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건,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얘기다. 그러니 구구절절 그의 연기에 대해 찬탄하는 건 재미없는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가 사랑할 때’를 보면 그의 연기를 다시금 논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뻔해 보일 수 있는 상황과, 위태로운 우연의 남발과, 낯간지러울 수 있는 대사들이 황정민을 통과하는 순간 ‘진짜’처럼 보이는 마법을 일으킨다.

멜로영화 안에서 황정민은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남자의 분위기를 풍겨왔다.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로드무비’의 동성애자 대식이 그랬고, 사랑을 믿지 못해 방황했던 ‘행복’의 영수가 그랬으며, 이번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의 태일이 그렇다.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너는 내 운명’에서는 한 곳에 나무처럼 정착하려 했지만, 그땐 여자가 그의 품을 떠나려 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할 때 황정민은 매번 그렇게 서글픈 자였다. 사랑이라는 운명 앞에서 KO패 당하기 일쑤였던 남자 황정민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다. 아마, 이 인터뷰의 부제를 붙이자면 ‘황정민이 사랑할 때’ 쯤 되지 않을까.

Q. ‘너는 내 운명’의 석중, ‘행복’의 영수, 그리고 ‘남자가 사랑할 때’의 태일. 매번 힘든 사랑만 하시네요.
황정민: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편한 사랑을 좀 하고 싶어요.

Q. ‘남자가 사랑할 때’의 태일은 ‘행복’의 영수와 비슷하면서도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더군요. 영수가 겉은 따뜻한데 속은 서늘한 사람이라면, 태일은 겉은 거친데 속은 뜨겁죠.
황정민:
맞아요. 개인적으로는 태일이라는 인물이 저랑 더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Q. 영수도 그렇고 태일도 그렇고,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들에는 어떤 마력이 있어요. 붙잡으면 내(여주인공) 인생이 나락으로 빠질 게 뻔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들게 만드는 마력이요.
황정민: 하하. 제가 불쌍하게 생겨서 그런가봅니다.

Q. 아니에요. 보호본능과는 다른 느낌이 분명히 있어요.
황정민: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봤는데, 집에 가서 와이프에게 물어봐야겠군요. 그게 역할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연기한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비어 있잖아요? 그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런 느낌이 오지 않나 싶네요.

Q. ‘너는 내 운명’과 ‘행복’은 30대에, ‘남자가 사랑할 때’는 40대에 찍은 멜로영화예요. 어때요. 30대에 느꼈던 사랑과 40대의 사랑은 다르던가요?
황정민: 이 작품을 선택한 데에는 그 이유도 커요. 30대 때 경험한 멜로와 얼마나 다르게 나올지 궁금했거든요. 다행스럽게도 30대의 내가 가졌던 감정보다 더 깊이가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살떨림’이라든지 미묘한 감정표현 같은 것들이 조금 더 풍부해진 느낌이에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기쁘게 영화를 봤어요.


Q. 연기관에서도 많이 달라진 것 같나요?
황정민:
그럼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도 30대와 40대는 많이 달라요. 물론 지금도 작업할 때는 치열하게 하죠. 다만 30대 때는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 잘해야 한다’ 스스로 목을 조이고 살았다면 40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조금씩 내려놓게 된 게 있어요. 굉장히 좋은 느낌입니다.

Q. 남자 40대… 굉장히 부러워요. 뭔가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남자에겐 40대가 최고의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황정민:
공감해요. 그게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인데요,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여유라는 게 경제적인 걸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삶에 대한 여유를 얘기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이걸 꼭 해야지’ 하고 안달했다면, 이제는 ‘안 되도 그만이지!’ 하는 배짱이 생겼어요. 있는 그대로를 즐기게 된 거죠. 그래서 지금 일하는 게 굉장히 즐거워요.

Q. ‘남자가 사랑할 때’도 즐겁게 촬영하셨겠군요. 어떤 부분이 끌리셨나요.
황정민:
이야기 자체가 워낙 통속적이고 작위적이어서 불편한 부분이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그게 크게 부담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어요. 큰 부담이었다면 안 했겠죠. 저는 그냥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사랑 앞에서 마음 졸이고 설레여 하는 태일의 감정을 관객들이 함께 느꼈으면 했죠. 제가 멜로 영화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Q. 신파적인 것이 두렵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건 ‘너는 내 운명’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너는 내 운명’도 상당히 통속적인 작품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했잖아요.
황정민:
정확하게 보셨어요. 아무리 통속적이고 유치해도 진심만 있다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너는 내 운명’을 통해 이미 겪어 봤으니 두려움이 덜했죠. 그런데 감독님도 그렇고 스태프들도 그렇고, 대부분이 멜로가 처음이라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Q. 한동욱 감독님이 ‘신세계’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조감독 출신이죠?
황정민:
네. 사람 찌르고 때리는 남자들 영화만 해 온 분이라 초반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였죠. “괜찮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진심만 통하면 관객들은 움직인다. 걱정하지 말고 가자!” 이러면서요.

