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비슷한 동양인일지라도 낯선 일본어나 중국어 발음이 들리면 시선을 빼앗기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지금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선을 보낸다면 그런 사람이 더 ‘이종’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여행이나 유학이 아닌,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외국인 중에서도 유독 ‘한국을 사랑한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만나게 되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텐아시아는 한국인의 말버릇을 그대로 닮아있는 외국인 방송인 ‘셋’을 만났고, 설 명절을 맞아 맵시 좋은 한복도 입혀보았다. 한복 입은 품새가 꽤나 고풍스럽다. 통상 명절 때마다 한복을 입고 찾아오는 다른 한국인 배우들보다 어째 더 좋아하는 얼굴들이다.

곱게 빗어 올린 머리에 흰 눈처럼 새하얀 얼굴, 한복을 빼입은 그녀는 똑 부러지는 말투로 속담도 척척 꺼내 놓는다. 눈만 감고 듣는다면 한국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어느덧 한국 생활 9년 차를 맞은 파라과이 여자, 아비가일 알데레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가 한국에서 아홉 번째 설을 맞기까지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의사를 꿈꾸던 열아홉 살 소녀는 한국에 먼저 건너온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낯선 이국의 땅을 밟았고, 2006년 KBS2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에 출연하며 방송인의 길을 걷게 됐다. 어린 나이에 대학생활과 방송활동을 병행하며 어려움도 겪었고, 외국인 여성에게 으레 따라붙는 선입견에 상처받은 일도 많다.

그럼에도 아비가일은 여전히 “한국이 좋다”며 “특히 복잡한 서울보다는 청국장 맛 나는 시골이 좋다. 그래서 ‘섬마을 쌤’도 출연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새 입맛도 성격도 한국 사람처럼 변해버렸다는 그녀에게 ‘한국’이란 무엇일까. 외국인 방송인으로서 방송가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한국에서 맞는 아홉 번째 설이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머물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비가일: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한국어를 배우고 때가 되면 가자!’고 했었는데(웃음). 세월이 흐르니까 어느새 한국 사람이 다 된 기분이다. 이번 설 연휴 기간에는 모처럼 어머니와 함께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휴식을 취하려고 한다.

Q. 근 10년을 타지에서 지내다 보면 정말 그럴 것 같다. 어떨 때 자신이 ‘한국사람 다 됐다’고 느껴지는가.
아비가일: 일단 성격이 급해졌다. 남미 사람들은 원래 느긋하다. 파라과이에서는 “오늘 이만큼 하고, 못하면 내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모레…” 이런 식이다(웃음). 시에스타(점심시간 무렵의 낮잠)까지 있으니 오죽하겠나. 한국에 살면서 뭔가를 할 때 부지런해졌고, 입맛도 변했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와 이태원 파라과이 음식점에 갔는데, 입에 안 맞더라. 학교 친구들(아비가일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다)과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는데 너무 느끼해서 김치를 찾기도 했다(웃음).



Q. 평범했던 ‘유학생 아비가일’의 삶은 ‘미수다’ 출연 이후 급변했다. 원래 방송 쪽으로 일을 해보고 싶었나.
아비가일: 사실 중·고등학교에 다닐 적만 해도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파라과이에는 대학교 입학 전 관련 과목을 미리 배울 수 있어서 의대 입시를 준비했었다. ‘미수다’에 출연은 ‘방송인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결정한 게 아니다.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방송은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이가 드니까 뭔가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Q. ‘미수다’ 출연 이후에는 어떤 일들을 해왔나. ‘섬마을 쌤’에 출연하기 전까지의 행적이 묘연하다.
아비가일: 계속해서 방송에 출연했다. 주로 아침방송과 여행 프로그램에 나갔다. 라디오에 고정 게스트로도 출연 중이다. 선천적으로 사람 만나고 그렇게 놀러 다니는 게 적성에 맞는다.

Q. ‘섬마을 쌤’은 다른 예능과 달리 오지에 가까운 섬마을을 오간다. 그건 한국 방송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힘들지 않나.
아비가일: 한국 연예인들과 이야기해보면 보통 “스튜디오에서 편하게 녹화하고 싶다”고 하더라. 근데 나는 지방 촬영이 더 좋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면 진짜 한국을 느낄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말을 걸면 고구마, 전복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시려고 하신다. 시골에는 정말 청국장 맛이 나는 사람들이 사는 셈이다. 또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도 참 좋다. 여러모로 외국인에게는 독특한 경험이다.



Q. 샘 해밍턴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워낙 익숙해진 외국인이라, 사실 ‘섬마을 쌤’을 보면 당신과 샘 오취리가 가장 눈에 들어오더라.
아비가일: 나야 워낙 한국을 좋아하니까(웃음). 샘 오취리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지만, 그는 혼자 지내지 않나. 그래서 ‘섬마을 쌤’을 통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고향 생각이 나서 더 좋아하는 것 같다.

Q.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아비가일: 외국인이 한국에서 사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과거와 비교하면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외국인에 대한 선입견이 존재한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에는 택시 기사가 “하루에 얼마냐?”고 물은 적도 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요즘은 외국인을 보는 한국 사람들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느낀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데 언어는 크게 중요치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Q. 최근 ‘섬마을 쌤’에 출연한 성시경과 묘한 기류가 포착되며 연일 온라인 포털사이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그 인기를 조금 실감 하는가.
아비가일: 지금도 내가 TV에 나오는 걸 보고 “너 팔자 폈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방송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사석에서 보면 안타까운 순간이 더러 있다. 한국에서 스타로 산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 않나. 자신의 행복이 방송을 통해 결정된다면 슬플 것 같다. 나의 행복은 방송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것도 살면서 경험하는 많은 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Q.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를 돌아본다면 어떤 한해였나.
아비가일: 작년에는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힘들었다. 한 번 사람에게 마음을 덴 후에는 스스로 마음의 장벽을 쌓던 시기도 있었다. 매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Q. 올해 목표가 있다면.
아비가일: 돈을 얼마를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평소 다문화 가정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다. 올해는 방송을 통해 사랑을 많이 받은 만큼 그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예능 프로그램 외에 연기에도 도전해 보려고 한다. 다니엘 헤니 같은 외국인 남자 배우는 있는데 여자는 없지 않나. 전지현처럼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싶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웃음)

Q. 마지막으로 설을 맞아 텐아시아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아비가일: 2014년 새해가 밝았다. 건강과 행복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웃음’이 가득한 한 해가 되셨으면 좋겠다. 사실 그게 가장 쉽고도 어려운 일이니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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