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에서 계속) 쌈지와 월드컵 경기장 지하철 역 구내에서 진행된 카바레 사운드 5주년 기념 공연에 참여한 그는 밴드와 합주를 하면서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하지만 레이블에선 한동안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홍대에서 음악 하는 친구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연을 보려 다니기 시작했다. 2001년 시민단체 ‘문화연대’에서 다큐영상 찍는 스태프로 참여한 그는 집회나 토론회를 기록했다. ‘문화캠프’라는 여름캠프를 촬영하러 갔다 ‘퍼포먼스 반지하’란 모임을 알게 되면서 외부활동 많아졌다. 모임은 퍼포먼스에 대한 철학이 강력했다. 자연스럽게 연기론, 인생을 표현하는 방식을 위한 워크숍에도 참여하면서 김목인은 가사쓰기와 스토리텔링에 대한 공부를 심도 깊게 하게 되었다. 그 모임은 이후 4인조 혼성그룹 케비넷 싱어롱스의 멤버들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번 맛을 본 음악에 대한 갈증이 생겼지만 아무 연락이 없어 김민규가 리더로 활동하는 혼성듀엣 플라스틱 피플 공연에 찾아가기도 했다. “나중에 민규 형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앨범작업에 참여하는 세션이 아니라 카바레사운드에서 직원을 뽑는데 관심이 있냐고 하더군요. 무조건 관심이 있다고 했죠.(웃음)”(김목인) 2003년 여름 카바레 사운드에 취직하면서 대학을 그만 두는 중대 결심을 했다. “어머니가 막연하게 아들이 창작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실을 아셨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당시 작은 것이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르는 분야에서 일하면서 배우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김목인)
카바레사운드에서 제작, 홍보 쪽 일을 시작한 그는 케비넷 싱어롱즈 멤버가 될 친구들과 합주를 하면서 2004년 정식으로 밴드를 결성했다. 처음 자작곡을 연주하는 밴드라기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멤버들이 모인 이름도 없는 아마추어 같은 밴드였다. “가끔 데모도 만들었는데 멤버들이 인디레이블에서 일하고 있으니 관심 많은 친구들은 저희를 거의 전문가인줄로 알았죠.(웃음)다. 가끔 데모도 만들었는데 멤버들이 인디레이블에서 일하고 있으니 관심이 많았다. 처음 4인조로 시작했는데 창작 작업을 바로 시작하진 않았고 저는 플라스틱 피플의 건반 세션으로 한동안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건반을 치시지만 초창기 플라스틱 피플에선 윤주미 씨가 드럼을 치면서 보컬까지 했었습니다.”(김목인)
케비넷 싱어롱즈 멤버들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버스킹 문화를 알게 되면서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연주를 하면서 악기조합에 변화를 주는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창작을 시작한 것은 친구들의 캐릭터를 재미삼아 노래로 만들어보면서부터. “2003년에 처음 노래를 만들었는데 간단하게 친구들 이야기를 담은 포크송 같은 ‘모닝담배 블루스’입니다. 녹음 한 적은 없습니다. 그 다음 만든 노래는 2004년 겨울에 카바레사운드에서 캐럴앨범을 제작했을 때 성문형이 만들어 해보라해 멤버들이 공동 작업으로 습작처럼 만든 ‘어느 밴드의 캐럴송’입니다. 정식으로 녹음을 하면서 ‘케비넷 싱어롱즈’라고 밴드명도 지었습니다. 저희가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본 어떤 아저씨가 니들 보니 옛날 싱어롱하던 때가 생각나 재미있다고 말해주더군요.”(김목인)
처음 멜로디가 쉬운 러시아 민요나 팝송 같은 이런 저런 커버 곡을 짬뽕처럼 노래했던 이들은 자작곡을 만들면서 2005년 디지털 음원으로 ‘노래는 멀리 날아가리’를 발표했고 광복60년 기념 문화사업교류로 사할린에도 방문했다. 2006년 자작곡들로 구성된 정규 1집 ‘리틀 팬페어(LITTLE FANFARE)’를 발표했다. 멤버 모두 그림을 그렸지만 앨범 재킷을 장식한 그림은 김목인의 그림으로 채택되었다. 길거리 음악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가득한 앨범에는 방안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부터 다 함께 부르는 노래까지 마치 내 이야기로 느껴지는 무려 15곡이 수록되었다.
케비넷 싱얼롱즈는 인디 신에서도 겉도는 독특한 밴드로 지방에 까지 입소문을 타면서 특히 영화제에 많이 초대를 받았다. “음악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친구들이라 여기저기에 일거리가 연결되었습니다. 저희는 마인드는 프로가 아니었지만 공연수익으로 생활을 했을 정도로 프로처럼 활동하면서 여러 공연 기획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분방한 밴드였지만 레이블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어 스트레스도 많았습니다.”(김목인) 유럽여행을 떠났던 2007년 고향 후배들인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조웅, 임병학이 회사로 데모를 보내와 만났고 2008년에는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 멤버들과도 만났다.
친구들 모임 같은 자유로운 스타일로 밴드를 운영했기에 멤버들은 음악적인 욕심이 없었다. 당연 활동은 제한적이었고 점차 멤버간의 연주 실력에도 편차가 나기 시작했다. 2010년 카바레 사운드를 그만둘 때까지 밴드활동은 병행되었다. “일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회사이면서 음악인들의 공동체인 작업실인지라 경계가 불분명했어요. 활발하게 밴드를 한 것도 아니었고. 창단멤버로 아코디언를 연주하며 보컬도 했던 여성 멤버 차지은은 마지막까지 남았던 친구입니다. 특이하게 뭘 해보자는 건 아니었고 둘이 하니까 함께 낭독을 해보기도 했죠. 1집에 나레이션을 넣은 것은 그 연장선상입니다.”(김목인) (part5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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