Q. 지금이야 ‘너는 내 운명’ 때의 경험이 있으니 불안함이 없었다 치고, 그럼 ‘너는 내 운명’을 할 때는 어떠셨어요?
황정민:
그때는 저도 많이 헷갈려했죠. ‘관객들이 이런 작위적인 이야기를 좋아할까?’ ‘이야기가 통속적이니 카메라 앵글이라도 세련되게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정말로 많이 했어요. 그런 저를 한 방 먹인 게, (전)도연이-박진표 감독님과 함께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어요. 그때가 영화 촬영 초반이었을 거예요. 저희가 전라남도 함평에서 촬영을 했는데, 그 지역에 극장이 없어서 광주까지 찾아가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봤어요. 영화를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내용도 카메라 워킹도 단순한데 영화가 지닌 에너지와 힘은 대단한 거예요. ‘우와, 이게 배우의 힘이구나’ 싶었죠. 우리보다 영화가 100년을 앞서 있는 할리우드인데, 마음만 먹으면 카메라를 못 흔들겠어요? 그런데도 굉장히 우직하게 찍고 그걸로 감동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이런 게 바로 정석이구나’를 알게 됐죠. 이후에 ‘너는 내 운명’에 더 깊게 몰입했고, 또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죠. 10년이 지난 지금도 진심만 있다면 통할 수 있다고 믿어요.


Q. ‘너는 내 운명’과 ‘남자가 사랑할 때’ 중간에 있는 ‘행복’은 조금은 다른 느낌의 멜로영화였어요. 내용상으로는 분명 신파인데, 결과물은 신파의 느낌이 거의 없었죠.
황정민:
허진호 감독의 역량이죠. 원체 차가운 사람이라서.(웃음) 허진호 감독님과 시나리오 회의하고 콘티 작업을 하면서 그랬어요. “어쨌든 뜨거운 배우를 만났으니 감독님도 뜨겁게 한번 찍어 보면 어때요? 차갑고 쿨한 게 좋은 게 아니에요, 감독님~” 결국 나의 뜨거움과 감독님의 차가움이 융화가 돼서 ‘행복’이 그렇게 나온 것 같아요.

Q. 사랑이라는 감정은 흔하지만 그 빛깔은 제각각이죠. 호정(한혜진)을 향한 태일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어떤 점이 첫 눈에 반하게 만든 걸까요.
황정민:
이건 제 얘기인데, 처음 와이프를 만났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아, 저 친구랑 내가 뭔가 있을 것 같은데?’ ‘결혼을 할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요. 당시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게 첫눈에 반한 거였더라고요. 태일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나 싶어요. 태일의 경우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니 더 당황스러웠을 거예요. ‘이 감정이 도대체 뭐지?’ ‘이게 사랑이라는 거야?’ 그래서 무식하게 들이댄 거죠. 조금만 더 똑똑한 친구였다면 ‘밀당’이라도 했을 텐데, 그런 걸 전혀 모르잖아요. 들이대면 여자가 다 받아주는 줄 알고 덤비죠. 그게 순진한 것일 수도 있고 바보인 것일 수도 있는데, 그런 감정들을 표현해 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Q. 황정민은 연애를 할 때 ‘밀당’을 좀 했었나요?
황정민:
저는 태일과 비슷하다니까요. ‘밀당’ 같은 건 잘 못해요.(웃음)

Q. 영화에서 태일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떠나려하죠.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준다는 말, 믿나요?
황정민:
저는 믿어요. 믿습니다.

Q. 그래 본 적은 있으시고요?
황정민:
그런 적은 없는데, 집 사람과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데, 그런 당신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그럼 보내 줄거다”라고요. 어쩌겠어요. 내 욕심을 채우자고 붙잡고 있는 건 굉장히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붙들려 있는 사람도 굉장히 불행할 테고요. 내가 정말로 상대를 사랑한다면 보내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순간에는 너무 불행하겠지만요.

