등록을 했고 ‘나이가 많다’, ‘준비가 덜 됐다’는 주변 반응이 듣기 싫어서 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Q. 선수들 사이에서는 ‘체육인’이라는 단어가 모종의 동질감을 형성하듯, 같은 분야에 종사해왔다는 경험은 당신에게도 남다른 장점이 될 것 같다.
정순주: 당연하다. 그 끈질김과 열정, 경험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웃음) 그게 내가 스포츠 아나운서를 준비하면서 기대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달까.

Q. 지금이야 그렇지만 처음 아나운서가 됐을 때는 새로운 직업에 적응하느라 고생 좀 했을 것 같다. (웃음)
정순주: 말도 못 한다. XTM이 스포츠 전문채널이 아니다 보니 따로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데뷔하자마자 바로 생방송에 던져져서 우왕좌왕했다. 아나운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그렇다. 따로 조언해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Q. 답은 찾았나.
정순주: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문성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직업인이 지녀야 할 자긍심과 열정으로 이 분야 최고가 되고 싶다. ‘야구장의 대모’가 내 꿈이다. (웃음)



Q. 최근 XTM 조유영 아나운서는 tvN ‘더 지니어스: 룰 브레이커’에 출연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타 분야 진출 계획은 없나.
정순주: 확실히 이젠 아나운서와 연예인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나는 아직 중심을 잃고 싶지 않다. 가능성을 열어두겠지만, 나의 영역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게 먼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면 내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고 싶다.

Q. 야망이 느껴지는 발언이다. (웃음) 곧 2014 시즌이 개막한다. 다시 만날 선수들과 야구팬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정순주: 한 걸음, 한 걸음씩 야구인이 되어가고 있다. 2년 동안 성장해왔으니까 이번 시즌에는 그동안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신 마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인터뷰로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 드리겠다. (웃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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