Q. 갑자기 한혜진 씨가 출연하는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가 떠오르는군요.
황정민:
아, 그 드라마 내용이 그런 거예요? 제가 TV 볼 시간이 없어서 몰랐습니다.(웃음)

Q. 태일은 거친 남자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굉장히 순애보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어요. 전혀 다른 두 가지를 이물감 없이 오갈 수 있는 배우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모두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가 힘들었어요. 온순함과 독기가 공존해 있는 경우가 많았죠. 그렇다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이런 캐릭터들에 끌렸거나, 원래는 평면적인 캐릭터들이었는데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거치면서 풍부해졌거나. 저는 후자라고 봅니다만.
황정민:
그렇죠. 대본에 있는 캐릭터들은 배우가 연기를 해야 생명을 얻는 거잖아요. 그때야 비로소 한 인물이 창조가 되는 거죠. 인간에게는 다양한 모습이 공존해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부모님을 대할 때의 나와 친한 친구를 대할 때의 나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의 나와 싫어하는 사람 대할 때의 나는 다 다르잖아요. 내가 인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거죠. 저는 그 다양함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캐릭터를 연기할 때 다양하게 표현하려고 의식하죠.

‘로드무비’ ‘너는 내 운명’ ‘행복’ ‘남자가 사랑할 때’(왼쪽 위에서 시계방향) 영화 안에서 황정민의 사랑은 매번 아팠다.

Q. 이제까지 맡은 캐릭터 중에 창조의 쾌락이 가장 컸던 인물은 누구인가요?
황정민: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기보다 주변에서는 ‘신세계’의 정청을 많이들 얘기하더군요.

Q. 아, 정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남우주연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황정민:
하하. 고마워요. 정청도 대본상에서는 조금 평면적이었어요. 저는 이 인물이 원석적인 느낌이 들었으면 했어요. 만만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느낌. 비어있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꽉 차 있는 느낌. 그런 느낌의 사람이길 원했죠. 또 하나는 ‘신세계’를 본 관객이 영화를 안 본 사람에게 정청이라는 인물을 소개할 때 뭔가 임팩트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있었음 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욕이었죠. 사실 대본상에서는 욕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설 때, 정청 그러면 “씨X” 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자동적으로 딱 떠올랐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대사를 저에게 맞게 조금씩 고쳤어요.

Q. ‘신세계’도 그렇지만 ‘부당거래’ ‘사생결단’ 등 출연작을 보면 대사의 타이밍을 가지고 상황을 요리하는 재주가 탁월하세요. 대사를 맛있게 소화한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이건 연극 무대에서 익힌 기술 덕분일까요?
황정민:
그건 기술이 맞아요. 연기라는 게, 감정이 중요하긴 하지만 테크닉도 무시 못 하거든요. 말의 호흡이랄지, 타이밍이랄지. 그런 부분에서는 기술적인 게 필요해요.

Q. 그런 건 훈련으로 충분히 좋아질 수 있나요? 아니면 타고 나야 할까요.
황정민:
훈련으로 충분히 가능해요. 타고나는 사람은 드물죠. 저도 훈련을 통해서 익혔어요. 타고난 사람은 류승범 말고는 못 봤습니다.

Q. 아, 류승범 씨.
황정민:
승범이는 정말 타고났죠. 본능적으로.

Q. 좋은 남자와 사랑하기 좋은 남자는 별개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좋은 남자가 결국에는 사랑하기에도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나요.
황정민:
후자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어요.

Q. 본인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시나요?
황정민:
좋은 남자라기보다는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남자죠. 저는 그런 남자입니다. 집사람에게 말이죠.

Q. 태일이처럼 계약서를 이용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을 거시겠습니까.
황정민:
아… 잘못 얘기하면 닭살스러울 텐데… 제가 또 계약에는 굉장히 약해요. 계약을 하면서도 ‘내가 갑이야, 을이야?’ 이러죠. 하하. 어쨌든 계약서를 통해 상대에게 나를 어필하고, 나를 믿게 하려면 큰 걸 걸어야겠죠. 음… 결국 나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걸어야 상대가 나에게 믿음을 가질 것 같아요.


Q. 사랑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식을까요?
황정민:
흔히들 갖다 붙이기 좋은 말로 정 때문에 산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몇 년 전인가? 하루는 제가 엄마에게 “엄마는 아버지 사랑해?” 라고 물어봤어요. 우리 어머니 왈, “아이고, 지랄~” 하하하. 저는 그 말이 너무 웃긴 거예요. 그러면서 그 말에서 ‘우리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는구나’를 느꼈어요. 사랑은 결국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 나이가 들면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안다고 하잖아요.

Q. 살면서 사랑만큼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요? 역시 사랑이 가장 중요할까요?
황정민:
사랑도 중요하지만, 배려! 배려가 정말 중요하죠.

Q. 많이 배려하는 편인가요?
황정민:
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집사람에게는 너무 많이 배려하죠. 무조건 하자는 대로 하니까요.

Q. 잡혀 사시는 군요.(웃음)
황정민: 그런 것도 있고요. 굳이 얘기해서 싸워봤자 뭐하나 싶은 것도 있어요. 내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것도 속된말로 짜치고. 그래서 집에서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요. 그게 배려라면 배려라고 생각하고요.

Q. 연기할 때는 어때요? 굉장히 치열하게 연기하시는 걸로 유명하신데.
황정민:
그럼요. 배려를 깔기는 하되, 연기할 때는 아주 치열하게 하죠. 그땐 내가 아니잖아요. 황정민을 보여주는 거라면 얼마든지 맞출 수 있지만, 이건 내가 가공해 내는 또 다른 인물인 거잖아요. 관객들이 나를 통해서 그 인물을 보는 거기 때문에, 내가 잘못 연기 하면 극장을 찾아 준 관객들에게 미안한 일이죠. 그건 내 스스로에게 용서가 안 돼요. 그래서 연기할 때는 정말로 치열하게 해요. 헤어스타일부터 의상, 작은 소품 하나까지 다 신경 쓰는 편이고요. 그래서 저는 작업들어가기 전이 가장 힘들어요. 의상 컨셉 회의하고 캐릭터 잡고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요.

Q. 그래서 그런지 (황정민이라는 이름을 캐릭터에 그대로 사용한) ‘댄싱퀸’은 제외하고, 영화를 보다 보면 황정민은 사라지고 완전히 캐릭터만 남는 느낌이이에요. 메소드 연기의 일종인 셈인데, 좁은 의미의 메소드 연기가 아닌 황정민 만의 메소드 연기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황정민:
제 메소드 연기의 특징은 작품이 끝나면 잘 까먹는다는 거예요. 촬영이 딱 끝나면 “누구세요?”가 바로 돼요. 아마 촬영하는 동안 너무 치열하게 해서 ‘이제 끝났다! 오 마이 갓! 지금부터 그 인물은 내가 아니야’가 되는 것 같아요. 캐릭터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만큼 다음 작업이 세팅될 때 새로운 캐릭터에 빨리 몰입이 되고요. 그게 저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죠. 또 하나는 ‘이 작품을 하겠습니다’라는 게 결정되면 더듬이가 계속 그 인물을 향해요. 모든 걸 그 인물과 관련지어서 생각하죠. 그러다보면 그 인물이 되는 순간이 자연스럽게 오더라고요.


Q.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느냐가 일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겠네요.
황정민:
많이 끼치죠.

Q. 와이프나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게 마냥 좋지는 않을 거예요. 예민하게 살펴야 할 게 많을 테니까요.
황정민:
30대 때는 캐릭터에 휘둘리기도 했는데, 40대가 되고 나서는 그런 게 많이 유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로드무비’할 때는 정말로 많이 힘들었어요. 나는 여자를 사랑하라고 태어난 사람인데,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상황이 다 거짓말 같은 거예요. 그 스트레스 때문에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얼굴에 열꽃이 피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매니저가 연고 발라주는 게 일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생각의 차이였던 것 같아요. 남자/여자를 떠나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면 편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게 안 됐던 거예요. 지금은 그런 부분에서 많이 유연해졌죠.

Q. 예전 인터뷰에서 빨리 40대가 되고 싶다고 하셨더군요. 그런 40대가 되셨고, 50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황정민:
50대가 되면 갑자기 팍 늙어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40대를 더 길게 즐기고 싶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이 너무 좋아요. 행복하고. 그래도 ‘남자가 사랑할 때’를 보고 그런 생각은 들더군요. ‘나이 50에 멜로를 한번 할 수 있겠는데? 해 볼만 하겠는데?’ 그런 자신감은 생겼어요.

Q. 2008년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당신을 봤어요. 굉장히 신나 보이시더군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어쌔신’ 등 영화 촬영 중에도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 서 오셨는데, 앞으로 공연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황정민:
안 그래도 올 가을에 연극을 한 편 제작해 볼까 생각중이에요. 소극장에서 조그마하게 관객들과 만나고 싶어요.

Q. 올 가을에요? 새롭게 들어가는 영화가 있는 걸로 아는데 도대체 시간은 어떻게 조율하시나요.
황정민: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은 촬영을 마쳤어요. 3월부터는 영화 ‘베테랑’ 촬영에 들어가고요. ‘베테랑’(류승완 감독)이 끝나면 7월 정도가 될 텐데, 그때 연극을 해 볼 계획이에요.

Q. 연기를 정말 쉬지 않고 하시네요. 배우가 안 됐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황정민:
이 얼굴에 배우 안 했으면 큰일 났죠. 뭐가 됐을까. 바보가 됐겠죠. 하하하.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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